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서양음악의 전통을 잇는 스타 연주자들
[공연리뷰] 서양음악의 전통을 잇는 스타 연주자들
  • 김정화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1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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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인모-김다솔 듀오 리사이틀

 

바이올린 양인모, 피아노 김다솔 (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바이올린 양인모, 피아노 김다솔 (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더프리뷰=부산] 김정화 음악칼럼니스트 = 지난 3월 29일 부산문화회관의 기획공연 '월드콩쿠르 우승자 시리즈' 두 번째 무대로 양인모-김다솔의 듀오 리사이틀이 열렸다. ‘인모니니’ ‘인모리우스’와 같은 수식어가 붙은, 어쩌면 현재 제일 잘 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부산 출신 피아니스트 김다솔의 듀오 리사이틀 예매 사이트는 열리자마자 팬들의 예매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었다.

필자 또한 지난해 임지영과 홍민수, 레이 첸과 선우예권의 듀오 리사이틀을 인상 깊게 보았던 터라 비슷한 연배 스타 연주자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 2년 전 통영에서 만난 김다솔의 슈베르트 연주는 그를 거듭 신뢰하게 만들었고, 굵직한 콩쿠르에서 단박에 우승을 거머쥔 양인모의 위상까지 합쳐져 그들의 듀오를 내심 기다리던 바였다. 게다가 현재 두 사람 모두 베를린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어 누구보다도 긴밀한 음악적 교류를 나누고 있을 것이라, 음악사적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 같은 기대감까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날은 프로그램 구성이 눈에 띄었다. 베베른(Anton von Webern, 1883-1945)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작품, Op.7>,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1번 G장조, Op.78, ‘비의 노래’>, 푸러(Beat Furrer, 1954- )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곡>,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7번 c단조, Op.30-2> 등 18세기 이후 서양음악의 중심지인 빈을 중심으로 활동한 빈 학파 작곡가들의 작품들로 프로그램이 채워져 있었다.

20세기 빈 콘셉트: 진보적인 대화

베베른은 간결한 음악적 재료들을 사용하여 가장 밝은 색으로 치밀하고 엄격하게 곡을 썼다. 당시에는 최첨단 기술과도 같았던 바르토크 피치카토, 페달 톤(pedal tones)이나 여전히 현대 작품에도 유용한 콜 레뇨(col legno, 활대로 연주하는 주법) 등 특별한 기술을 사용했다. 흔히 그의 음악을 ‘자유롭고 무조적’이라고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의 악곡을 분석해 보면 흠잡을 데 없는 공식적인 규칙이 있다. 이날 첫 곡으로 연주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작품, Op.7>도 마찬가지이다. 작곡가는 다양한 음색을 표현하기 위해 빠르기말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시어 등을 분명하게 명시해 놓았다. 1910년에 쓴 작품으로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곡을 처음 듣는 청중들에게는 여전히 화성인의 대화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곡이 시작되자마자 약음기를 끼운 바이올린 솔로에서 피아니시모로 흘러나오는 깔끔한 Eb-Ab 더블 스톱 음정을 듣는 순간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의 얼굴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이어 피아노를 따라 나오는 바이올린의 주제 선율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듯하면서도 조심스레 굵은 붓으로 전체 그림을 완성해가는 19세기 점묘파 화가들의 붓 터치 같았다. 무심한 듯 점을 찍는 것 같지만 그 내용에 충실한 붓 터치가 이어졌다.

전체 4곡이 62마디에 불과한 짧은 곡이라 아주 작은 연작 소품을 그려내듯 완성했다. 특히 제2곡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간결하고 빛나는 대조가 베베른 작품의 특징을 잘 나타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베베른의 회화적(picturesque)이고 음악적인 다양한 재료들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귀한 순간이었다.

