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1, 반연극주의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1, 반연극주의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9.2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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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극장(The Theatre of Dionysos).
디오니소스 극장(The Theatre of Dionysos).

반연극주의

청소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다. 대중매체에서는 연일 연예인이나 연예산업에 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고, 인터넷 검색순위에서는 연예인에 관한 기사가 늘 상위를 차지한다. 연예인은 사회적으로 유명인이 되었으며 당대의 문화를 주도하는 지도적 인사가 되고 있다. 정치가나 의사, 학자가 되려던 과거 젊은이들의 희망이 이제는 연예인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과거에 엔터테인먼트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나 연극인들은 사회에서 천대를 받는 최하층민들이었다. 적어도 19세기 중엽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극에 대한 편견이 매우 심했다. 조나스 배리쉬(Jonas Barish)는 『반연극적 편견(Antitheatrical Prejudice)』이라는 책에서 연극배척 현상을 반연극주의(Antitheatricalism)라고 불렀다. 반연극주의는 연극이 가장 활발하고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을 때 더욱 강성했는데(AP, 66). 이는 아마도 연극이 대중적 인기를 얻을수록 그 영향력도 더 커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연극주의는 연극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에 존재했었다. 학문적으로도 철학, 종교, 문학, 심리학, 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존재하고 있었고 예술의 형식, 내용, 배우, 연극관계자의 삶의 형식에 대한 반감에 기초해 있었으며 정부정책, 지원, 통제 등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예술에서 유래한 언어들이 다른 예술에 적용될 때 이들은 대개 무언가를 상찬하는 내용을 담는다. 어떤 경관을 ‘시적’이라거나 역경과의 고투를 벌이는 사람을 묘사할 때 ‘서사시’와 같다거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서정시적’이라고 부르는 예들이다. 저녁을 잘 대접받은 여성이 식사가 시적이었다고 말하면 이는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다. 마찬가지로 음악적(musical), 교향악적(symphonic), 그림같은(graphic), 조각같은(sculptural)이라는 말들도 칭찬하는 말들이다. 반면에 연극에서 빌려온 용어들, 예를 들면 연극적(theatrical), 오페라적(operatic)이라든가 멜로드라마적(melodramatic)이라든가 무대같은(stagey, 떠벌린다는 뜻)등과 같은 말들은 적대적이거나 경멸하는 느낌을 준다. 또한 연극적 행위들에서 유래한 말들, acting, play acting, playing up to, putting on an act, putting on a performance, making a scene등의 말은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말들이다. 이런 언어의 용례들은 영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어나 독일어, 이탈리아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AT, 1). 유럽어 계통에는 이런 연극과 관련된 경멸적인 표현이 많다. 이런 연극에 대한 편견의 흔적은 연극의 탄생과 그 역사를 같이한다. 연극사상 최초의 연기자로 불리워지는 테스피스(Thespis)는 솔론에 의해 거짓말쟁이라는 좋지 못한 별명을 얻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인 체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극적이라고 하면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광대는 미천한 딴따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배우는 가장 천한 직업을 가진 하층민이었다. 그리스어로 배우는 hypocrite인데 이는 위선자라는 뜻을 지닌 영어가 되었다. 동양은 사농공상으로 구분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는데, 배우들은 이 사농공상에도 속하지 못한 천민중의 천민이었다. 가부키에서는 배우를 히닌(非人)이나 에타(穢多)라고 불렀다. 그야말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도 8가지의 천한 직업이 있었고, 이를 팔반사천(八般私賤)이라고 한다. 사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工匠) 등이었다. 배우(俳優)라는 한자의 어원을 보면 사람이 아니라는(俳) 뜻이 담겨 있다. 가부키의 히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배우는 창우(倡優)라고도 하였는데 백정과 더불어 민속연예를 전달하던 최하층의 천민들이었다. 조선에서 광대들은 궁중행사나 외국 사신들을 영접할 때 산대잡희나 나례 등을 공연하고 평상시에는 떼를 지어 지방을 돌아다니며 각종 연회로 생계를 이었다. 이들은 궁중 ·관가 ·양반의 사랑을 비롯하여 도회 ·농어촌 ·시장 등에서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정재(呈才) ·가면희 ·검무 등을 공연하였다. 카스트 제도가 있는 인도에서도 배우는 불가촉 천민(달리트)이었다. 다른 예술과 달리 왜 공연예술은 이렇게 천대와 박해를 받았을까?

