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서울남산국악당에 터벌린 도살풀이춤의 원조 김숙자의 춤세계
[공연리뷰] 서울남산국악당에 터벌린 도살풀이춤의 원조 김숙자의 춤세계
  • 이종숙 무용학자
  • 승인 2023.05.18 0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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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풀이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도살풀이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더프리뷰=서울] 이종숙 무용역사기록학회 부회장 = 지난 4월 19일 오후 7시 30분, 서울남산국악당과 김숙자춤보존회 공동기획으로 '고(故) 김숙자 30주기 추모공연: 김숙자 춤의 세계'가 공연되었다. 기획 장승헌(전문무용수지원센터 이사), 사회 진옥섭(전통예술 연출가, 축제의 땅 대표)이 함께했으며, 음악감독 유인상과 그의 연주팀이 반주했다. 그리고 이 화려한 공연의 완성자는 김숙자춤보존회 회장 김운선(국가무형문화재 살풀이춤 예능보유자)과 도살풀이춤의 전수자들이었다.

김숙자춤보존회 회원들은 ‘김숙자 춤의 세계’를 예단하기에 충분한 <부정놀이춤> <승무> <입춤> <도살풀이춤>을 공연했다. 그 외 김성훈 외 5인의 <비나리>가 무대를 열었고, 박순아의 25현 가야금 연주가 찬조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였다. '고(故) 김숙자 30주기 추모공연'의 기획에는 김숙자 사후 30여 년 만에 그 후계 이수자를 배출할 시간과 역량이 갖춰진 것을 감사하며 김숙자 선생께 이를 고하는 뜻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비나리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비나리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1990년 10월 10일에 살풀이춤 보유자가 된 김숙자 선생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의 영광만 가슴에 품은 채 이듬해인 1991년 12월 23일 후두암으로 별세하였다. 문화재보호법상 보유자만 이수자를 배출할 수 있으므로, 후계 구도를 갖추지 못한 채 이승과 이별한 것이었다. 국가는 김숙자 선생의 곁을 늘 지켰던 그 딸 김운선과 제자 양길순이 그의 춤 세계를 보존하도록 1994년 전수교육조교(현 전승교육사)로 긴급 선정해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26년 동안 전승교육사로서 전승에 힘썼을 뿐 이수자는 배출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19년 11월 25일에 두 사람은 함께 살풀이춤 보유자로 마침내 인정되었다.

부정놀이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부정놀이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2019년 이후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절대적인 위험 환경에 놓인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현장 예술계는 전방위적으로 힘겨운 고통을 감내하며 극복해야만 하는, 총체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있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김숙자춤보존회에서 첫 이수자를 배출할 역량이 갖추어졌다는 것은 장장 30여년 만에 ‘김숙자 춤의 세계’에 미래 비전을 공적(公的)으로 설계할 수 있게 된 성과라고 하겠다. 또 이수자들에 의해 국민들의 문화향유권이 폭넓게 확대된다는 점도 무형문화유산의 보전과 전승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김숙자는 조선 후기 중고제 판소리 명창 김석창(金碩昌)의 독자인 김덕순(金德順)의 6남매 중 다섯째로 1926년 12월 20일에 태어났다. 경기도 안성에 정착한 아버지 김덕순으로부터 예인명가(藝人名家)의 딸로 재인의 온갖 재주와 소리, 춤을 섭렵하며 성장했다. 또 김숙자는 무당(巫堂)이었던 어머니 정귀성(鄭貴星)의 무계 활동에도 영향 받으며 성장했다. 그녀는 ‘허리띠를 졸라매며,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던’ 지독히 어려운 식민시대에 각종 예능 학습의 성장기를 보냈다.

승무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승무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6‧25전쟁 때, 25세 전후의 김숙자는 북한군 예술위문단에 동원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상하게 하여 겨우 안성에 남을 수 있었다. 이후로 창(唱)을 할 목소리를 크게 다쳤고, 회복되지 못한 채 대전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대전에서 국악학원을 운영하며 아버지를 봉양하였기에 학원에는 유명한 국악인들이 자주 왕래했다. 1962년 김숙자는 학원 수강생들을 인솔하여 창무극 <이순신장군>을 제작하였고, 전국신인국극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신인예술상 특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이 국극 <이순신장군>의 제작 경비를 사재인 자신의 집을 팔아서 충당했다고 한다. 특상의 영예를 얻었지만, 예술을 위해 혼을 받친 37세 경 김숙자의 경제 파탄은 곧이어서 대전을 떠나야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군산을 거쳐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국악인 박초월의 국악학원에서 춤선생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에서의 12년간은 일정한 곳에 머물지 못하며, 국악계에서 미미하게 활동하였을 뿐 무대 예술무용과 관련한 존재감은 거의 드러내지 못했다.