리사이틀의 첫 시작이 20세기 작품이었던 것처럼 인터미션 후 첫 곡 또한 1993년 푸러의 작품으로 다음 문을 열었다. 연주에 앞서 양인모는 피아노의 벤트사이드(bentside)에서 림(rim)이 움푹 들어간 부분에 자리를 잡았고, 객석과 소통을 시작했다. 어쩌면 대중에게 낯선 작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푸러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곡>을 슈베르트의 리트 <겨울 나그네> 중 ‘냇가에서’의 모티브에 비유하여 설명했고, 두 작품을 이어서 연주하며 관객의 이해를 돕고 정서적으로 교감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왕 시간을 할애해 5분 이상 긴 멘트를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배려 차원에서 마이크를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푸러는 우리와 당대를 살아가는 작곡가다. 그는 소비에트의 붕괴와 도이칠란트의 통일, 중동전쟁 등 서구의 굵직한 변화를 경험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곡>은 서로 다른 템포의 4/4박자로 시작해 2마디부터 끝날 때까지 서로 다른 박자와 같은 박자로 끊임없이 엇갈리며 진행되다가 결국엔 4/4박자로 끝난다. 만날 듯 만날 수 없는 듯 각각의 두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미묘한 다이내믹과 템포의 변화로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소리는 몽환적이었다. 조심스러운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대화는 서로 다른 듯 다르진 않은 듯한 모호함과 긴장감에 갇히게 했다. 작곡가 자신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세상의 모호한 경계를 드러내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이끌어가는 끝없는 시간의 변화는 균형을 갖춘 세상의 추억 속에 있는 영원함을 기원하는 것 같았다.

바이올린 양인모, 피아노 김다솔 (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바이올린 양인모, 피아노 김다솔 (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19세기 빈 콘셉트: 사생활의 기억

프로그램의 두 번째 곡인 브람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1번 G장조, Op.78, ‘비의 노래’>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클라라 슈만의 막내아들 부고를 듣고 완성한 작품이다. 1879년 클라라가 브람스에게 보낸 편지에 "터져 나오는 기쁨의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어요. 마지막 악장을 연주할 때는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답니다."라 했다. 이처럼 브람스의 음악은, 특히 실내악 작품은 어느 것 하나 사연 없는 작품이 없다. 작품을 완성할 때 끝없는 고민 속에 완벽을 추구했던 그는 베토벤을 정말 많이 닮았다. 비록 작품 노트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의 일생을 세세히 따라가다 보면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읽어 낼 수 있다. 이 소나타에는 브람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 클라라를 위로하는 애틋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제1악장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피아노의 첫 음들은 초록이 만연한 여름날 어슴푸레 어둠이 내리는 창가에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나오는 바이올린의 주선율에서 기대했던 아련한 추억은 밋밋하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했다. 마디마다 끊어지는 프레이징 처리는 브람스 특유의 긴 호흡을 느낄 수 없게 했다. 그럼에도 피아노는 어느 부분 하나 놓치지 않고 모나지 않은 묵직한 부드러움으로 브람스만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검은 수트에 긴 타이가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김다솔의 움직임은 클라라를 그리워하는 젊은 브람스를 연상시켰다.

카바티나 풍의 제2악장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솔로는 슬픔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행복을 향해 가려는 다짐을 보여주었다. 브람스의 위로가 담긴 클라라와의 대화처럼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교차되는 애수 가득한 서정성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바이올린은 제1악장에서와는 반대로 지나치게 늘어지는 프레이징 처리로 권태롭게 느껴졌다. 마지막에 나오는 바이올린의 더블 스톱에서는 쓸쓸함을 기대했지만, 피아니시모를 내고야 말겠다는 집착처럼 연주하여 그런 쓸쓸함은 찾을 수 없었다. 여전히 슬퍼야 하는 제3악장에 가서는 더 이상 음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안타깝게도 브람스의 진지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만 중요한 철없는 누나 클라라가 떠올랐다.

이날 프로그램의 마지막으로 연주한 베토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제7번 c단조, Op.30-2>는 원래 피아노 소나타로 작곡되었다. 최초에는 <바이올린 반주와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세 개의 소나타(Trois Sonates pour le piano-forte avec accompagnement de violon)>라는 제목으로 빈에 있는 예술과 산업상점(Kunst- und Industrie- Comptoir)을 통해 Op.30-1, 2, 3이 출판되었다. 10개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 제7번은 열정과 힘이 느껴지는 극적인 곡으로 거의 교향곡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베토벤이 음악적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의 작품이라 대규모 악장을 지닌 피아노 파트의 기교는 물론이고 음악적으로도 어려운 작품이다.

모든 작곡가가 그렇겠지만 누구보다도 “인간을 뛰어 넘는 노력을 보여준”(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베토벤의 작품세계는 그의 일생과 뗄 수 없다. 1802년 10월 6일에 베토벤이 작성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통과 공포가 담겨 있다. 베토벤 자신이 청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던, 그의 삶에서 정말 충격적인 바로 그 순간에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절망에도 스스로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래서 베토벤의 c단조는 아주 특별하다. 그의 c단조는 정서적으로 어두울 뿐 아니라 불안하고 염세적이다. c단조는 우리에게 진지한 음악을 알려준다.

