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공연리뷰]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10.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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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립 컨템퍼러리댄스 두 단체, 몸들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더프리뷰=대구/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통의 압력을 적게 받는, 그리하여 춤의 동시대성에서 가장 나란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두 주요 컨템퍼러리댄스 단체가 이 가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로 부임한 예술감독 김성용(국립현대무용단)과 최문석(대구시립무용단)의 신작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공동체적 예술이건만 애초 대학 동인무용단으로 편성된 우리 무용계 내 직업무용단은 유니버설발레단 등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국공립 단체가 고작이다. 국립무용단·국립발레단·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3()이 갖춰진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국립무용단 창단이 1962. 국립발레단은 1974년 국립무용단에서 독립·창단하였고, 국립현대무용단은 2010년에야 발족하였다) 대부분의 시립단체는 한국무용 태생(이들 단체들도 전통무 계승과 더불어 동시대적 감수성의 창작물, 컨템퍼러리댄스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현대무용으로는 대구시립무용단, 발레로는 광주시립무용단이 유일한 것이 실정이다.

같은 계열이라고는 하지만 대구시립무용단(이하 대구시립)과 국립현대무용단(이하 국립현대)의 성격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우선 1981년부터 일찍이 그 연혁을 시작한 대구시립은 서른 명 상당의 상근 무용수들로 조직되어 있고, 국립현대는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소속 무용수들의 적()을 두고 있지 않다(국립현대의 작품에 참여했던 무용수들은 참여 무용수로 기록되고 있다). 대구시립의 예술감독은 매년의 정기공연은 물론 다수의 기획공연과 특별공연 등 공연활동에 관해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다. 반면 국립현대 예술감독의 운신 폭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인다. 사무국 내 제법 많은 인원(현재 기준으로 여섯 명)의 기획팀이 단체의 이름으로 선보이는 창·제작 업무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고, 개중 심화(深化)형이나 플랫폼 형식의 프로젝트들은 다년간에 걸쳐 진행되니 3년 임기의 예술감독으로서는 본인의 예술지향과는 상관없이 승계 받게 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남기고 가는 것도 있겠지만).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최문석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최문석 ©김정환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김성용 ©강선준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김성용 ©강선준

도제식의 병폐가 있는 무용예술계에 단체 조직의 합리적인 분권화와 전문화는 절실히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국립현대의 10여 년 역사를 지켜본 바, 존재하는 것은 시스템이고 사람들이 그저 시스템을 거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혹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다양성이 교차하는 플랫폼인 것도 좋지만 그렇다면 단체의 정체성과 지향은 어떻게 성립되고 적층될 수 있을 것인가.

특히나 예술과 더욱이 대립각을 세워왔던 기술의 전격적인 자리이동을 목격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 쟁점을 다루는 국립현대의 행보에 개인적으론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최근 국립현대는 선도적으로 기술과의 협업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품도 지원 제작하고 있다. 플랫폼 역할을 자처하여 다양성을 세우고자 하는 입장으로 고려해보면 일견 이해도 가지만, -생명을 스스로의 매체로 여겨온 춤 작업자들에게는 위험한 방향등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일. 더구나 관립단체라면 문제적 이슈는 논쟁의 구도에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술의 큐레이팅은 현장 결과물들로부터의 구성이어야 되지 않을까, 여러 모로 고심하는 중이다. 춤이 일원론적 '의 일이어야 한다고 믿는 필자로선 만일 같은 방향의 신념을 지닌 예술가가 국립현대를 도맡게 된다면 자신과 단체 사이 그 상충적인 견해의 간극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그 난감을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다.

국립현대가 몸들이 부재하는, 문자 그대로 유명무실의 단체라는 점도 섭섭한 노릇이다.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은 단체들이 그 육중함을 버티어내지 못하고 이합집산 프로젝트화되어가고 있는 게 실정이긴 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관립단체는 엄연한 실체로서 존재하고(희귀한 사례이긴 하지만 우리가 통상 피나 바우쉬의 단체로 알고 있는 피나 바우쉬 무용단은 독일 부퍼탈 지역의 관립단체고, 심지어 그녀 사후에도 오래 소속해온 단원들을 중심으로 축적된 레퍼토리 관리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외에도 프렐조카주 무용단 등 작가의 단체로 알려져 있는 상당수가 관립단체다), 플랫폼 혹은 네트워킹 망으로서의 기관은 부차적으로 보태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운영의 효율성은 묘수가 될 대상, 단체들의 선재로부터 발휘될 것 아닌가.

