[공연리뷰] 제25회 서울세계무용축제의 세 작품
[공연리뷰] 제25회 서울세계무용축제의 세 작품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11.19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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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댄스2022 편력기
SIDance 2022 포스터 (사진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SIDance 2022 포스터 (사진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가을마다 세계의 갖가지 춤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서울세계무용축제(Seoul International Dance Festival, 예술감독 이종호, 이하 시댄스)가 지난 9월 14일부터 10월 2일까지 예술의전당, 서강대 메리홀, 서울남산국악당, 문화비축기지 등 도심 곳곳 주요 공연장들을 춤으로 채웠다. 역병으로 묶였던 3년, 비로소 자유로워진 세계의 춤들은 여느 때보다 열렬했다.

예술의 경험이 일상에 매몰된 감각과 사유를 확장하는 일이라면 이런 것 저런 것들이 한 현장에 모여 인사와 축하를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섞는 페스티벌이야말로 달라진 나를 만들어주는 최대치의 시공간이 아닐까. 필자의 경우, 춤을 좀 안다고 말하는 일이 허락될 수 있다면(미처 못 만난 춤들, 만났으나 깊숙이 만나지지 못한 춤들에 대한 두려움을 직업병이라 간신히 받아들이고 있는 처지다), 그렇다면 그것의 5할 쯤은 시댄스 덕이다. 춤들을 좇아 행랑을 지고 나름 여기저기를 다녔대도 뭐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웠겠나.

시댄스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가 세계의 지도를 펼치는 가을마다 나는 ‘인텐시브한’ 춤여행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저런 크고 작은, 예술적인 춤, 대중적인 춤, 실험적인 춤, 유명세의 춤, 생면부지의 춤, 취향 밖의 춤까지, 춤으로 특화하여 세간과 시절의 화제작과 문제작들을 불러들이는 시댄스는 춤들과 연관한 나의 역사에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 시댄스가 팬데믹의 족쇄를 끊고(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온라인으로라도 춤들을 전송했다) 명백한 페스티벌을 펼쳤다. 의미심장하게도 올해의 메인 테마는 '춤에게 바치는 춤들'이다.

사반세기 꼭짓점을 찍는 올해 시댄스의 축제마당에는 9개국 34편의 춤들이 모였다. ‘제25회 기념특집-춤에게 바치는 춤들’의 구역에서는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유령들>, 김미애의 <여 [女] 음>, 독일 무부아르(Mouvoir)의 <Hello to Emptiness>, 포르투갈 조나스&란더(Jonas&Lander)의 <Bate Fado>와 무용역사기록학회의 도큐먼트 공연 <Reconnect history, Here I am>이, 수교 60주년 기념 ‘이스라엘 포커스’에서는 휴먼필즈(Human Fields)의 <Human Fields>, 샤하르 비냐미니(Shahar Binyamini)의 <Evolve>, 솔 댄스 컴퍼니(Sol Dance Company)의 <TOML(Time of My Life)>가, ‘해외초청’ 구역에서는 네덜란드 클럽 가이&로니(Club Guy & Roni)의 <Freedom>, 덴마크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의 <to come(extended)>, 키프로스 에비에 데메트리우(Evie Demetriou)의 <Genes and Tonic>, 룩셈부르크 질 크로비지에(Jill Crovisier)의 <THE HIDDEN GARDEN> 등이, ‘국내초청’ 구역에서는 육미영의 <…잃었다…>, 윤푸름프로젝트그룹의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보만리의 <노동(勞動)>, 김윤정의 <인터뷰1.5>, 김백봉부채춤보존회 아홉 작품, 파란코끼리의 <진동축하> 등이 관객들을 맞았다. 이 외에도 시댄스 자체 기획 제작 섹션인 ‘후즈넥스트(Who’s Next)’ ‘한국의 춤-전통춤마켓’ ‘댄스잇송(Dance Eat Song)’ ‘시댄스 투모로우(SIDance Tomorrow)’와 포럼·워크숍·아티스트와의 토크 등 부대행사들까지, 20여 일간 춤들은 관객들을 춤들의 세계로 데려가주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 혹은 춤을 두고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몇 가지 지점들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글의 제목을 유념해주시기를 당부 드린다. 편력기, 가능한 모든 춤들과 만나고 싶었지만 서른네 편 전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났던 모두와 공명 깊었던 것도 아니고 나의 감응과 관객들의 반응이 어긋나는 작품들도 있었다. 사설이 긴 것은 모든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음을, 누락들은 필자의 사정과 필요에 의함임을 밝혀두고 싶어서이다. 다양한 별들이 저마다의 빛을 발했던 시댄스에서 각자의 별자리들이 엮였으리라 믿는다.