제1악장은 신비스러우면서 위협적이고 거친 피아노의 리드에 반해 바이올린 소리는 너무 안정적이어서 임팩트가 없었다. 기대했던 혼란스럽고 폭발할 것만 같은 바이올린 소리는 여전히 들을 수 없었다. 제2악장은 <비창 소나타>의 2악장을 떠올리게 했다. 오페라 아리아와 같이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희망과 행복을 전했다. 끝부분에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 c단조> 오프닝에 등장하는 c단조 음계가 교대로 나타난다. 바로 이어받는 바이올린은 대조적이며 아름답고 우아한 소리를 내야 하지만 깔끔하기만 한 선율에 그쳐 아쉬웠다. 제3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고 리드미컬한 기이함과 거친 유머로 가득찬 피아노에 반해 바이올린은 밋밋했다. 제4악장에서 피아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극적 긴장감과 타협 없는 정서적 갈등을 흔들림 없이 표현했다. 특히 이 부분은 피아노 파트에 정말 많은 음표들이 쉼 없이 나와 연주가 어렵다. 그런데 바이올린은 피아노와 대화나 타협 없이 혼자만 다급하게 달려가는 탓(마지막 프레스토 부분)에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그래도 피아노는 흔들림 없이 끝까지 단단함을 잃지 않았다.

이날 브람스와 베토벤 소나타 두 곡 모두 전체적인 다이나믹 레인지는 답답하리만큼 작은 소리에 머물렀다. 소리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밸런스가 잘 잡힌 연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가늘고 작은 소리를 내려는 바이올린의 연주에 다양한 음악적 캐릭터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피아노가 밸런스를 맞추는 것처럼 보여 아쉬움이 남았다. 앙코르로 연주된 포레의 <자장가 op.16>와 멘델스존의 <무언가, op.109>에서야 그나마 기대했던 바이올린의 풍성한 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바이올린 양인모, 피아노 김다솔(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바이올린 양인모, 피아노 김다솔(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귤화위지(橘化爲枳)

사물이나 어떤 상태가 도달하기 전에 바라는 것을 ‘기대(期待)’라 한다. 그런데 이 기대가 너무 크면 그에 따른 실망도 비례하여 커진다. 물론 이런 기대를 ‘개인적인 생각으로 억측(臆測)한 것’이라며 꾸짖은 조선의 유학자(송준길 宋浚吉, 1606-1672)도 있었지만,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에게는 너무 많은 찬사가 따라다니는 터라 꼭 필자의 기대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날 인터미션 때 공연장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지인들의 평가는 이랬다. “녹음된 음악을 습기 잔뜩 머금은 파트리션 양털 스피커로 듣는 것 같다” “현대곡은 좋았다” “둘이서 리허설하러 온 줄” “부산이 만만하게 보이나” “할인 못 받고 비싼 좌석 샀으면 아까웠을 뻔” “유명 연주자가 부산만 오면 연주가 안 된다” 등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귤나무가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고, 월출산을 넘으면 또한 탱자가 된다”하더니 낙동강만 건너오면 부산 바닷물에 절어서 그런지 연주가 안 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귤이 탱자가 되면 본래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 아닌가?

양인모는 여러 매체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연주하는 곡에 대해 논문을 비롯해 수많은 문헌을 찾아 공부한다고 했다. 물론 베베른이나 푸러의 곡처럼 치밀한 계산과 함께 머리로 하는 현대음악의 특성은 그대로 살려 들려주었고, 실황으로 듣는 연주라 그 깊이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나 베토벤의 곡은 머리로만 연주해서는 그 감동을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 다행히 성실함이 가득한 피아니스트 김다솔 덕분에 이들의 연주가 그나마 제법 제대로 짠 직조물(texture)같이 보이기는 했지만, 반쪽짜리 완성품과 같은 음악은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들의 "비범한 음악적 고찰”에 학구적 고찰은 있었으나 나머지 반쪽인 감성적 고찰이 빠진 것 같아 무척 아쉬웠다. 양산형으로 만든 비싸고 매끈한 최고급 도자기와 오래도록 공을 들여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방짜유기의 조합처럼 안타깝고 불편했다. 브룩스(Cleanth Brooks, 1906-1994)는 시(詩)에 관한 이론서인 <잘 만들어진 항아리(The Well Wrought Urn)>에서 “자신의 작업에서 모든 모호함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자와는 다르게, 시인은 경험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에서 번창한다”고 했다. 이 말은 음악에서도 통한다. 연주자의 경험과 감성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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