물론 무용수들의 자리가 고정되어 있는 형태의 단체와 무용수들의 자리가 비어있는 형태의 단체 간에는 일장일단이 있고 그것은 마치 하나로부터 갈리는 명암 같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 몸이 지닐 수 있는 태만, 부상, 노화 등을 껴안게 되고 후자의 경우 그 지체에의 부담을 덜고 그때그때의 효능적인 몸들을 취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는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가치를 탐하며 인류를 경쟁구도에 몰아넣고 살아남은 도구적 인간으로써 그 자신의 시스템만 강화해나가는 현 시절 사회의 모습을 빼다 박지 않았는가. 하나의 산업계로서 예술계도 사회적 논리에 일부 합당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렇지만 예술이 인간성을 지켜내는 최후방 보루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에 기대어 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즉흥이라는 상황을 통과하여 무용수들의 일원론적 몸으로부터 심층적인 움직임을 탐색해내는 요즘의 안무법이라면 춤의 작품이란 더욱이 공동체적 몸, 단체적 결과물이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숙련된 무용수의 몸은 어떤 상황, 어떤 이들과도 쉽사리 개방되고 섞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개별적 상태의 역량은 또한 일상과 지향과 경험이 축적된 공동체적 몸(하나의 단체가 공동체적 경지에 있다는 이상적 상정 하에)에 잠재된 사유와 정감만큼의 깊이와 농도로부터 현상되는 것, 대체로 긴밀한 관계로부터라야 탐색과 협의는 용이하고 깊숙해진다. 서로서로를 자극하고 안내하면서 더한 경지를 열고 찾아들어가는 일이 아니라면, 그 작업이 단순히 편집적 구성에 해당하는 경우라면, 그것을 정녕 ‘()쓰기적 안무라 말해도 좋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두 기관의 작품을 나란히 두어본다. 최문석은 선재하고 있던 공동체적 몸으로서의 단체를 만났고, 김성용은 공동(空洞)의 기관에 몸들을 불러들였다. 두 경우 다 이제 막 관계맺기를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향후에 더한 기대를 두게 되지만 역시 춤은, 몸들은, 항시 우려와 예측 밖의 상황을 펼친다. 최문석의 조우도, 김성용의 조우도 일상성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춤추는 몸들의 역능이라는 깊숙한 경지를 구했다.

최문석, Daegu (City Dance Company) Body와의 조우

최문석의 부임작 <DaeguBody>는 지난 915일과 16 대구문화회관에서 대구시립무용단 제83회 정기공연으로 펼쳐졌다. 2004년 유럽으로 진출, 독일 자를란트주 국립무용단 단원으로서 현지 무용가의 이력을 시작하여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유럽 전역을 종횡무진했던 그가 20여 년간의 경험을 껴안고 대구시립의 수장으로 부임한 것은 올 4월의 일.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으로의 회귀, 그리고 규모로나 연혁으로나 제법 강건한 단체와의 만남, 춤작가 최문석으로선 이 두 지점이야말로 대구시립과의 여정 속에서 엮어갈 작품세계 맥락상 의미로울 단초가 아니었을까.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연습 장면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연습 장면 ©김정환