 

유령들 (c) 목진우
김보라 '유령들' (c) 목진우

사이-존재들, 실로 존재함을 보이다

아트프로젝트보라 <유령들>

명증한 시노그래피와 예리하고도 집요한 주제의식과 치밀한 몸의 구현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사로잡고 있는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유령들>이 올해 시댄스의 개막작이었다. 춤을 꽤 좋아하여 작업 선상에서 춤을 탐색하고 있는 시각예술가와 동석하게 됐었는데, 공연 전에 미리 만났던 우리는 마친 후에는 각자 짊어진 내일의 스케줄을 위하여 ‘쿨’하게 헤어지기로 했었다. 그러나 김보라가 펼친 유령들의 세계가 그야말로 즉물적인 유령들의 출몰이었는지라, 우리는 애초의 심산과는 달리 술을 홀짝이며 ‘왜 유령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어쩌다 좀비영화보다도 더 생생한 유령들의 출현을 보게 된 거죠? 머리를 맞대보았지만 결국 당장의 의미화에는 실패하였다. 왜?의 규명을 포기한 우리는 구체성을 탄복했다. 부딪쳐 박살나기 직전에까지 떨어진 조명기, 적나라했던 유령들, 그에 못 견디고 나가버린 몇몇 관객들. 저도 못 버틸 뻔했는걸요, 기를 다 빼앗긴 기분이에요 지금. 춤의 관람은 보는 것 이상의 몸적 체험이기 때문에 그래요. 춤의 에너지가 보는 이들의 에너지도 구동시키거든요. 보고나면 허기가 지는 작품도 있어요, 마치 내가 한바탕 무대를 뛰고 굴렀던 것처럼. 아! 그래서 지금 우리가 술을 마시는군요! 유령의 세계로부터 환속할 필요가 있어서! 환속이 가능할까. 나는 여직 김보라의 유령들에게 사로잡혀 있다.

여섯 구의 유령들(김보라·김희준·배진호·이규헌·정종웅·최소영)이 처음부터 유령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겹겹으로 의복을 껴입은 자들이었고(한 인간에게 부과되는 호명들 혹은 한 인간을 지탱하고 있는 의식의 누층들), 하나의 스웨터(라캉의 욕망이론에서의 욕망.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으며 상징계의 구조를 연쇄시킬 뿐이다)를 돌려 입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서 또박또박한 분절적 음운의 조합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곤 하였는데 청음(聽音)과 동시에 의미화로 직결되어야 했을 그 발화들은 단 한 건의 의미로도 성사되지 못했다. 상징계에 결착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그들의 발화는 점점 바람소리, 유령의 뉘앙스로 변질했고 어느새 그들은 전라가 되었다.

자고로 벌거벗은 유령이 있었던가? <햄릿>에 등장하는 선왕 유령이든, 우리네 흰 소복 차림 유령이든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주장하고 처지를 호소하는 의복을 입은 채였고 과거의 시간 속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여한을 풀어내곤 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다른 것인 양 말해진 인간, 메타적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섯 구의 유령은 완벽하게 바깥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인간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 과거와의 인과적 사슬 없이 파편적이고 불특정하고 불가능한 작태로 그저 ‘저기’에 ‘있다’.