반연극주의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된다. 『국가』 10장에서 플라톤은 예술 자체를 폄하하고 있다. 예술은 진리나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 어떤 표현으로도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낼 수는 없다. 플라톤은 만물에 이데아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는 침대를 예로 들면서 침대를 그린 것이나 침대를 언어로 표현한 것은 침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침대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장인은 침대로 만들고 화가는 이를 다시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은 이데아에서 한참 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일곱번째 편지』에서는 말과 글의 특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국가론에서의 주장과 유사하다. 그는 여기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순서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이름이고 두 번째는 정의요 세 번째는 모상이요 네 번째는 앎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참으로 있는 것인 그 자체’, 즉 이데아다. 원을 예로 들자면 원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있고 이름과 술어들로 구성된 정의가 있으며 그려지거나 지워지며 돌림판에서 돌려 만들어지거나 부서지는 원이 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이 원들에 대한 앎과 지성과 참된 의견이 있으며 다섯 번째로 참으로 있는 것인 그 자체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실제로 그려지거나 돌림판에서 돌려 만들어진 각각의 원(모상)은 다섯 번째 것(이데아)에 대립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일곱 번째 편지』, 343a). 이는 곧 『국가』 10장에서 비판했던 모방과 이데아의 관계이자 예술과 이데아, 말과 이데아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진리나 실재, 이데아는 어떤 매체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주장하고 있다. 『파이드로스』에서도 유사한 주장으로 나타나는데 언어라는 것이 진실을 드러내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매체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플라톤이 살아있다면 현대사회의 다양한 매체환경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플라톤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매체론이나 매체인식론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 같다.

플라톤은 미메시스는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연극은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3중적 또는 4중적 재현에 해당한다. 이데아가 있고 이데아를 대본으로 작성한 작품이 있으며 이를 다시 연극으로 재현하는 것이니 3중적 재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반예술(Anti Art)적 사고나 반연극주의는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와도 매우 흡사하다. 선불교에서는 말을 하는 순간 잘못된 것이라거나 문자로는 아무 것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매체로도 진실을 드러내기가 어렵다고 본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선불교의 매체인식의 유사성을 알 수 있다. ,

플라톤의 주장은 이후 로마에 흡수되어 로마의 반연극주의의 기반이 되고 나아가 서양 철학의 주요한 논쟁거리가 된다. 서기 1세기경의 인물인 키케로는 연기와 연극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로마시대에는 극장건축은 금지되었고 대신 다른 오락이 연극을 대신하였다. 외국인이거나 노예, 해방노예들이 배우를 했고 이들은 시민권이 없었다. 그들은 그 직업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어야 했다. 타시아노(Tatian)는 ‘배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조작하기 때문에 큰 죄가 된다. 악역을 연기하면 더욱 큰 죄가 된다.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신체적 변형이 필요하다면 스스로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고 창조주가 자신의 작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에 대한 저항이 된다’고 말한다. 타시아노는 배우가 본래 스스로는 그 사람이 아니면서 외면적으로 위장하는 사람으로서 신들을 비난하는 고독한 비판자이고 미신의 원형이고 영웅적 행위를 욕하는 사람이며 살인을 연기하는 자이며 간통의 기록자이며 광기의 저항자이자 교수형의 선동자라고 하였다.

4세기에 유명한 설교자 크리스토톰(Christotom)은 금욕을 강조하면서 구원은 쾌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괘락을 억제하는 데서 온다고 하였다.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중세시대의 연극과 교회