최문석은 인터뷰들과 공연 직후 작가와의 대화등을 통해 이 작품을 대구를 그린작품이라 말했다. 한복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 가마니를 실은 수레가 지나다니는 저잣거리, 과거의 풍광을 담은 빛바랜 흑백 스틸사진의 교차로부터 에너지의 역동과 산업화의 빗금들, 한밤의 고층건물, 그 현대적 삶의 양태를 암시하는 부분점등 사각불빛으로까지 업스테이지 전면을 채우고 작품의 시간 내내 그 세계 내 후경(後景), 심리적 공간을 구현한 동영상이 진행시킨 도시의 궤적을 최문석의 무용수들이 열렬히 살아낸다. 독무로, 이인무로, 삼삼오오 그리고 군무로, 다투고 사랑하고 고립되고 연대하는 삶을 춤추는 그들은 언제나처럼 일상의 유격(裕隔)에 강밀도를 높여 완연히 젖혀지고 더 비틀리고 보다 리드미컬하게 생의 장면들을 항진적으로 출현시켰다.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현대도시문명 속 공동체의 삶을 춤추기, 대구시립이 전임 감독과도 해온 일이다. 김성용도 이 공동체적 몸들을 그 자신 예술세계의 특유함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내화시키지 않았고 공공의 삶, 그 일방향성과 탈주선, 좌충우돌하는 부분들로써 포착하는 전체의 합으로 외화시켰다. 김성용과 빚어온 생은 대체로 공평했다. 주변 없는 아니 어쩜 모두가 주변인인 익명적 삶. 춤들은, 몸들은 피아(彼我)들의 부분충동으로서 교차하고 중첩하며 현재적 세계의 양상으로 총화됐었다. 최문석의 세계 역시 그 혹은 페르소나적인 누군가의 독단적 세계로 잠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세계에서는 추상과 재현 사이, 익명성과 정체성 사이 교묘한 지점에 방점이 찍힌다.

예를 들어, 대구의 스타무용수 김분선은 작품의 전반부부터 종종 한 손으로 머리채를 날리며 질주하고, 그러다 양팔을 앞뒤 원형으로 휘두르며 투스텝으로 무대 한 바퀴를 너르게 돌곤 한다. 그녀의 오랜 파트너인 송경찬은 그녀를 쫓아 제지하고 결박하고 놓치고 다시 쫓는다. 흡사 광인, 신여성, 아무튼 시절과 불화하는 누군가들의 초상인 김분선의 춤은 후반부 여자무용수들의 군무로 확대된다. (중반부에서 아버지, 남편, 오빠, 의사, 경찰, 과거의 권위를 지닌 모든 이름을 대리했던 송경찬은 다른 여성 무용수에 의해 응징 당한다.) 이 외에도 누군가로부터 출발한, 하늘을 향해 한껏 손을 뻗고 총총 뛰거나,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왼발 오른발 힘주어 디뎌가며 허리를 수그렸다 일어섰다 하는, 생을 환기하는 일련의 모티프들은 작품 중간중간 반복 강화를 거쳐 모두의 춤으로 전이되며 정상과 비정상, 가학과 피학이 자리를 바꾸는 세월의 전복적 힘 혹은 도시문명의 병변(病變)으로서의 모든 해석적 가능성을 성취한다.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재현과 추상 사이 고유한 코드로 연유적 관계를 맺지 않으나, 분명하게 그러나 다각도로 해독되는 기호적 장면에는 역시 작가 특유의 미감이 실린다. 흑빛 모노크롬 세계에 선연한 존재를 부각시키는 선홍과 연보라와 짙은 초록 등 쨍한 색채의 의상과 느림 전반에 산발하는 격정적 리듬 등은 공동체적 삶 속에 개인의 생을 수몰시키지 않는 서구 전통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서양의 퍼커션(요스 턴불 Joss Turnbull)과 우리네 가야금(김지효)을 병치한 음악적 구성은 역시 서구로부터의 뿌리가 깊은 다양성의 가치를, 타지를 횡단해온 자 최문석의 내력을 확인시켜준다. 소위 유럽, 탄츠테아터의 뉘앙스, 그러나 이미 동시대 무대에 만연한.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대구시립무용단 ‘DaeguBody’ ©김정환

그러니까 이 작품은 최문석 작가 자신이 말하듯 대구에 귀속하지 않는다. 단체적 몸을 지닌 유일했고 유일한 현대무용계열 춤단체 대구시립을 소중히 주목하고 있다는 것 외엔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이방인 필자는 김분선으로부터 심지어 송경찬으로부터 최문석 세계의 누구들로부터도 어떤 기억들을 소환했고, 왼발 오른발 힘을 실어 묵직이 걸어나오는 그들의 걸음에서마다 부여잡은 심장의, 그 삶의 심정적 무게를 느꼈다. 수그러져도 자꾸 일으켜세워 한발 한발 디뎌가고 있는 모두의 자취가 도시의 궤적.

