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진실한 노래에 청중은 귀 기울인다
[공연리뷰] 진실한 노래에 청중은 귀 기울인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11.2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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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바리톤 김기훈이 오는 11월 26일 런던 위그모어홀 무대에 데뷔한다.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우승 후, 그를 눈여겨본 위그모어홀 관장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리사이틀이다.

지난 11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김기훈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위그모어 홀 데뷔 리사이틀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한국 청중을 먼저 찾은 것이다.

위그모어 홀은 12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타 연주자들의 무대다. 김기훈이 해외에서 처음 갖는 리사이틀이기도 해, 보다 정성들여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독일, 한국, 러시아의 깊이 있는 가곡들로 청중과의 소통을 꾀했다.

김기훈은 브람스의 <네 개의 엄숙한 노래>, 이원주의 <연> <묵향>, 조혜영의 <못 잊어>,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가곡 아홉 곡을 불렀다. 라흐마니노프의 가곡들로 꾸며진 2부 무대는 지난 2017년 타계한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의 1990년 라흐마니노프 리사이틀을 오마주했다. 이 곡들은 흐보로스토프스키의 <라흐마니노프 : 로망스> 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는 1989년 BBC 카디프 콩쿠르 우승자이기도 하다. 훤칠한 외모와 광활한 목소리로 한 세대를 대표했던 흐보로스토프스키는 김기훈에게도 우상이었다. “꿈꿔왔던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하는 소망을 하나씩 이루고 있지만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흐보로스토프스키와 같은 무대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들을 오마주하는 리사이틀이 제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김기훈은 말했다.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네 개의 엄숙한 노래>는 브람스의 마지막 가곡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평생을 사랑해온 클라라 슈만의 죽음을 앞두고 쓴 곡으로, 죽음과 인생에 관한 경건하고 장엄한 곡이다. 가사는 성서의 구절들로 이루어졌다.

브람스를 노래하는 김기훈은 단단한 땅에 뿌리내린 고목 같았다. 인간의 삶이 짐승과 다를 바 없고 흙에서 말미암아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담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임하는 바는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권력이나 계급사회로 인한 괴로움으로 사는 것이 죽느니보다 못하다는 내용의 ‘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의 안단테는 아득히 깊은 김기훈의 호흡으로 뿌리를 뻗어나갔다. 전도서의 가사는 인생의 허망함, 죽음이 가져올 안식에 대해 떠올리게 했다.

세 번째 ‘오 죽음이여, 고통스런 죽음이여!’ 역시 절망과 근심에서 자유케 하는 죽음을 장중하게 찬미한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피아노는 땅 위로 흐르는 물이 되어 들숨과 날숨을 이어갔다. 네 번째 곡 ‘내가 사람의 말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에서 김기훈은 번뇌 가득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외쳤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과 위로는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브람스의 정신을 김기훈은 엄숙하게 전달했다.

이어서 부른 이원주의 <연>과 <묵향>은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 속으로 청중을 빠져들게 했다. 조혜영의 <못 잊어>를 부르는 김기훈의 선하고 묵직한 음색에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라는 김소월의 시가 사무쳤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한국 가곡에도 탁월해, 피아노로 여백의 미를 만들어냈다. 김기훈은 BBC 카디프 콩쿠르에서도 김주원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불러 해외 청중에게 한국가곡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오는 위그모어 홀 무대에서도 아름다운 한국가곡으로 청중과 진한 교감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2부에서는 흐보로스토프스키의 리사이틀을 오마주한 라흐마니노프 가곡들을 선보였다. 올해는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이기도 하다. 흐보로스토프스키의 음색이 너른 광야에 부는 바람 같다면, 김기훈의 노래는 깊은 우물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느낌이었다. 물은 다시금 차오르고, 깊은 데서 길어 올리는 긴 호흡이 노래를 완성시켰다.

가곡들은 낭만주의의 결정체였다. 라쉬코프스키의 피아노는 별이 쏟아지는 황량한 러시아 들판의 밤으로 청중을 이끌었다. 김기훈이 부르는 <꿈>과 <한낮처럼 아름다운 그녀>를 들으면서, 환상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바위처럼 묵묵한 사랑을 상상했다. <제발 나를 떠나지 마세요!>는 우직한 남자의 애 닳는 마음이 느껴졌고 <나에게서 모든 것을 가져갔네>는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아홉 곡의 노래는 반듯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한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다한 사랑의 언어로 다가왔다.

김기훈은 2019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유튜브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언어의 거리감 때문에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못한 명곡들을 들을 수 있어 더 고마웠던 무대다.

2020년, 김기훈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음악의 자유로움에 놀랐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빌드업해 왔다. 가사를 완전한 자신의 이야기로 소화해내고, 음악의 여운을 공간 전체에 스며들게 한다. 진실함이 배어있는 노래에 청중은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11월 26일의 위그모어홀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리라 예상한다.

바리톤 김기훈 리사이틀 (사진제공=아트앤아티스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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