 

김보라 '유령들' (c) 목진우

노출된 복부와 외부를 향한 음부, 가려야 할 것도 보호해야 할 것도 없는 완벽한 개방성. 협응의 관계와 정상적 각도를 무심히 벗어나는 사지(四肢)의 이질적인 움직임, 그리하여 기괴한 존재들. 그들은 인간적 언사(言辭)로는 도무지 형용 불가능한 동작으로 움직여 다닐 뿐이었는데 어떤 대상, 어떤 상황과도 결부되지 않으므로 일체의 ‘행위’로 성립하지 못하는 그 움직임들은 그야말로 유령의 실존을 지시할 뿐이었다. 말미에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 5번> 4악장, ‘러브레터’라는 애칭으로 불리곤 하는 그 포근하고도 풍성한 선율이 드라마틱하게 볼륨을 더하며 깔려와 세계를 채워도 그들은 아랑곳없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관객은 무력할 도리밖에. 유령들에게 압도당했거나, ‘왜?’라는 내부의 메아리를 간신히 견디어내고 있거나. 스스로 관람을 중지한 몇몇 관객들의, 유령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그 결단이야말로 가장 능동적인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왜? 김보라는 왜 작품을 절반씩이나 뚝 잘라 유령들이 활보하게 두었을까? 연유, 미감, 감정 등 인간적 코드로는 도저히 해독(解讀)과 예측이 불가능한, 그러므로 마주치기 두렵고 확인하기 싫은, 확인하려고 해봐야 기껏 불투명한 오인(誤認)으로나 남을 그 존재들을 왜 그토록 선명하게 목격시켰을까? ‘유령’의 ‘존재’를 목도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평론가 김명현은 프리뷰(<더프리뷰> 9월 8일자)를 통해 본작을 소개하면서 유령학(hauntology)과 존재론(ontology) 간의 친연성을 말했다(그녀가 지적한 바대로 프랑스어 체계에서 hauntologie와 ontologie는 ‘옹톨로지’, 동음이의어다). 과연 그렇다. 둘 다 필사적으로 ‘있음’을 증명해내는 작업 아닌가. 김보라는 자의식과 자기도취 사이, 실재하려는 몸과 춤이 되는 몸 사이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유령을 포착했다고 말했다.

배우의 ‘광대 배(俳)’자는 ‘사람 인(人)’과 ‘아닐 비(非)’자로 조어(造語)된다. 무대에 서는 자들은 자신과 자신이 아닌 상태 사이를 오가는 존재다. 아마도 항상성(恒常性)보다는 항진성(亢進性)을 추진하는 삶을 사는 존재(10월 2일, 문화비축기지 T1 파빌리온에서 연행된 전인정(파란코끼리)의 작품 <진동축하(Vibration Celebration)>가 전형적으로 신명, 무아지경, 세계로의 개방을 목적하고 그를 향해 치달아가는 춤이었다). 일상적 자아와 도취된 자아의 양단 사이 어디쯤이 자신에 관한 실체적 진실인지 혼돈을 치르는 자들일 터이며,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를 망설이는 자들이며, 승화(昇化)의 희열과 무화(無化)의 허무를 감내하며 아지랑이 같은 예술의 순간들로 생을 엮어가고 있는 자들에게 유령은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존적 감각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다만 심화된 삶일지니, 관객 역시 그러한 존재 아닐까. 우연찮게 유령들에 대한 숙고의 시간이 코로나에 겹친다. 지독한 고열과 관절통과 고립, 기화(氣化)하는 기억과 약속들, 오히려 짙어지는 김보라의 유령들. 나는 다시 환속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세계에, 정말로 확고히 온전케 존재하고 있다 장담할 수 있는 자들은 있는가.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유령과 다른 존재라 확신할 수 있는가.