어차피 도시들의 궤적, 도시 내부 삶의 변천사는 비스무리하다. 피나 바우쉬가 일찍이 <카페 뮐러 Café Müller>(1978)에서 추출해보인 어떤 고독, 어떤 슬픔, 어떤 결락감 그리고 가학과 피학으로 표지한 관계의 원천적 이중구조가 말년의 도시 시리즈에서 변주될 때 세계의 관객들은 그 작품들을 로컬리티 채취의 실패 혹은 매너리즘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녀가 베어낸 장면들을 도시문명 속 삶의 전형, 내 삶의 원형으로 공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대구시립 단원들도 대구의 시민들도 대한민국의 국민들도 오늘을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거주자들도 한발한발 저벅저벅 수그러지는 몸을 일으켜세우며 살아내고 있다.

공연 후 작가와의 대화시간을 통해 최문석 예술감독은 춤으로써 대구를 발현하는 대구 춤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DaeguBody>를 필두로 외국인의 시선으로부터 대구의 경계를 가늠해볼 작품 <Grenz.Land Daegu>12월 정기공연으로 준비 중이고, 그 밖에도 환경’ ‘대구 춤의 세계화등 대구에 밀착한 주제를 탐구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는 지역의 단체가 작품의 환경으로서 굳이 지역의 이름을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작가가 직접 발설한 국채보상운동이나 미인의 도시등의 키워드는 적어도 나에겐 대구를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어떠한 단서도 아니었다. 작품의 감도는 훨씬 깊숙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최문석의 특정도시에 관한 이해도로부터라기보다는 그가 동시대 삶의 어떤 지경을 체득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개방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주고받으며 깊이를 추구할 수 있었던 감독과 단원들 간 이루어진 긴밀한 만남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관찰해본 바, 누구누구의 춤들이 소속 공동체의 춤으로 총화되고 그것이 우리 관객들에게 생명력으로서의 감응을 행사하게 되는 데에는 필시 그러한 연유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김성용, 초면한 몸들과 날 것의 감각을 깨우기

김성용의 국립현대 예술감독 부임작은 지난 104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진 <정글감각과 반응>. 42회 국제현대무용제(International Modern Dance Festival, MODAFE)의 공동개막작이기도 하였던 <정글감각과 반응>은 지난 해 12월에 대구시립 시절을 마감하며 그 종지부로 선보였던 렉처퍼포먼스 <Process In It>(더프리뷰 2023111자 리뷰 참조)과의 연계선상에서 출발한다.

항상 단원들이 몸을 풀고 있는 광경으로부터 하루가 시작되던 5년의 세월은 그에게 즉흥으로부터 탐색되는 안무법의 당위를 알려주었다. 성실한 관찰과 애정 어린 물음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는 진솔한 답변, 그렇게 공유된 시간으로써 축적된 소통의 과정에 기반한 합의적 약속으로서가 아니라면, 즉흥으로부터의 안무는 기실 약탈적이기 십상. 상주하는 몸들과 열 차례 정기공연을 포함 도합 이십여 작품을 만들어낸 대구시립 시절을 통해 그는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는 그 유명한 피나 바우쉬 언사의 진위를 깨달았다고 했다. 즉흥으로부터의 탐색적 안무는 춤추는 자들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오늘날의 안무자는 자신이 고안한 춤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각자의 역사와 의식을 짊어진 몸들로부터 춤을 발생시키고 약속시키는 자이다.

김성용은 그 깨달음을 두고 가는 단원들, 관객 모두와 나누고 싶었다. 의식과 분리불가능한 움직임을 어떻게 창발(創發)시켜야 하는지, 움직임의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구성물로서의 무용예술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감지해야 하는지를. 작품의 주질료인 움직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춤으로 추동되어 나오는지, 또 그 춤들이 어떻게 하나의 작품으로 응집되는지를 면밀하게 설명하기 위한 렉처를 준비하면서 그는 무용수의 일원론적 몸에 잠재되어 있는 움직임을 현행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자신의 작업을 ‘Process-In-It’이라 도식화하였다. 오늘날 무용예술의 내역인 움직임은 더 깊숙한 차원을 열기 위해 안무가가 제시하는 키워드 ‘it’에 반응하여 움직임 주체 내부의 감각들 ‘in’이 활성화되고 급기야 표출되는 어떤 과정들로부터의 사출(査出)적 결과다. 움직임 자체와 그 발생의 과정을 설명한 렉처 말미에 그러한 작업과정을 거쳐 총화된 20여 분 간의 퍼포먼스 '글'을 시연했었다. 온몸의 감각을 최대치로 발휘해야 생존이 가능한 정글, 정글은 무용가들의 작업을 그리고 세상 모든 이들의 삶을 대유(代喩)했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연습 장면 ©강선준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연습 장면 ©강선준