AD 470년 로마가 멸망하면서 교회는 더욱 강성해지고 영향력은 커졌다. 그리고 연극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중세 시대에 연극은 교회생활의 일부로 다시 등장하여 연극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로마 시대에 연극을 비판하던 기독교가 다시 연극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맹률이 높아서 대중들의 신앙심을 육성하기가 어려웠던 교회는 연극을 전도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교회와 연극의 목적은 일치하였고 서로 특별한 대립이 없었다. 물론 일부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반역극적 사고가 있었지만 교회의 목적에 충실하게 연극을 통제함으로써 연극이 특별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연극이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은 공연이 상업화되고 많은 공연이 이루어지던 16세기부터다. 16세기 르네상스기에 공연은 상업화된다. 런던에서 1567년에 첫 상업극장인 레드 라이온(Reds Lion)극장이 개장하였고 이어서 1576년에 더 씨어터(The Theatre)가, 1577년에 커튼(Curtain) 극장이 개장하는 등, 2년 사이에 5개의 상업극장이 문을 열었고 세익스피어가 활약한 글로브(Globe) 극장은 1599년에 개장하였다. 이들 극장은 당시로서는 그 화려함과 오락성, 미풍양속에 반하는 내용 때문에 기독교인들로부터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1642년에 극장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연극은 또 정치와도 충돌하는데 정치인들을 풍자한 연극이 검열의 대상이 된다. 1737년의 극장법은 당시 수상이던 로버트 월폴을 풍자한 <거지의 오페라> 등 정치풍자극이 발단이 되었고, 1843년의 극장법 등을 거쳐 1968년까지 검열이 지속된다.

17-18세기의 반연극주의

17-18세기에도 반연극주의는 계속된다. 프랑스의 기독교의 한 분파였던 장세니즘(Jansenism)은 연극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영국의 청교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배리쉬에 의하면 프랑스에서의 논쟁은 더욱 분석적이고 지적인 책임을 동반한 논쟁이었다. 장세니즘은 칼뱅주의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10계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쾌락은 중독되고 모든 유쾌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갈라놓는다. 선은 쾌락을 극복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피하는 것에서 생긴다. 장세니즘은 매우 보수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장세니스트였던 피에르 니콜(Pierre Nicole)에 의하면 도덕적 반대론의 주된 주장은 연극 제작자의 문제가 아니고, 악의 공간이라는 극장의 문제나 극장의 무질서도 아니었으며 그 내용이 문제였다. 욕망, 미움, 복수, 절망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연기하면 그의 영혼에 비도덕적이고 무가치한 이념만이 가득찰 것이고 긍정적 감정조차도 배우(위선자)에 의해 단순한 거짓으로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다(AP, 201).

반연극주의는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1778년 미국 독립 2년 후에 도박, 경마, 투계, 연극 등이 모두 죄악이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예일대의 티모디 드와이트(Timothy Dwight)와 프린스턴대의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등은 강력한 반연극주의자였다. 위더스푼은 연극이 오히려 도박보다 더 해롭다고까지 말했는데, 그것은 연극이 좀 더 대중적이고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연극은 해악이 코드화되고 제도화된 시스템으로서 집단을 이루는 연극관람은 대중들의 감정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심들은 심리적인 것으로써 감성적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자신과 관객에게 더욱 감정을 고조시킬 것이다. 18세기의 대표적인 반연극주의자는 루소였다. 루소는 제네바에 극장을 설립하는 문제에 대해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저술 속에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루소는 연극자체, 배우들의 비도덕성, 극장의 폐쇄성 등을 거론하면서 제네바에 극장을 세우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루소는 연극뿐만 아니라 학문도 적대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작고 소박한

축제는 권장하였다. 19세기의 반연극주의자는 니체였다. 니체는 연극이 유기적 통일성이 부족하고 다른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연극중심주의(thetrocracy)도 근거가 희박하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또한 연극중심주의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로 그의 스펙터클한 연극(오페라)이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을 연극에 복속시킨다고 비판하였다. 니체는 연극은 유기적 통일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타예술에 대한 악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거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비극의 탄생』에서 주장한 그리스 비극에 대한 높은 평가를 고려한다면 상당히 모순된 주장이기는 하지만 니체는 반미메시스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니체에게 아폴론적 재현(representation)보다는 디오니소스적 현시(presentation)가, 관조보다는 참여가 바람직한 것이었다(AP, 404). 니체는 바그너를 비판하면서 바그너에 대한 집착 즉 바그너주의는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 교만을 생기게 하고 모든 학문에 대한 경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연극의 우위성에 대한 믿음과 모든 예술을 지배하는 연극의 원리에 대한 믿음이라는 넌센스, 즉 연극중심주의라는 시대착오적인 연극관을 낳을 것으로 보았다. 오히려 바그너 주의자들에게 연극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연극은 모든 예술의 하위에 있으며 늘 부차적이며 언제나 두 번째 것이며 거칠게 된 것이고 대중을 위해 잘 처리되고 잘 위장된 것이다! .... 연극은 취향문제에 있어서 대중숭배의 한 형식이고 일종의 대중봉기이며 좋은 취향에 대적하는 국민투표다(『바그너의 경우』, 57).

