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5 한류, 쟈포니즘, 시누와즈리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5 한류, 쟈포니즘, 시누와즈리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03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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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한류
방탄소년단BTS (사진제공=서울시청)
BTS 방탄소년단 (사진제공=서울시청)

BTS의 세계적인 열기가 비틀즈 이후 처음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세계최단시간 유투브 1억 뷰를 돌파했고 신곡이 나오자 멜론은 몇 일 동안 접속이 불가능했다. BTS의 열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우리는 한류를 BTS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BTS 이전의 한류는 아시아권이 중심이었지만, BTS 이후의 한류는 전 세계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한류보도에는 일부 과장과 왜곡이 있었다. 2003년 이후 일본의 한류, 그리고 중국과 대만, 동남 아시아의 한류는 우리의 보도내용과 일치했다. 실제로 그 열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것이었고, 일본과 중국의 문화산업 관계자들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2004년 이후 한류 드라마 붐을 기억할 것이다. 그 때는 한류 드라마의 쟁탈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방송관계자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했고, 우리의 드라마 제작시스템 등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한류는 보도된 것과는 달랐다. 실제로 필자가 2011년도에 현지에서 본 미국공연을 예로 들면, 실제로는 2천명도 되지 않는 관객이 국내언론에는 1만 5천명으로 소개된다든가, 주로 아시아계나 중남미계가 대부분인 공연도 미국 청소년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보도 되었다.

뮤지컬의 경우도 일본과 중국에서 한류 뮤지컬 붐을 이루었다거나 미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도 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이른바 문화민족주의적 보도경향이 매우 심했다. 그러나 BTS의 팬은 아시아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유럽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실제로 수많은 관객이 몰린 것을 보면 이는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BTS 한류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일차적으로는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다양한 매체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청소년들의 감성에 맞는 음악과 안무 기술을 결합한 콘텐츠, 거기에 빼어난 퍼포먼스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기획자의 노력, 시대적 감성을 간파하는 혜안이 돋보인다.

시누와즈리

17세기 이후에 유럽에서는 시누와즈리(Chinoiserie)라는 중국 문화붐과 쟈포니즘(Japonisme)이라는 일본 문화붐이 인 적이 있었고 최근에는 뉴 시누와즈리, 뉴 쟈포니즘이라는 용어도 등장하였다. 1753년 루이자 울리카(Louisa Ulrika) 스웨덴 왕비는 왕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해 프러시아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저는 동화의 나라를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중국식 정자를 만들도록 남편이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보디가드는 중국복장을 했고 왕의 두 시종은 만다린 군복을 입었습니다. 막내아들(나중에 구스타프 3세)은 중국 황태자처럼 차려입고 정자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만다린 복장을 한 사람들이 황태자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황태자는 저에게 시 한 수를 낭송하고는 정자의 열쇠를 건네주었습니다. 놀랄 정도로 내부가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안방은 멋진 인도양식으로 장식되어 있고 네 귀퉁이에는 각각 한 개씩, 네 개의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방에는 인도의 섬유로 싼 일본 칠기장롱과 소파가 놓여있고, 벽은 세련된 도자기와 탑, 꽃병이 새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옻칠을 한 옛 일본식 서랍은 다양한 골동품으로 가득찼는데 중국식 자수도 포함되어 있었구요. 한 쪽 편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멋있는 드레스덴 스타일이고 또 하나는 중국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을 때 왕은 중국춤을 추라고 말했습니다"( Oliver R. Impey, <Chinoiserie: The Impact of Oriental Styles on Western Art and Decoration>, 1977, p9)

울리카는 중국문물을 매우 좋아한 왕비였다. 역시 중국문화에 심취해 있던 볼테르의 조언을 받아 스웨덴에 계몽주의 사상과 외국문화의 도입에 앞장선 왕비였다. 울리카의 이국취미는 중국문물만이 아니라 동양 문화전반에 대한 경외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동방의 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들의 왜곡된 동양인식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은 중립적인 개념이다. 시누와즈리와 쟈포니즘은 오리엔탈리즘의 한 형태로서 이런 흐름이 등장한 것은 17세기였고 유럽에서 대중화된 것은 18세기였다. 이후 오리엔탈리즘은 유럽각국, 그리고 미국으로까지 전파되어 서양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와의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 일본, 한국, 페르시아, 인도등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발생한 문화현상이다.