 

(c) 최인호
메테 잉바르첸 'to come(extended)' (c) 최인호

포르노그래피와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의 경계를 횡단하기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 <to come(extended)>

성(性)을 다룬 이미지들은 담론의 영역에서 포르노그래피와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 등으로 구분된다. 과문함을 무릅쓰고 상식선에서 이 세 가지를 구분해보자면 포르노그래피는 노골적인 성적 표현물 자체를 제시하고, 섹슈얼리티는 정체성과 태도와 실천 등 사회적 관계망 속 작용요인으로서 탐문되는 성의 어떤 측면들을 질문하고, 에로티시즘은 성을 생(生)의 확장적 경로 즉 감응과 소통의 근원적 동인(動因)으로서 조망한다는 정도로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경계는 엄밀한 설정이 가능한가. 성에 연루하는 이미지 혹은 작품은 이 셋 중 무엇 하나로 완전히 포섭될 수 있는가, 그 세 구획은 과연 각각으로서 존립이 가능한 배타적 구역인가.

오래되었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빈에 갔다가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그림들을 보게 되었다. 원래는 클림트(Gustav Klimt)의 그 화려한 색채들을 실물로 만끽해볼 요량으로 찾아갔던 미술관에서 오히려 정반대의, 울퉁불퉁하고 거칠고 색도 탈락시킨 쉴레의 그림들에 붙들렸다. 스승과 제자, 펼쳐진 양단(兩端). 신화와 현실, 빛과 그림자, 장식성과 본성…그 세계의 스펙트럼에서 나를 붙든 건 에곤 쉴레였다. 그 중에서도 풀도 없는 흙바닥, 얇고 구김 가득한 홑겹 천 위에서 간신히 서로를 부둥켜안은 흙빛 맨몸의 남녀를 그린 <포옹(The Embrace)>은 나에게는 세계, 삶, 관계의 결정적 단면이었다(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 복사본이 꽤 오래 작업실 벽면에 걸려 있었다. 숱하게 들여다보았지만 단 한 번도 그 장면이 성적 코드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생에 대한 나의 인상이 그러한 것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에 대하여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였다. 몇몇은 보지 말아야 하거나 혹은 공개적으로 내걸어서는 안 되는 그런 류의 것이라 불쾌감을 표하기도 했다. 하나의 정지된 장면이 이토록 다양한 각도와 감도의 반응으로 펼쳐진다니 각각의 감응들마다 새삼스러웠다. 그 하나의 장면은 속됨으로부터 성스러움으로까지 다양한 누층을 지니고 있고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인도되어 어떤 층위에 가 앉는 것이리라.

아마도 모든 해석과 입장이 그러한 것일 테지만, 특히나 성(性)이라는 테마는 무엇보다도 극명히 주관성에 좌우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춘화(春畫)와 그 해석들이 언제나 난제인데, 그 장면들을 당대의 풍속과 민중의 삶의 엄연한 한 대목들로 인정하는 글들의 내적논리에 수긍을 하다가도 정작 그 화면에 직면하면 기껏 읽어두었던 긍정적 해석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상스럽게 느껴지는, 그 간극을 메꾸지 못한다. 성이란 세상 무엇보다도 원천적일진대 세상 무엇보다도 차이가 지고 그리하여 대강 쉽게 동의가 어려우니, 가장 사적인 것으로 존중받아야 하고 교차하는 여러 입장이 세심히 배려 받아야 할, 가장 ‘정치적’인 주제가 아닐까 싶다.

 

Mette Ingvartsen (c) Bea Borgers
Mette Ingvartsen (c) Bea Borgers

메테 잉바르첸은 그 어려운 주제에 천착한다. <69 포지션>(2014. 2019년 시댄스의 폐막작으로 내한했었다), <일곱 가지 쾌락>(2015), <21개의 포르노>(2017) 등으로 일련하는 시리즈 <<Red Pieces>>는 그녀의 표현에 의거하면 ‘성 정치학’이다. 올 해 시댄스의 해외초청 부문 주요작이었던 <to come(extended)>(2005년 초연작의 확장 개정판본) 역시 성을 다룬다.