마틴 푸치너(Martin Puchner)는 모더니즘에 반연극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는 니체, 벤야민과 마이클 프리드다( 『Stage Fright』, 2-3). 푸치너는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와 연극을 비교하면서 연극의 위기를 말하였고,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는 회화와 조각에 미친 연극적 영향을 비판하였다고 말한다. 프리드에 의하면 회화나 조각이 마치 스스로가 배우가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회화나 조각은 마치 관객에게 어필하는 공허한 배우를 닮으려는 과정에서 자기 충족적 통일성과 순수성을 상실하였다. 프리드는 연극의 의인화 현상을 회화나 조각이 모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영화는 관객 앞에서 배우를 제거하고 그들을 클로즈업이나 몽타주와 같은 기술 속으로 편입하여 의인화를 제거한다. 따라서 예술의 통일성과 순수성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Stage Fright』, 3). 이런 점에서 보면 마이클 프리드는 벤야민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마이클 프리드는 『몰입과 연극성(Absortion and Theatricality)』이라는 책에서 미니멀리즘을 즉자주의(Literalism)로 명명하고 관객과의 떠들썩한 교류를 통한 연극적 행위가 중심이 되면서 회화에서의 몰입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연극성’을 ‘몰입’에 대비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반연극주의의 주요 주장들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미메시스에 대한 반감이다. 아도르노에게 미메시스는 타자에 대한 유기적인 순응(『계몽의 변증법』, 271)이다.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의 개념을 확대하여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합일, 순응, 동화로 생각하였다. 미메시스는 합리적 인식작용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는 ‘몰입’과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미메시스의 원래의 뜻은 모방이다. 이는 플라톤의 주장에서 유래하는데 플라톤은 미메시스, 특히 악을 모방하는 것은 인간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창피스런 짓을 모방하지 말아야 하며 이런 걸 모방하는 데 있어서 능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방을 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모방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계속되면 몸가짐이나 목소리에 있어서 또는 사고에 있어서 마침내는 습관으로 그리고 성향으로 굳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국가』, 395c-d). 플라톤에게 모방은 구성적인 힘이다. 즉 모방하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악인을 모방하면 악인이 되고 여인을 모방하면 여인이 된다. 배우는 덕을 갈망하거나 천박한 것을 피할 때만 타인을 모방해야 한다. 더욱이 배우는 여성이나 노예, 악한, 미친 사람, 대장장이, 기능공, 뱃사공 등등을 흉내 내면 안 된다.

플라톤의 미메시스론은 로마의 철학자들에게 전파되었고 18세기 경 까지도 유럽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을 때 매우 쾌락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고백록』은 플라톤을 연상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다른 사람의 성격을 모방하거나 동조하여 거짓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기모순적이거나 이중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개인숭배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영웅숭배는 우상숭배의 형식으로서 배우에 대한 칭찬은 신에 대한 숭배를 대체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고 하였다.

프랑스의 작가 라 로슈푸코도 모방을 비판하였다. 우리가 남을 모방할 때 우리의 내부에 있는 진정성은 사라지고 스스로의 장점은 희생된다. 신까지를 포함하여 타인을 모방하면 모든 것이 개념이나 캐리커쳐 같은 것으로 전락한다. 개선에 대한 의도조차도 모방은 혼란으로 이끈다. 따라서 미메시스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방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였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시학 4장). 그리고 그는 오히려 연극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두 번째로는 연극은 2차적 예술이라는 점이다. 문학이나 시처럼 직접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희곡을 거쳐서 나온 간접적이고 이차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은 문학의 부수적인 영역으로 여겨졌고 문학의 시녀처럼 인식되어 왔다. 샤논 잭슨에 의하면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대학에 연극학과가 없었다. 연극적 편견이 심했던 서양에서 연극학이 자리를 잡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1905년도에 하바드 대학에 연극전공이 신설될 때에도 남성백인인 영문학과장 조지 라이먼 키트레지(George Lyman Kittredge)와 연극학자였던 조지 피어스 베이커(George Pierce Baker), 그리고 하바드대 총장 찰스 엘리엇 등의 노력으로 문학연구의 한 분야로 출발하였다. 공연연구가 오늘날과 같은 전문분야로 발전한 것은 학문의 전문화와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공연연구나 연극연구는 <문화연구>라는 학문분야와 유사할 만큼 커다란 외연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오늘날의 퍼포먼스학은 문화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단순히 연극연구에 그치지 않고 문화전반을 다루는 포괄적이고 학제적인 문화연구 분야로 변화한 것이다( 『Professing Performance』, 79-108). 그러나 과거에 연극은 문학의 시녀로 인식되었고 그 이차성(secondariness) 때문에 늘 주류문화에서 벗어나 있었다.

