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뮤지컬 '라흐 헤스트'
[공연리뷰] 뮤지컬 '라흐 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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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7.26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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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 헤스트' 포스터 (사진제공=홍컴퍼니)

[더프리뷰=서울] 유희성 연출가/칼럼니스트 =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2020년 5월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 창작뮤지컬 공모전 당선작으로 선정돼 2022년 9월 초연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서사와 서정적인 음악으로 뮤지컬 마니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으며, 2023년 6월 재연 무대를 통해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나고 있다.

다소 위태로워 보이는 천재 작가와, 범우주적 사고와 감수성의 천재 화가를 사랑했던 변동림과 김향안. 깊은 예술적 심미안과 문학성을 바탕으로 두 천재 예술가들의 작품을 꽃피게 했던 조력자이자 기획자. 삶의 지혜로, 지성과 감성으로, 그리고 거리낌 없는 사랑의 실천으로 예술가의 행로를 이끌었던 지극한 순간들을 이 작품은 확인시켜 준다.

작품은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을 만난 변동림의 시간과,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세계적인 화가 김환기를 만나 여생을 함께하며 예술적 동반자로 지낸 김향안의 시간이 무대에서 역순교차하며 펼쳐진다. 상큼하고 애틋했던 기억, 더러는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다시 과감한 도전을 감행하는 동림의 시간을 통해 그 시대 청춘의 시간과 상태, 깊고 푸른 번뇌와 척박했던 시간들을 끝내 넘지 못한 비련의 고통을 기억해 내고 함께 아파한다.

시절은 변하고, 어느새 세상을 초월해 무한한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예술적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이 될 망울진 꽃봉오리 같은 깊고 푸른 지성, 향안을 마주하게 된다,

향안과 함께하는 시간, 나도 모르게 지친 삶에 위로를 받으며 새로운 희망의 끈을 다시 잡을 수 있겠다는, 자생적으로 파생된 에너지를 얻는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에서 향안(이지숙), 환기(박영수), 동림(임찬민), 이상(임진섭) (사진제공=홍컴퍼니)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아

2004년 2월 29일. 삶을 찬미하며 인생이라는 길을 당당히 걸어 왔던 김향안. 어느덧 생의 마지막 즈음에 지난했던 삶의 시간들을 돌아보듯, 생의 순간들을 한 페이지씩 더듬어 보듯, 작금의 순간에서부터 동림의 시간까지 거슬러 교차하며, 그윽하고 지긋하게 함께한 순간들과 그 사람으로 설레었던 마음을 오롯이 무대 위에 담아 낸다.

거슬러 올라가는 그녀의 삶에서도 또렷하게 되살아난 그 사람과 함께한 사랑의 아름다움은 어느덧 안개처럼 흩어지듯 이내 저 멀리 사라져 가지만, 그 예술혼만은 환영처럼 고스란히 남아 되뇌인다.

"우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술에 다소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작가 이상과 화가 김환기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 이름만이라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예술작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거나, 드러나지 않은 리딩과 격려와 응원으로 예술적 자긍심을 넘어 자존감과 성취, 더 큰 도전의 자극을 일으킨 '가려진 한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자료들에서도 작가나 화가의 작품이나 시대적, 사회적인 환경과 배경은 언급되지만 또 한 사람, 동림과 향안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침내 뽀얀 안개를 헤치고 어느 순간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낸 모습으로 각인되는 한 여인을 그려낸다.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예술가적 심미안의 지혜로운 한 여인, 놀랍게도 서로 다른 장르 두 예술가의 뮤즈로 거듭난 한 여성을 우리는 망연히 바라보게 된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에서 향안(제이민), 환기(윤석원) (사진제공=홍컴퍼니)

너무도 유명한 두 예술가의 삶과 사랑, 예술을 모티브로 뮤지컬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용기와 모험, 도전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신진 창작자에게는 그 무게감이 여간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창작에 대한 많은 우려와 번민의 시간을 거친 것은 물론, 혹여 두 예술가와 그 유족, 후대들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드러내는 데 있어서 일련의 어휘와 음표들을 앞에 놓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을 것이다.

해외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미 음악, 소설, 발레, 영화 등으로 재창작된 슈만과 클라라, 브람스의 애틋한 러브스토리 또한 많은 이들의 가슴에 각인되어 예술가들의 삶과 사랑, 그 애틋한 음악으로 큰 위로와 위안을 받듯이, 이상과 김환기의 예술작품 뿐 아니라 변동림/김향안이라는 또 다른 예술가의 삶과 사랑의 행로와 진솔한 삶의 태도를 보고 느끼며, 깊은 예술적 감흥과 감동은 물론, 새로운 삶에 대한 찬미와 활력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배우들의 열연과 적격의 캐스팅은 <라흐 헤스트>를 한층 단단하고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거듭나게 했다.

건강하고 쾌활한 캐릭터를 시원스런 보컬과 청량한 청순미, 그리고 놀라운 결단력으로 과감하고 섬세하게 드러낸 동림 역의 김이후 배우와, 뮤지컬 <모멘트>로 혜성처럼 등장, 다양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상 역의 임진섭 배우의 찰진 가창력은 어떠한 모진 풍파도 그저 헤쳐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과 위안을 준다. 또한 그동안 크고 작은 무대에서 알차고 당당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향안 역의 최수진 배우는 그만의 섬세하고 안정적인 가창력과 진정성 있는 열연으로 존재감을 여실히 확인시켜 주었다.

더불어 외모에서부터 마치 김환기의 환생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듯했던, 내외적으로 완전한 캐릭터로 거듭난, 믿고 보는 배우 김종구(김환기 역)의 꽉찬 존재감은 무대를 충만하게 했으며, 최수진과의 찰진 케미와 호흡은 물론이고 4명의 배우가 모두 각자 또는 함께하는 절절하고 진솔한 배우들의 앙상블 호흡은 이 작품의 화룡점정이었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에서 동림(김이후), 이상(진태화) (사진제공=홍컴퍼니)

김한솔 작가와 문혜성, 정혜지 두 작곡가의 도전과 감행, 신진 창작자의 무한 가능성에 선뜻 자리를 내주고 공연의 미덕을 체험하게 해 준 예술적 혜안의 홍컴퍼니 홍승희 대표를 비롯해 무대와 조명, 영상, 의상 등 세련된 미장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완성한 연출 등 창.제작진 및 기술 스태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2023년 6월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관한 K-MUSICAL MARKET 공모에서 선정되어 선보였던 여러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최종 선정되어 오는 10월 브로드웨이에서 열리는 K-Musical Road Show에 참가할 기회를 잡았다. 여러 모로 잘 준비해서 한국 신진 창작자들의 저력과 가능성을 펼쳐보임은 물론, K-뮤지컬 세계화의 길을 당당히 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난 6월 13일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시작된 <라흐 헤스트> 재공연은 오는 9월 3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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