스카이블루 빛 전신수트(합성수지, 인공물을 감각케 하는) 속에 개인의 정체성 혹은 인성(人性)을 감추고 등장한 14명의 퍼포머들은 환한 조명과 무음(無音), 몹시도 명백한 무대 위에서 더군다나 정확한 행위와 정지로 적시되는 난교의 이미지들을 연출한다. 관객석은 우리가 흔히 성적 이미지를 소비할 때처럼 비밀스럽지 못하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충분히 어둡지 않고 적막하여 나의 반응은 쉽게 노출된다. 불편하거나 흥분되거나 어쨌든 진동을 겪는 평상심과 그에 따른 제어 불가능한 신체적 반응들, 예를 들면 침이 삼켜진다거나 호흡이 가빠진다거나 할 때의 소리와 현상들을 인근에 들키게 되는 것이다.

2019년의 <69 포지션>에 이어 2022년의 <to come>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잉바르첸의 성 담론화 전략은 적나라한 개방과 탈신비화, 그에 따른 위계의 전복이다. 행위와 체위 등 세부묘사로부터 금기를 거두어냄으로써, 행위 결과를 그 발생 맥락과 분리시킴으로써(예를 들면 인이어 이어폰(in-ear earphones)을 통해 상황을 제공받은 퍼포머가 신음소리를 내는 장면. 난데없는 교성의 강렬한 물질성에 맞닥뜨리는 관객은 그 소리가 고통인지 환희인지를 분간할 수 없다. 본작의 한 대목으로도 연출되었던 이 장면은 <69 포지션>에선 지목된 일부 관객들에 의해 직접 수행, 체험되었었다) 정상과 비정상, 포르노와 에로티시즘, 인성(人性)과 수성(獸性) 등 이분적 경계를 해제하여 관행화된 관계성을 무너뜨리고 그 위계를 전복시킨다.

대상성과 시선의 위력. 행위 주체들을 노출증의 혐의로부터 해방시키고 관객들로부터는 관음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그렇게 성 이미지를 둘러싼 권력관계 논의에서의 가장 오래된 구도를 박살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잉바르첸의 진일보적 의욕(“to come”!)은 친숙한 스윙재즈곡 〈Sing, Sing, Sing〉의 흥취를 타는 한바탕의 군무로 마무리된다. 전신수트를 벗고 나체로 등장한 퍼포머들의 춤은 오히려 (나에겐) 어떤 확실한 안도감을 제공해주었다. 이제 객석은 충분히 어둡고 나의 마른 헛기침 따위는 묻혀버릴 만큼 음악 소리는 크다. 나신들의 춤에는 성적 뉘앙스가 없다. 몸과 몸들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접촉은 손을 잡는 정도다. 남녀노소의 식별이 무의미한 나체들은 익명, 누구의 몸도 아닌 채다. 그러니 나의 시선은 홀가분하다. 죄책감도 쾌감도 없는, 그러나 ‘텅 빈 시선’ 아닌가. 이건가? 잉바르첸의 요청은? 자유롭고 온당한 에로스란 무엇인가?

 

(c) 최인호
메테 잉바르첸 'to come(extended)' (c) 최인호

누군들 그 근원적 생동에 관하여 호언장담할 수 있겠는가. 에곤 쉴레의 그림처럼 <to come> 역시 각각의 경험과 인식의 장에서 의미가 있거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잉바르첸이 도전하는 ‘성의 정치학’은 각 분야에 걸쳐 논의가 깊었고, 건강한 담론과 페티시즘(fetishism)을 분별해야 한다는 촉구도 오래 있어왔다. 나는 <69 포지션>으로부터 중첩하는 의혹을 제기하고자 한다.