세 번째로는 종교적 반연극주의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연극은 미풍양속을 해치고 대중을 쾌락과 방탕으로 이끄는 비윤리적인 오락이었다. 로마 시대의 터튤리안과 타시아노(Tatian)와 같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연극에 반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금욕적 원칙을 주장하였는데, 터튤리안은 『스펙터클De Spectaculis』에서 쾌락은 피해야 할 일로써 많은 군중들이 함께 하는 연극은 의도적으로 군중들을 흥분시키고 실재하지도 않은 인물들의 이미지에 빠지게 한다. 그들 역시 플라톤의 미메시스 사상을 기독교적 맥락에 적용시키면서 연기는 거짓을 계속 늘려나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연극이 종교의 시녀로서 종교의 전파수단으로 이용될 때까지만 해도 종교와 연극의 갈등은 적었다.

16세기 이후, 종교와 연극은 다시 대립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연극은 미풍양속을 해치고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오락이었다. 청교도들은 연극을 악으로 보았다. 1642년에 극장을 폐쇄하고 일체의 오락을 금하였다. 윌리엄 프린(William Prynne)은 변호사이자 작가였는데 청교도적인 시각에서 <히스트리오마스틱스: 배우라는 재앙, 또는 비극>이라는 글을 썼다. 프린은 크리스마스를 로마의 이교도들이 만들어낸 축제라고 비난한다. 또한 연극은 일을 방해하고 오락과 쾌락을 부추기며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 대중적 연극은 죄에 가득차 있고 이교도적이며 음탕하고 세속적인 볼거리와 화려한 타락에 물들어 있다. 인간의 태도, 마음, 영혼을 혼탁하게 하는 오락이다. 배우와 연기는 하느님이 부여한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가는 악이다. 이는 하느님의 절대성에 대한 도전이다(AP, 91-93). 하느님은 영원의 존재이고 불변의 상징이다. 그러나 배우와 연기는 수시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거짓과 위선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종교와 연극 간에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1879년 영국에는 <교회와 무대길드>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당시의 신문들은 교회가 점점 연극에 대해 관대해지고 있음을 알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는 극장을 ‘악마의 집’으로 비난해 왔다. <교회와 무대길드>는 스튜워트 헤들람이라는 목사가 주도하였다. 그는 드루리 레인에서 일하던 여성배우 두 명이 자신의 직업을 오랫동안 숨겨온 사실을 보고 이 단체를 설립하였다. 1879년에 설립된 이 단체에는 1년 만에 470여 명의 회원이 참여했고 이 중에는 91명의 목사와 172명의 교회관계자가 참여했다. 이 단체의 임무는 연극, 배우, 뮤직홀 아티스트, 무대가수, 무용수 등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 일이었다. 연극에는 좋은 점이 있는데도 교회는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오히려 좋은 연극은 도덕성을 함양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였다(Wikipedia).

이슬람 지역에서도 연극은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전용극장도 없었고 특별히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허용된 연극 형식은 시아파 지역(지금의 이란)에 있었던 ‘타지아 수난극’이다. 이는 무하마드의 손자인 자인(Zain)이 자기가 속한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이 모두 학살당한 뒤에 간신히 살아남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한다. 그래서 시아파는 자인을 무하마드의 정통 후계자로 받들고 있다(에드윈 윌슨,『세계연극사』, 11).

이슬람 지역에서 비교적 활발했던 공연은 인형극이었다. 터키의 카라고즈(Karagoze), 인도네시아의 와양(Wayang - 이는 이슬람 탄생 이전부터 있었던 인형극) 등이 대표적이다. 춤 역시 활발하게 공연되었다. 이슬람의 춤은 종교적 목적과 세속적 목적으로 공연되었고, 다양한 형식을 지녔으며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에는 전용극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슬람에서는 무하마드나 그의 동료들, 천사들을 묘사하는 연극은 허용되지 않았다(Wikipedia- Isamic Culture). 이슬람 지역에 첫 오페라 하우가 건립된 것은 2001년이 되어서야 암만에 세워진 로열 오페라 하우스다.