<정글-감각과 반응>(이하 <정글>)은 앞서 '정글'의 전격적인 작품화다. 함께할 무용수들을 찾는 오디션에서 김성용은 특출난 기량이 아니라 소통과 탐구에의 의지를 요청했다. 무용수로서 덧대어 입어온 관성을 벗고 나의 깊숙한, 우리의 깊숙한 경지를 탐험해 나가고픈 갈망과 의욕을 지닌, 그리하여 서로서로에게 새로운 동력이 되어줄 공동체로서의 가능성이 확인된 열여덟 명 무용수들과 김성용은 프로세스 인 잇의 단계들을 밟아나갔다. 공연이 가까워온 어느 날, 그들은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만든다.”라는 문구의 티저(teaser)SNS에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공동의 의욕과 지향으로써 무사히 당도하고픈 어떤 지경에 근접해나가고 있다는 희소식으로 들렸다.

마침내 우리에게 <정글>의 시간이 도래하였을 때 정글은 아직 미명에 잠긴 채였다. 희미하지만 어쩐지 또렷하게 새, , 바람, 나뭇잎들의 소리가 귀청을 파고든다. 일렉트로닉한 뉘앙스가 입혀진 탓. 튜닝된 자연의 소리는 이내 긴장감의 리듬과 속도, 위협감의 음색으로 증폭한다. 짙은 회청색으로부터 옅은 올리브그린으로까지 자연적 기상(氣象)을 암시하는 업스테이지 백라이팅의 색조 역시 자연의 원색과는 다르다. 빛을 내리는 천공의 반구형 오브제 역시 작위적이다. 그렇게 바탕적이고 심리적인, ‘정글적공간의 조성은 묘수였다. 그래야 무용수들이 있는 힘껏 정글의 자극에 반응해내도 고대 축전들의 방탕하고 질펀한 뉘앙스들을 비껴 충동의 현대적 양상으로 감지될 수 있을 테니까.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한 명, 두 명으로부터 출발한 열여덟 몸들의 반응은 갈수록 격렬해진다. 아주 개별적이고 산발적이며 탈구적인, 가식과는 거리가 먼 생명의 생존적 반응들. 짧지만 강렬한 채로 그렇게 한바탕 살아내고 탈진해버렸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구성의 의욕을 지닌 작가는 작품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밀고 나갔다. 문명의 질서처럼 군무가 조직되고, 김성용의 작품세계를 관통해온 문제의식, 폭력·가학·지배욕의 돌연한 출몰과 외면 혹은 무관심, 저항 없는, 죽음에 다를 바 없는, 매립된 감각의 사태를 대조했다. 춤이 물러난 자리를 과열된 ()타자의 뇌(시스템), 얽히고설키며 풀릴 도리 없이 뻗쳐가는 뿌리들, 끓어 넘칠 순간을 모색하고 있는 용암 등을 연상시키는, 세계의 이글거림으로서, 오브제가 차지해버렸다. 부정합으로 작품 전체의 구성적 밸런스는 잡아내었으나 기껏 항진시킨 몸들을 어째서 다시 약체로 되돌렸을까, 의미는 쇠락한다. 그대로 한껏 살아있음을 펼쳐 살아있으라 독려하였음 좋았을 것을.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국립현대무용단 ‘정글-감각과 반응’ ©황인모

‘Process in it’은 절반의 가능성으로 남았다. 실체 없는 단체에 부임한 김성용은 충혈 가능한 몸들을 만났다. 그러나 무용수들로부터 움직임을, 춤을 불러내는 것과는 별도로 무용예술작품은 작가적 발화로서 작위(作爲)되는 것이다. ‘in’들을 춤추게 할 ‘it’들은 개연적이든 파격적이든, 어쨌든 작가의 설계로 연쇄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글, 심해, 우주, 마냥 자연의 부작위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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