렉처 퍼포먼스 형식(관념 위계의 파기를 주장하는 작품의 형식으론 모순적이었다)으로 진행되었던 <69 포지션>에서 잉바르첸은 캐롤 슈니먼(Carole Schneemann)의 <Meat Joy>(1964), 리차드 셰크너(Richard Schechner)의 <Dionysus in 69>(1968), 안나 할프린(Anna Halprin)의 <Parades and Changes>(1965) 등의 텍스트들을 인용했었다. 문제는 몸과 성을 다룬 이 문제적 텍스트들은 서구의 ‘베트남 반전 운동’ ‘우드스탁 페스티벌’ ‘68혁명’ 일본의 ‘전학공투회의’ 등 당대 전 세계에 만연했던 60년대 저항문화의 맥락 밖에 놓이면 그 이미지와 음성기호 자체로는 영락없는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잉바르첸은 이들의 작품에서 발췌한 텍스트와 사진과 영상을 소개하고 그에 조응하는 자신의 행위를 병치했는데 인용한 작품들의 의미와 맥락적 위상에 대한 설명도, 자신의 행위로써 보강하고자 하는 주장의 설득력도 불충분하여 담론 형성에는 그 기여도가 모자란, 동의하기 어렵고 불편한 개인적 취향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to come>에의 감응이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방식들은 특정 시절에만 유용하다. 60년대로부터 어느 지점까지는 은폐되었던 것들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해방적 담론을 강화하는 전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러한가? 여전히 나체와 섹스는 해방의 도구인가? 오히려 상품으로 남용되고 교묘하게 위장한 억압과 착취의 기형적 구조에 복무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은 과거의 전략은 청산하고 섹슈얼리티를 다시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은 아닐까.

 

(c) 옥상훈
클럽 가이 & 로니 '자유(Freedom)' (c) 옥상훈

생의 당위, 토털시어터로 진언되다

클럽 가이 & 로니(Club Guy & Roni) <자유(Freedom)>

역사는 나선형에 비유되곤 한다. 그 진행이 퇴행을 포함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정반합’으로 축약되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이 말하는 역사의 전개과정도 그렇다. ‘반(反)’과 ‘퇴행’을 등치시키는 건 무리지만, 어쨌든 반명제(反命題)는 정명제(正命題)에게 물러섬을 요구하고 그리하여 어느 순간 겨루던 두 판단의 모순이 종합으로 도약해내는 순간을 만나는, 그러나 다시 그로부터의 정과 반의 진행이 연쇄하는 끝없는 현실의 축적이 역사 아닐까. 헤겔 사후에 출간된 ≪헤겔 전집≫ 각 권 속표지에는 “진리는 언제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된다.” 소포클레스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모든 이념엔 완결이 없기 때문이리라. 민주주의도, 자유와 평등 등의 가치도 언제까지나의 진행형.

헤겔은 역사의 진행을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이 스스로 외화(外化)하는 과정으로 보았고(목적론적 세계관이라 비판을 받지만), 절대정신의 본질이 자유라 하였다. 지금 각별히, 온 세계가 작별한 줄 알았던 과거의 시간들과 다시 만나고 있다. 일순간에 냉전시대로 회귀했고 전쟁과 대공황을 염려하게 되었고 자유의 허구를 확인한다. 그 소용을 다한 줄 알았던 거대담론이 부활의 기지개를 켤 시기가 도래한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유에 관한 한 지구상 어느 국가보다도 최대의 허용치를 지닌 네덜란드(네덜란드는 ‘헤도헌(Gedogen)’, 관용과 무간섭의 전통을 지녔다. 국가정책도 금지보다는 통제를 우선하여 여타 나라에서는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난제들, 예를 들면 대마초 흡연(1976년), 임신 중지(1984년), 성매매 구역 양성화(1988년), 동성결혼(2001년), 안락사(2002년) 등을 ‘세계 최초’로 합법화하였다)의 두 안무가 가이 바이츠만(Guy Weizman)과 로니 하버(Roni Haver)는 다시 자유를 말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너무 섣불리 우리의 자유를 옹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가에 관한 진실은 숨긴 채 말이다. We may sometimes be a little too quick to claim our Freedom, hiding behind that freedom is the truth of how we restrict freedom of others to protect our own.”