시누와즈리는 로코코 스타일과 관련이 많다. 화려한 장식, 비대칭, 사물의 강조, 레저와 즐거움을 중시하는 주제 등에서 유사하다. 유럽인들이 선호한 중국문화는 도자기, 건축, 정원, 섬유, 향신료 등으로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상품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마닐라를 통해 해상으로 수입되었다. 중국차의 수입도 시누와즈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에서 차마시는 습관은 그 때 형성된 것이다. 차마시기는 도자기와 짝을 이루어 엘리트층에서 유행했고, 특히 부인들이 좋아했다. 이런 현상들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국취미(exoticism)의 표현이었고, 사치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프랑소와 부셰, '중국식 정원' 1742년 (사진출처=wikimedia commons)
프랑소와 부셰, '중국식 정원' 1742년 (사진출처=wikimedia commons)

문학에서도 볼테르는 <중국고아> 라는 작품을 쓸 정도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회화와 실내장식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유럽에서는 단순히 문화상품만이 아니고, 농업, 원예, 행정 분야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르고 있을 때, 중국에는 이미 4천년전에 문자를 가졌고, 지금 우리가 자랑하는 문물들을 그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부유층이 특히 높은 관심을 가졌던 것 중의 하나는 중국 도자기였는데, 17세기 초반부터 동인도 회사를 통해 많은 중국 도자기들이 유럽에 수출되었다. 중국은 도자기 분야에서 오랜 옛날부터 높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나라 때부터 도자기를 생산하였지만 본격적인 도자기는 송나라 때부터 생산되기 시작한다.

유명한 도자기 산지는 경덕전으로 이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토질이 좋아서 도자기 생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송나라 정부는 경덕전에 관요를 설치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는 베트남, 일본, 태국, 우리나라 등 동남아시아로 판매되어 나갔다. 이어 원나라 때에는 청자가 발명되었는데 이는 이슬람제국에서 건너온 코발트라는 광물과 결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나라는 징키스칸의 이슬람 침략때부터 이슬람과의 문화교류가 깊었고 이슬람인들을 관직에도 임명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원나라와 청나라의 청자는 이슬람제국에 대량으로 수출된다.

13세기부터 이슬람의 궁정에는 엄청난 양의 중국 도자기가 있었다. 유럽보다 먼저 오스만 제국에서 먼저 중국 도자기를 수입했던 것이다.(황윤. 김준성. <중국 청화자기>, 2010). 사실 아랍의 문화적 역할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랍은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과거의 아랍문명은 대단히 높은 수준을 보였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8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아랍에서 번역된 그리스 고전들의 큰 도움을 받았고 의학, 천문학, 화학, 상업, 무역등 많은 면에서도 유럽을 능가하는 발전들이 있었다.

동인도 회사와 도자기

유럽에 도자기가 수출된 것은 동인도 회사가 상업적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17세기 초에 청나라가 건국하고 명과 청이 전쟁을 벌이면서 중국 도자기의 수출길이 막히게 된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금나라를 세우고 1645년 명이 멸망하였는데 1620년대부터 중국의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에서는 자기생산이 점점 감소하다가 1652년부터는 유럽으로의 수출이 전면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동인도회사들은 도자기의 수입선을 일본으로 바꾸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변변한 도자기 문화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도 “도자기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고, 그래서 유럽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의 많은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는데, 그들이 끌려간 곳은 주로 큐슈지역이었다. 이들은 최남단인 가고시마에서부터 나가사키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도자기 제조에 종사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심수관가는 그 때 가고시마 지역으로 끌려간 도공 심당길의 후손이다.