네 번째로는 사회적 반연극주의다. 우선 연극은 사치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과거에는 물자가 매우 부족해서 물건을 아껴 써야 한다는 사치금지법이 많은 나라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침채정승이니 잡채판서라는 말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흔한 음식인 김치와 잡채를 상납하고 정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풍자하는 용어였다. 실제로 광해군 때 이충이라는 사람이 광해군에게 잡채를 상납하고 호조판서까지 올랐다고 한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올리버가 손수건을 하나 훔치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로 당시에는 물건이 귀했던 것 같다. 루소는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네바 극장 설치의 반대이유 중 하나로 사치를 들고 있다.

사치가 문제가 된 건 특히 가부키였다. 일본의 에도 시대에 서민들은 늘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화재와 지진이 빈발하였고 이로 인해 농작물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농민들의 소요도 빈발하였다. 에도 시대에 ‘4대 기근’이라는 대기근이 발생하였는데, 에도 막부는 늘 사치금지령을 발동하였고 사치를 조장하는 행위들을 금지하였다. 가부키는 대표적인 사치조장 오락이었다. 배우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기 때문에 대중들의 사치심을 자극한다고 본 것이었다. 연극은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을 오락에 탐닉케 함으로써 근로의욕을 약화시킨다는 비판도 있었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반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비판이 많았다. 대중들은 높은 예술성을 담은 연극보다 가볍고 재미있는 연극을 좋아한다. 임프레사리오들은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하여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기이한 내용들을 기획하게 된다. 19세기 후반에 파리의 탕플가(Boulevard du Temple)에는 사건을 주로 공연하는 극장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극장거리는 ‘범죄거리(Boulevard du Crime)’로 불리웠다. 19세기 프랑스의 연극계에서는 고급연극과는 다른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연극이 증가하였다. 멜로드라마, 보드빌, 판토마임, 아크로바트 등의 엔터테인먼트가 점점 많아졌다. 가부키의 경우에도 매우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공연들이 많았다. 황당무계한 괴담이나 음란한 내용들이 많아 늘 에도막부의 감시의 대상이었다. 토카이요쯔야괴담(東海四谷怪談)이라는 장르는 괴담을 전문적으로 모아놓은 가부키였고 대중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란한 이야기, 자살을 자극하는 이야기(心中物)들도 많았다.

공연은 예술이기 이전에 오락적 매체다. 원래 연극을 뜻하는 play가 놀이라는 의미의 play와 같이 쓰이는 것은 연극의 오락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의 연극은 서민들의 볼거리였다. 촛불조명으로 연기와 그을음이 가득한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대중들이 찾은 것은 예술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였다. 술 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싸움이 벌어지고 심지어 소대변을 보던 극장에서 대중들은 예술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도 세익스피어 이전까지는 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다섯 번째로 정치적 반연극주의다. 세계 어느 나라든 연극 또는 예술은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정치인을 풍자해 왔다. 연극에서 정치풍자나 사회적 부조리를 다루는 연극이 정치인의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집단성 때문이다. 대중이 집단을 이루어 모이게 되면 집단적 흥분상태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배우를 좋아하게 되면 그 배우에 몰입하게 되고 그 배우를 좋아하는 다른 관객과도 친해진다고 말한다(AP, 58). 그래서 그들을 분리해놓았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이를 뒤르케임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집단적 흥분이라고 불렀다. 이는 자칫하면 대중봉기로 이어질 수 있다. 다니엘 오베르의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라는 오페라는 벨기에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대표적인 사례다.