가이와 로니가 이 시절 다시금 자유를 말하기 위하여 주목한 비극은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Mohamedou Ould Slahi)의 것이다. 그는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지목되어 기소와 재판의 절차도 없이 무려 14년간이나 쿠바의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 수용소에 불법 감금되어 모진 심문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석방 후 모하메두는 회고록 <관타나모 일기(The Guantanamo Diary)>(2015)를 출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 <모리타니안(The Mauritanian)>(2021. 모하메두의 변호사 역으로 열연을 펼친 조디 포스터가 이 영화로 제78회 골든 글로브 상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이 제작되었다. 2002년 무용단 클럽 가이 & 로니를 창단한 이래 개인적 차원의 자유와 해방(personal liberation)을 탐구해온 가이와 로니도 모하메두의 비극으로부터 이미 선취된 양 여겨지고 있는 자유의 실상을 고하기로 하였다.

 

클럽 가이 & 로니 '자유(Freedom)' (c) 옥상훈

그들은 모하메두에게 공연의 대본을 맡겼고, 모하메두는 납치와 고문의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경험, 더불어 비극을 견뎌야했던 가족의 고통, 석방 후 대면에서도 끝끝내 화해를 불발시키는 고문관(사실을 시인하지 않고 관료주의 뒤에 숨어 스스로를 합리화해내며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 시대 어떤 군상의 아이콘이다)과의 통화 장면 등을 설계하였다. 절박한 요의(尿意)의 호소가 불허 당하고 서슬 퍼런 가위가 밑단으로부터 목 근처로까지 맨살을 스쳐 의복을 해체하는 장면으로부터 작품은 시작한다. 인권을 근간으로부터 침탈당하고 무시로 죽음을 고지하는 고문에 노출되었던 무하메드의 14년. 검은 로브 차림의 다섯 무용수들은 위해와 잔혹함의 광경들, 공포와 모멸감과 비탄의 순간들을 구체적이고 열렬한 춤으로 복기한다.

춤이 전사(傳寫)하는 직관적 순간들은 세트, 조명, 음악, 문학 등의 긴밀하고도 세련된 호위를 받는다. 연류하는 타 장르들은 춤의 인상을 한층 보강하고(어둠은 칠흑 같고 빛은 섬광과도 같았으며 후면의 벽화는 절규 그 자체였고, 후안무치의 고문관과 오히려 용서의 계기를 갈구하는 모하메드와의 통화 내역은 분노와 절망을 곱씹게 하였다), 동시에 작렬하는 몸성에 중의적이고 감각적인 기호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특히 각각이 다른 음고(音高, pitch)를 지닌 패널로 만들어진 직육면체 검은 박스들은 작품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을 오르내리며 감옥의 형상이 되기도, 타악기와 칠판으로 기능함으로써 모하메드의 심리적 반영물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완성도 높은 토털씨어터, 그러나 결코 춤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았던, 동시에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 절묘한 균형을 획득한 수작이었다(이렇게 결론짓기까지 ‘예술성’의 함의를 재차 고민해야 했다. 시댄스는 축제, 축제는 만인의 것, 평소 난해함을 지적받았던 동시대 춤들에게 이렇게 제언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렉처’(렉처 퍼포먼스)로 보강하려 하지 말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의 소통 능력을 발현시키는 것이 어떤가). 그리고 지금은 세계의 누구라도 ‘자유’와 ‘평등’의 진위를 질문해야 할 시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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