가고시마의 미야마라는 곳에 가면 심당길의 후손들이 지금도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이 중에서도 충청도 공주 출신의 이삼평이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그가 끌려간 곳은 아리타(有田)라는 지역으로 나가사키 인근이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마을 이름처럼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삼평의 노력으로 인근에서 좋은 흙을 발견하게 되고 여기서 유명한 아리타도자기(有田燒)가 탄생한다.

아리타 도자기의 기법을 훔치려고 세토의 산업스파이(가토다미키치,加藤民吉)가 잠입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이삼평의 사당을 지어 참배할 정도로 그는 일본 도자기 산업의 중요한 기여자다. 거기서 만든 도자기들은 아리타에서 12km 정도 떨어진 이마리라는 항구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다. 그래서 아리타 도자기를 이마리 도자기(Imari Porcelain)로 부르기도 한다. 이때가 1650년경이다. 1652년부터 1683년까지 30년 동안 190만개의 야리타 도자기가 수출되었다. 이는 물품수입대금을 도자기로 지급한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삼평을 모신 사가현의 도산신사 (사진제공=호텔온센닷컴)
이삼평을 모신 사가현의 도산신사 (사진제공=호텔온센닷컴)

조선도공과 쟈포니즘

17세기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유럽인들의 이국취미를 만족시킨 동양적 디자인과 감성, 그리고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타국과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유럽국가들의 상업적 노력이 결합된 결과였다. 당시는 대항해 시대가 거의 완결되는 시점이었다. 스페인과 포루투칼을 중심으로 15세기 초부터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은 17세기 초까지 20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 영국 네덜란드 등이 합류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운송과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이 이루어낸 글로벌한 상업네트워크가 구축되는 시기였다. 유럽의 국가들은 신대륙의 발견, 기술의 발전과 부의 축적을 통해 제국주의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유럽국가들은 서로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앞다투어 ‘동인도 회사’를 설립한다.

동인도 회사를 맨 먼저 설립한 나라는 영국으로 1600년이고, 이어 1602년에 네덜란드, 1616년 덴마크, 이어서 포루투칼(1628), 프랑스(1664), 1731년에는 스웨덴이 뒤를 잇는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21년간 동인도 제도와의 무역을 독점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나중에는 실질적으로 인도를 통치하는 정치적 기구로 변하였고 1858년 세포이의 난으로 해체된다. 규모가 가장 큰 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16세기말경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네트워크는 포루투칼 상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아시아와의 교역루트 확보에 대한 압력을 느끼고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무역항로를 개척하고 1602년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포루투칼 상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네덜란드 상인들끼리도 경쟁을 했다.

1602년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부여한 회사는 <통합 동인도회사>였다. 이를 보통 VOC로 줄여 부른다. VOC는 1669년경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회사였다. 150여척의 상선과, 40척의 전함 그리고 5만명에 달하는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만여명의 용병을 고용하였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물론이고 태국, 이란, 중국 광동성, 타이완, 서인도, 이란, 방글라데쉬 등 세계 곳곳에 지사를 두었다. 일본과의 도자기 무역을 한 것도 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당시 큐슈에서 기독교도들에 의한 대규모의 민란(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에도막부는 쇄국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나가사키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을 만들어 외국인들과의 통상을 이곳으로 제한하였는데, 여기에 VOC의 지소가 설치되었다. 일본도자기는 이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에 대량 수출되게 된 것이다. 당시 도자기는 매우 값이 비싸서 동인도회사들은 도자기 수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뒤에 독일의 마이센과 프랑스의 세부르 등에서 유럽의 독자적인 도자기가 생산되는데 이들은 모두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보고 배운 것들이었다.

이렇게 일본 도자기는 처음으로 유럽에 일본문화붐을 일으켰다. 당시의 일본붐은 따지고 보면 조선도공들의 역할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도자기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고 이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를 쟈포니즘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쟈포니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건 1870년대에 이르러서다.