25현 가야금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25현 가야금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그러던 그녀가 만 50세가 된 1976년 전통 무속무용가로서 서울 무대에 혜성처럼 출현하였다. 민속학자 심우성의 도움으로 당시까지 고전무용과 신무용의 구분조차 모호했던 무용계에 그녀는 전통춤의 패러다임을 명백히 제시해 주었다. 그녀의 출현과 그녀의 춤은 그동안 서울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전통춤’이라는 범주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특히 그녀의 무속 집안 내력은 민속학적인 면에서 화젯거리가 되었고, 그녀는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의 각기 다른 특색의 굿들을 서울 무대에 소개하면서 민속학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게다가 조부의 명창 내력은 국악인과 문학계에도 주목되어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담백하면서도 능숙하게 기나긴 수건을 놀리는 솜씨와 독특한 발디딤새의 춤은 무용계보다는 연극계와 기타 예술 방면의 학술적 궁금증을 자극하였다.

입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입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그녀의 도살풀이춤이나 굿춤들은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화려하고 다소 가벼운 듯한 한국무용 공연 스타일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김덕순으로부터 배웠다는 그녀의 도살풀이춤은 그 외형부터 남달랐다. 흰 치마저고리를 입었고, 치마를 휘감아 허리를 질끈 동여맨 모습은 백의민족의 은근과 끈기를 상징하는 강한 여성상을 대하는 듯했다. 섬세한 발디딤 속에 오히려 되짚어 휘돌아가는 그녀의 역동적 춤사위는 남성의 힘을 내보이는 듯했고, 긴 수건을 목에 걸치고 내뿌려서 거두는 능란한 수건의 기예적 팔사위는 집안 내력으로부터 학습하여 곰삭은 ‘전통춤’의 정수를 담아낸 것임을 입증하는 그것이었다.

80년대의 김숙자는 자신의 춤 내력을 통해 경기도 도당굿의 굿거리와 도살풀이춤의 연관성을 문화재청에 호소하며, 경기도당굿과 함께 무형문화재의 보유자가 되는 길을 모색하였다. 10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에서는 1990년 10월 10일 경기도도당굿과 살풀이춤을 개별 지정하였다. 도당굿은 민간신앙의례에 속하게 되었고, 김숙자의 도살풀이춤은 이매방의 살풀이춤과 함께 전통예술공연 분야의 ‘춤’으로 배속되었다.

도살풀이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도살풀이춤 (사진제공=서울남산국악당)

심우성은 무용계에서 “김숙자의 등장 후 ‘살풀이론’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김숙자의 <도살풀이춤>이 1976년 이래 두각을 나타냄으로 인해, 그와 또 다른 성향의 이매방 <살풀이춤>도 그의 <승무>에 이어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성준-한영숙으로 계승된 경기풍의 단아한 살풀이춤이 일찍부터 무용계에서 공연되고 있었다. 그런데, 1989년 한영숙이 사망함으로 인해 삼파전의 살풀이춤 중 이매방과 김숙자의 살풀이춤만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김숙자는 자신의 전통춤 세계가 인정된 지 1년 남짓에 바로 사망한 것이다. 그 애통함은 사람의 언어로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김숙자는 경기도 안성의 무속집안 내력을 뿌리로 한 다양한 경기도 도당굿의 춤들, <부정놀이> <터벌림> <진쇠> <제석> <깨끔> <군웅춤> <손님굿춤> <돌돌이> <도살풀이춤>을 남겼다. 이 중 이번 공연에서는 <부정놀이춤>을 이향미와 정지유가 추었다. <도살풀이춤>은 당연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종목이므로 공연 피날레로 김운선과 13인의 전수자들이 함께 추었다.

한편 김숙자는 기방(妓房) 계열의 권번 춤인 <승무> <입춤> <한량무> <검무> <팔선녀>와 창작춤 <신선무> <태평무> 등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 김숙자 춤의 진가를 보여주는 <승무>와 <입춤>이 이번에 공연된 것이다. 이들 김숙자의 대표 춤 네 가지로 2021년에 코비드(COVID) 상황에서 올리지 못한 '30주기 추모 공연'이라는 명목으로 서울남산국악당에 터를 벌리고 무악으로써 고한 것이다.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 온 김숙자 선생의 우수한 춤들이 이 터벌림을 시작으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이 회자되며, 전승의 바른 길을 여여히 밟아 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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