여섯 번째로 미학적 반연극주의도 있었다. 연극은 이차적 예술이라는 점에서 실재를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찰스 램은 연극은 혐오스럽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트릭으로 가득 차 있고 관객들에게 유치한 환영을 만들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햄릿의 독백장면에서 그 진정한 의미는 그 내면에 있는데 연극은 관객의 시선을 표면에 붙잡아 둔다. 무대적 재현은 언어의 장난으로 끝나버릴 위험성이 있다(AT 329-331). 그렇다고 찰스 램이 연극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연극적 재현은 압도적인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때도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램은 연극적 재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연기 자체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연기 행위는 위선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배우는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언가로 누군가로 분한다는 것(impersonation)은 거짓이다.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면 그 사람의 성격을 닮게 된다. 18세기 초반까지도 배우는 등장인물과 유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우는 해당 역할을 경험한 사람이 좋다는 생각이 연극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등장인물의 성격에 몰입하는 것이 오히려 연기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비판이 잇따라 제기되어 왔다.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연기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데이비드 개릭이나 콜리 시버같은 영국의 배우들은 ‘등장인물을 지나치게 모방하고 동일화하는 것’이나 감수성의 과잉은 연기에 해롭다고 여겼다 (AP, 277-278). 디드로도 『배우에 관한 역설』에서 감정의 억제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프랑소와 리코보니도 마찬가지였다. 연기에는 통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연기에서는 원본의 인물로서의 의식과 배우로서의 의식이 이중구조를 이룬다. 뒤 브와(W.E.B. Du Bois)는 이를 ‘이중의식’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를 이중적 자아라고 해도 될 것이다. 배우는 완전한 원본의 인물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원본의 자아에 몰입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해 스타니슬라브키는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로 나눈다. 그리고 무의식적 자아야말로 진리의 원천이고 배우에게는 일상생활의 감정보다 더 소중한 ‘감정의 자리’라고 주장한다.

연극은 문학의 시녀라는 비판이 있었다. 텍스트의 정확한 재현만이 진정한 연극이라는 주장은 문학에 종속된 연극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최근에 텍스트의 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하고 텍스트는 늘 열려진 체계라는 것, 즉 텍스트 자체에 예속된 연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연극은 작가들의 생각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레제 드라마 또는 옷장 드라마(Closet Drama)라는 장르가 있다. 희곡을 극장공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서용으로 쓴 희곡을 말한다. 17-18세기에 옷장드라마는 제법 많이 쓰여졌다. 그들은 연극무대에서의 비윤리적 풍조와 화려한 스펙터클로 인한 피상성에 몰두하는 연극을 경멸하였다. 관객들의 기호에 영합하는 희곡은 영혼을 파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문학적 연극이야말로 진정한 연극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원인도 옷장 드라마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1642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고 극장이 폐쇄되자 극작가들은 공연 대신 읽기를 위한 희곡을 썼다.

마지막으로 반연극주의는 몸에 대한 편견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은 분리된 것으로 몸은 마음에 종속된 형이하학적인 것이라는 인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인류의 의식을 지배해왔다. 따라서 몸으로 표현하는 공연은 예술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으려고 했거나 천박한 대중들의 오락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한다. 파이드로스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기 전 그와의 대화를 기록한 철학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담대하게 맞이했는가, 아니면 비굴하게 맞이했는가에 대한 내용인데,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은 몸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사물은 영혼을 통해서 바라봐야 한다. 몸을 통한 형이하학적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참된 지각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영혼을 통한 사유는 순수한 지식을 알 수 있게 하고 영원한 지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영혼은 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이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바뀌게 된다. ‘내 몸은 나의 전부이며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몸의 어떤 면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니체나 베르그송등의 철학자들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오히려 몸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메롤로 퐁티는 몸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몸철학자다. 메를로 퐁티는 오히려 의식이 몸에 체화된다는 ’체화된 의식(Embodied consciousness)‘ 또는 ‘체화된 인지’의 개념을 주장하였고 몸은 인간의 전부라고 보았다. 그는 ’나는 나의 몸‘이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과학의 발달과 함께 몸과 인식의 관계에 대한 혁명적인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철학의 역할을 과학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퍼포먼스가 중요하게 부상한 것은 몸이 이처럼 복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예술에서의 의미의 창조는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비롯된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중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중에서