고흐의 '탕기아저씨'. 탕기는 고흐의 그림을 중개한 화상이었다.이 그림에는 후지산과 일본의 자연, 기모노등이 보인다. 고호는일본을 제재로 한 그림을 무려 400여점을 그렸다.탕기영감의 초상 1887, 92x75cm, oil on canvas (사진출처=wikimedia commons)
고흐의 '탕기아저씨'. 탕기는 고흐의 그림을 중개한 화상이었다.이 그림에는 후지산과 일본의 자연, 기모노등이 보인다. 고호는일본을 제재로 한 그림을 무려 400여점을 그렸다.탕기영감의 초상 1887, 92x75cm, oil on canvas (사진출처=wikimedia commons)

쟈포니즘

쟈포니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약간씩 다른 의견들이 있지만 대체로 19세기 중엽에 있었던 산업박람회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8세기에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은 생산의 혁명을 불러왔다. 영국은 국가적 위신을 높이고 상품의 판매촉진을 위해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게 된다. 그 첫 행사가 1851년에 런던에서 개최된다. 전시장인 수정궁은 유리와 철을 사용하여 만든 건축물로서 당시로서는 첨단시설이었다. 이어 1855년 파리, 1862년 런던, 1867년 파리, 1873년 빈 등으로 이어지는데 일본이 만국박람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1867년 파리박람회였다.

여기에는 에도 막부와 민간, 그리고 사츠마번과 사가번(두 번 모두 큐슈지역에 위치한 막부시대의 번들이다)에서 출품한 상품들로 주로 가구, 병풍, 도자기, 판화, 책, 우키요에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양인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는데,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이 우키요에(浮世繪)였다. 당시 출품한 우키요에 작품은 호쿠사이(北齋)나 하루노부(春信)같은 당대 최고의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키요에는 우리의 민화와 유사한 그림으로써 우키요에가 관심을 받은 이유는 지금까지의 서양회화와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우키요에는 자연을 주로 대상으로 하였고, 구도나 색채사용법이 달랐으며 비대칭, 분할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 서양회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프랑스의 화가들이 우키요에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고전파의 앵그르, 바르비종파의 밀레와 코로, 그리고 고호, 고갱, 르느와르, 세잔등 당시의 거의 모든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고호는 너무 일본회화를 좋아해서 그의 그림중 400여점에 우키요에나 일본식 화풍을 도입하였다. 이어서 1873년 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국가차원의 노력을 들여 참여하였다. 파리 박람회보다 참가품목을 대폭 늘렸다. 도검류, 농기구, 어구 등 생활용품과 도자기, 칠기 우키요에 등의 미술공예품을 출품하였다.

이 박람회에서도 일본 붐을 일으켜 대부분의 상품이 유럽 곳곳의 박물관에 팔려나갔다. 일본은 이때부터 쟈포니즘을 상업화하기 시작한다. 도쿄에는 3-4개의 공장이 들어섰고, 유럽과 일본의 중개상들이 상품판매에 나섰다. 쟈포니즘은 이어 미국 등으로까지 전파되었고 아르 누보, 아르 데코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미술사 발전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였다. (ジャポニスム學會編, ジャポニスム 入門, 26~47).

클림트 '부채를 든 여인' (사진출처=wikimedia commons)
클림트 '부채를 든 여인' (사진출처=wikimedia commons)

쿨 아시아

China와 Japan은 국가이름이지만 China는 도자기라는 보통명사로도 쓰인다. Japan은 옻칠이라는 보통명사로도 사용되고 있고 Japanning은 칠하기라는 뜻으로 쓰일 정도로 중국과 일본의 미술과 공예품은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커다란 문화적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의 문물은 적어도 17세기경까지는 유럽과 아랍등지에서 커다란 존경의 대상이었다. 중국인들은 세계 최초로 화약, 종이, 나침반을 만들어내는 등 과학기술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조셉 니담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16~17세기경까지 중국의 과학이 오히려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중국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새로운 시누와즈리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뉴 쟈포니즘(New Japonism)은 최근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일본의 세계적인 대중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은 칼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동양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가 없어서 타자의 손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기초한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이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으로 바뀌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를 쿨 아시아(Cool Asia- 매력적인 아시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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