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무반주 리사이틀
[공연리뷰]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무반주 리사이틀
  •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26 12: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3년 3월 8일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연주 모습 (사진제공=예술의전당)

[더프리뷰=서울]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바이올리니스트 = 연주자는 크게 보자면 두 부류가 있다. 감성으로 연주하는 타입과 머리로 연주하는 타입. 물론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위의 ‘나눔’은 대다수의 연주자들에게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다. 하지만 감히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필자에게 크리스티안 테츨라프(Christian Tetzlaff)는 후자, 그러니까 머리로 연주하는 타입에 가깝다. 물론 테츨라프가 들려주는, 예컨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느린 악장의 순결한 표정이나 바흐 <무반주 소나타>의 욕심 없는 독백은 놀라운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간마다 정교하게 설계해 놓은 리듬의 전개나 전체적 구조의 조망감에는 오직 테츨라프만의 독자적인 음악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테츨라프는 오래 전 LG아트센터에서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단 하루 만에, 그것도 전곡 암보로 연주한 바 있다. 이번 무대는 당시의 연주 이후 실로 오랜만에 오직 ‘무반주’ 작품만을 들고 내한한 무대다. 널리 알려진 대로 테츨라프는 독일의 바이올린 제작자 슈테판-페터 그라이너(Stefan-Peter Greiner)의 바이올린을 사용하며 그라이너를 세상에 알린 연주자다. 사용하던 스트라드를 반납하고 그라이너를 메인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굴지의 솔리스트와 앙상블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2002년에 제작된 테츨라프의 그라이너는 IBK 챔버홀에서 기분 좋은 울림, 특히 풍요롭고 탁월한 배음의 저음부를 들려줬다.

첫 곡으로 연주된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여섯 곡의 이자이 작품 중에서도 가장 형식미가 뛰어나다. 이자이는 절친 요제프 시게티(Josef Szigeti)의 리사이틀에서 연주된 바흐 <무반주 소나타 1번>에 깊이 감명받아 여섯 개의 무반주 소나타를 작곡했으며 이 1번은 따라서 바흐 <무반주 소나타 1번>에 대한 오마주임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테츨라프는 콘서트의 일성(一聲)부터 감상을 배제한 채, 철저한 리듬과 흐름에 입각한 전개를 들려주었다. 이자이 특유의 벨기에-프랑스적 에스프리에 탐닉하기보다는 철저한 리듬 위주의 전개로 앞으로 연주될 많은 작품의 연주 스타일을 짐작케 했다.

테츨라프는 악보 없이 연주된 바흐 <무반주 소나타 3번>에서 보다 익숙한 전개와 자신감을 드러냈다.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는 테츨라프가 비록 현대 악기를 쓰고 있음에도, 극단적인 활의 영역 탐구(지판의 한참 아래에서 연주한다든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이는 본 공연 후 이어진 세 곡의 바흐 앙코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사진제공=예술의전당)

그라이너를 타고 흐르는 테츨라프의 이런 시도는 확실히 올드 이탈리안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옹골찬 음색이나 특유의 컬러를 들려주지는 못했지만, 마치 안개 낀 숲속을 걷는 듯한 신비를 느끼게 했다. 세 곡의 푸가 중 최고난도를 자랑하는 3번 푸가에서도 테츨라프는 거침이 없었으며 확실한 곡의 장악력을 드러냈다.

휴식 후 연주된 쿠르탁의 <사인, 게임, 그리고 메시지> 중 여섯 곡의 발췌곡은 이번 연주의 기분 좋은 ‘놀라움’ 중 하나였다. 쿠르탁의 이 작품은 바이올린뿐 아니라 비올라, 클라리넷, 그리고 소규모 앙상블을 위한 다수의 곡을 포함하고 있는데, 대개 길이는 곡당 2분 안팎이다. 테츨라프는 쿠르탁의 작품에서 바이올린 소리의 자유로운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흥미진진한 실험적 표현을 멋들어지게 드러내 주었으며 이것이 그저 개인적 독백이나 자조에 그치지 않고 청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마지막 곡으로는 바르톡 최후의 명곡 중 하나인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가 연주됐다.

테츨라프는 바르톡에서 이날 연주된 작품들 중 최고의 호연(好演)을 들려주었다. 앞서 언급했듯 ‘감성’보다는 ‘머리’에 가까운 테츨라프의 리듬감과 구조감은 특히 1악장 샤콘에서 절묘한 균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테츨라프는 많은 경우 프레이즈의 마무리(그것이 작은 종지이건 큰 종지이건)조차 인 템포로 처리하고 넘어가는 '흐름'을 강조한 탓에 연주 전반에 걸쳐 다소 서두른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아쉬움은 이 곡의 백미(白眉)인 3악장 멜로디아에서 특히 크게 다가왔는데, 바르톡의 미국 망명 시절, 백혈병 투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고향 헝가리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묻어 있는 느낌이 상당 부분 희석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악기와 함께 온몸을 사용해 리듬을 표현하고 느끼는 테츨라프의 4악장 프레스토 연주는 마치 사무라이가 빠르게 직진하며 거침없이 칼로 베듯, 찬탄할 만한 순간들을 만들어 냈다.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사진제공=예술의전당)

테츨라프는 첫 곡 앙코르 직전, 무려 세 번이나 도처에서 울리는 핸드폰 녹음 소리에 악기로 그 소리를 흉내 내며 청중과 대치(?)했지만, 세 곡의 바흐 앙코르를 들려주며 바흐 마스터로서의 대가적 풍모를 드러냈다.

적당히 안주함 없이 끊임없이 발전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예술가의 모습, 혹은 참된 바이올리니스트의 구도의 길을 접해보길 원한다면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를 권한다. 설혹 그의 음악이 당신의 스타일은 아니라 해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
38kdd@hanmail.net
바이올리니스트.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KCO) 단원이자 한양대 겸임교수. 월간 <스트라드>에 음악 칼럼니스트로 20년 이상 기고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