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
[공연리뷰]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
  •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0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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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 '라스트 댄스' 포스터 (사진제공=오푸스)

[더프리뷰=서울]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바이올리니스트 = 전설, 혹은 거장의 은퇴 무대를 지켜보는 심경은 복잡하다. 팬이라면 전성기를 추억하며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고별공연에 감개무량할 것이고, 역사적인 마지막의 자리를 함께하는 일반 관객으로서는 일종의 경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에 비하여 시간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노쇠해 버린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1976년 창단 이후 무려 47년을 함께해온 에머슨 현악사중주단은 이날 공연을 끝으로 각자 개인 연주 활동과 스토니브룩 대학의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 인스티튜트(Emerson String Quartet Institute)’에서 교육에 전념하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악사중주는 서양 실내악의 정수이자 요체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비올라, 그리고 한 대의 첼로는 피아노 건반의 각 구역을 오롯이 4등분한다. 또한, 현악사중주에는 걸작이 즐비하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개의 작곡가는 자신의 작풍(作風)이 무르익은 시절부터 현악사중주 작곡에 천착해 왔다. 하이든이 그랬고 모차르트가, 그리고 또 베토벤이 그러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현악사중주는 작곡 기법적으로 색채감 혹은 효과 뒤에 숨을 수가 없기에, 작곡가 본연의 실력과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현악사중주가 아닌 다른 편성에서 뛰어난 작품을 보여준 작곡가조차 현악사중주는 그저 그런 작품을 남긴 작곡가도 제법 된다.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 '라스트 댄스' 공연 모습 (사진제공=오푸스)

47년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에머슨 사중주단의 서울 공연 프로그램은 퍼셀,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으로 구성되었다. 현악사중주의 핵심을 드러내기에 고전시대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에머슨 사중주단은 창단 때부터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의 구분을 따로 두지 않고, 레퍼토리에 따라 위치를 자유롭게 이동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후대의 많은 사중주단이 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창단 때부터 자리를 지킨 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뿐 아니라 비올라의 로렌스 더튼 역시 1977년부터 함께했으니 원년 멤버나 다름없다. 첼로의 폴 왓킨스는 에머슨의 오랜 첼리스트인 데이빗 핑켈(1979년부터 2013년까지 활동)을 이어 2013년부터 앙상블에 합류했다.

첫 곡인 퍼셀의 <샤코니(Chacony), Z. 730>에서 에머슨 사중주단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그들의 특징을 곧바로 드러냈다. 마치 한 사람이 연주하는 피아노와 같은, 서로 잘 어울리는 음색, 특정 파트가 두드러지지 않는 안정성, 그리고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색창연한 명화를 보는 듯한 격조 있는 질감은 오늘날 기능적으로 뛰어나고 역동적인 젊은 사중주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에머슨만의 특징이다.

퍼셀을 통해 워밍업을 마친 에머슨 사중주단은 두 번째로 연주된 하이든 <현악사중주 29번 Op.33-5(Hob. III:41)>에서 본격적인 실력을 발휘했다. 퍼셀의 첫 곡이 사단조(g minor)인 것에 비해, 하이든의 이 곡은 사장조(G Major)의 곡으로 구성에 있어 퍼셀의 작품과 훌륭한 대조를 이뤘다. 원래 이 곡의 1악장에 사용된 네 개 음의 동기 때문에 ‘How do you do?’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데, 에머슨의 음악적 안부 인사는 명랑한 느낌이기보다는 근사하고 품위 있는 쪽에 가까웠다. 이 곡에서 제1 바이올린을 맡은 유진 드러커의 예민한 리드는 비록 격식을 차리고 있지만 동시에 소박한 매력을 드러냈고, 다소간의 컨트롤 난조에도 불구, 백조의 노래와 같은 아름다운 순간(2악장)과 강약 완급이 멋들어진 유머러스한 분위기(3악장)를 만들어냈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을 담아 작곡한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인 <하이든 세트> 중 유일한 단조 d minor K.421은 모차르트 현악사중주의 인기 레퍼토리 중 하나다. 에머슨은 특유의 응집력과 우수를 바탕으로 1악장에서 담담하고 내밀한 정서로 곡을 풀어나갔다. 반백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앙상블의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한 이날 최고의 호연은 3악장에서 이루어졌는데, 미뉴에트에 이어진 트리오에서 바이올린의 유진 드러커와 필립 세처는 비올라와 첼로의 반주를 타고 현악사중주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구현해 냈다. 4악장에서는 역동성에 주안점을 두기보다는 바쁜 악구를 연주하는 와중에도 ‘쉬움(easiness)’과 ‘통찰(insight)’을 바탕으로 한 거시적 관점의 해석을 견지했다.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 '라스트 댄스' 공연 모습 (사진제공=오푸스)

인터미션 후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8번, Op.59-2 ‘라주모프스키’>가 고별공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전반부에서 제2 바이올린을 맡았던 필립 세처가 이 곡에서는 제1 바이올린을 맡았다. 유진 드러커의 리드가 예민한 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면 필립 세처의 리드는 보다 굵직한 선을 바탕으로 한 추진력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고, 이러한 리더십은 특히 베토벤에 주효했다. 비단 베토벤뿐만 아니라 이날 곡 전반에 걸쳐 비올라의 로렌스 더튼과 첼로의 폴 왓킨스는 넉넉하고 풍부한 중저음을 들려주며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는데, 특히 이러한 면모는 베토벤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다. 모차르트의 3악장과 마찬가지로, 에머슨은 이 곡의 2악장에서 숭고하고도 기억될 만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거룩함과 엄숙함을 바탕으로 한 유려한 호흡,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세월과 함께한 자연스러운 호흡은 어째서 에머슨이 미국을 대표하는 사중주단인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숨겨두었던 낭만 레퍼토리에 대한 솜씨는 앙코르를 통해 십분 드러냈는데, 첫 곡의 드보르작을 필두로 두 번째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Op. 12> 중 ‘칸초네타’를 통해 에머슨은 ‘구조(고전)’ 뿐만 아니라 ‘유연함을 바탕으로 한 긴 프레이즈의 표현(낭만)’에도 능통하다는 것을 웅변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앙코르 곡, 바흐 <코랄>을 듣다가 필자는 문득 이들의 수십 년 전 인터뷰가 떠올랐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 수필가, 그리고 초월주의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이름을 따서 사중주단의 이름을 지은 이유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미국적인 것을 찾다가 발견한 이름이며 정작 우리 중 그 누구도 에머슨을 읽어보지 않았다."라며 웃음 짓던 내용이었다.

“당신이 될 것으로 정해진 유일한 사람은 당신이 되고자 결정한 사람이다(The only person you are destined to become is the person you decide to be).”

철학자 에머슨은 이와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에머슨 사중주단이 50년 가까운 세월을 끝으로 되고자 결정한 각자의 모습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며 그들의 ‘마지막 춤(Last Dance)’에 경의를 표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
김광훈 음악칼럼니스트
38kdd@hanmail.net
바이올리니스트.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KCO) 단원이자 한양대 겸임교수. 월간 <스트라드>에 음악 칼럼니스트로 20년 이상 기고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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