반연극주의와 대중문화비판

과거의 반연극주의는 오늘날의 대중문화비판의 역사적 뿌리다. 과거에 연극은 오늘날의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역할을 담당했던 오락적 매체였다. 오늘날 텔레비전의 기능에 대해 많은 비판적 견해들이 나오는 것처럼 과거에 연극 역시 그런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대중문화비판은 독일의 프랑크루트 학파에서 비롯되었다.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등을 중심으로 하는 비판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은 대중매체가 문화의 타락을 부추기고 대중의 취향을 동일화하여 문화를 획일화한다고 비판하였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명명한 <문화산업>이라는 개념은 대중문화비판의 핵심적 개념이다. 문화산업은 저속한 가치를 전파하고 사회질서와 규범을 파괴하며 인간의 감수성을 약화시킨다, 또한 모방에 의한 범죄를 조장하며 수동적인 오락의 기능을 한다. 감각적 자극을 강화하고 때로는 퇴폐적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대중문화 또는 문화산업에 익숙해진 대중은 비판적 사유능력을 상실하여 체제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비판은 주로 막시즘 계열의 비판이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전에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에서 그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람시에게 대중문화는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모순되어 충돌하는 지점이다. 아울러 대중문화는 단순히 강요된 문화일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내재되어 있는 장이기도 하다. 그람시는 대중들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문화 지배력을 헤게모니라고 불렀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어 체제유지에 이용하기 때문에 이를 분쇄해야 하고 여기에는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람시(1891-1937)가 살던 시대는 매스 미디어가 시작되기 전으로서, 그의 대중문화비판은 매스 미디어가 선도하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정치에 순응하는 대중과 문화에 대한 경고였다. 또한 문화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파시즘의 전략을 간파한 문화투쟁의 전략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면 영국에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학문이 등장하는데 이를 주도한 학자들은 호가트가 창설하고 스튜어트 홀이 주도한 버밍엄 학파라는 비판이론가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매스 미디어를 비판하였는데 이들 학파는 문화를 매우 일상적이고 광의의 영역으로 정의하였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이분법에서도 벗어났다. 엘리트주의적인 문화가 아니라 대중을 위한 문화가 더욱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영국의 문화연구학자들은 문화를 상부에 위치시키고 경제를 하부에 놓는 도식적인 막스주의에서 벗어나 문화의 중층적인 결정을 옹호한 알튀세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알튀세는 특히 국가나 군대, 매스 미디어와 같은 제도들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불렀는데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알튀세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 문화연구자들은 대중문화의 옹호론에도 기여했다. 문화연구의 주요한 테마 중의 하나는 매스 미디어 비판이었다. 특히 매스 미디어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해 세련된 분석을 내놓았다.

이후의 대중문화비판의 대상은 텔레비전이 된다. 텔레비전은 오락매체로서 대중의 비판능력을 약화시키고 체제에 순응하게 하며 대중의 수동성을 더욱 강화시킨다는 비판이다. 예를 들면 닐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에서 텔레비전은 뼛속까지 오락적인 매체로서 현대사회의 오락성을 주도한다고 비판한다. 포스트먼에 의하면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정보는 ’쓰레기‘들로서 오락적 방식으로 대중을 유인한다. 그는 문자문화를 옹호하는 보수적 학자로서 영상적 지각방식은 인쇄를 통한 지각방식에 철저하게 적대적이라고 본다( 『죽도록 즐기기』, 133).

대중문화에 대한 옹호론 역시 동시에 존재한다.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욕구와 소망의 산물이고 자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대중문화는 인간적 가치를 증진시키고 교육적으로도 좋은 효과를 창출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문화의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확산하고 문화의 민주화를 촉진하기도 한다. 대중문화는 예술가의 지위를 위협하기는커녕 오히려 창조적 예술가와 공연예술가들이 대중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문화산업은 예술가를 위한 정당한 지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중문화를 잘 이용한다면 매우 유용한 문화적 도약의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대중문화의 발달은 오늘날 전세계 국가가 목도하고 있는 현상으로서 대중들은 대중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레지스 드브레는 인류는 ‘그리스도 대신 헐리우드를 택했다’고 말하였다. 인간은 아마도 재미있는 것을 선호하는 본능적 성격이 있는 것 같다. 그 중심에는 매스 미디어가 주도하는 오락산업이 있다.

미디어로서의 연극

과거의 반연극주의와 오늘날의 대중문화에 대한 논쟁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쌍생아다. 이를 보면 연극을 왜 매체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모든 시대에는 매체에 대한 논쟁이 존재했고 특히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예외없이 이에 대한 비판론이 등장하였다. 오늘날의 모바일이나 소셜 미디어에 대한 비판 역시 그런 연속체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되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연극은 모든 서민들이 향수할 수는 없었지만 서민들을 위한 오락적 매체였다. 따라서 연극은 교양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라는 인식이 있었다. 반연극주의의 대부분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연극의 영향에 대한 편견에 기초한 측면도 있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우리는 현재적 관점에서 반연극주의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연극은 오늘날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컸고 문화적 환경이 달랐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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