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우리 국익의 관점으로 봐야“
“러시아를 우리 국익의 관점으로 봐야“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0.08.26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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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한국 외교에는 왜 러시아가 없을까?‘
엄청난 잠재력에 비해 실제 교류는 빈약
신간, '한국외교에는 왜 러시아가 없을까'(사진=도서출판 써네스트)
신간, '한국외교에는 왜 러시아가 없을까'(사진=우물이 있는 집)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서울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1988년 봄, 소련 일류신 화물기 조종사 2명이 이태원 호텔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상 최초로 소련 항공기를 몰고 한국 땅에 내린 이들에게 기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인터뷰 공세를 펼친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당시까지 국교가 없던 한국에 올림픽 기간 자국 선수들을 수송하기 위해 항공경로를 미리 답사할 목적으로 시험비행차 서울에 왔던 이들은 마시던 보드카가 떨어지자 호텔 근처 약국에서 알코올을 사다가 설탕과 섞어 마셨는데 하필 이게 유독성 메틸알코올이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역시 러시아는 독주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몇 달 후에는 소련이 전혀 다른 사건으로 한국을 흥분시켰다. 올림픽 문화축전의 일환으로 러시아 발레단이 내한공연을 가졌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글자 그대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기자는 1986년 일본 츠쿠바(筑波) 박람회를 취재하러 갔다가 소련관에 설치된 중형 스크린을 통해 말로만 듣던 러시아 무용수들의 눈부신 기량에 연신 감탄했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한편으론 혹시 누가(가령 한국의 정보요원)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신경 쓰면서. 그런데 그 적성국가 소련의 발레단이 서울에 와서 공연을 한다니! 그뿐인가. ’러시아 발레의 차르(황제)‘ 유리 그리고로비치(당시 볼쇼이 발레 총감독)까지 함께 내한, 온 문화계를 열광시켰던 것이다.

이런 흥분은 이후 몇몇 언론사와 공연기획사들이 러시아 음악이나 발레를 불러오면서 꾸준히, 때로는 격렬하게 증폭됐고 1990년말 한국과 소련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클래식 음악과 발레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B급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 발레가 결정적인 도약의 기회를 얻은 것도 물론 러시아 발레와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수교 30년이지만 아직은...

하지만 웬일인지 한국-소련,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한국-러시아 전반적 관계는 공산권 해체와 북방외교의 성과라는 국가적 흥분상태에 비해서는 그다지 극적이지 못했다. 그렇게 2020년 올해로 양국은 국교수립 30주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러시아를 제대로 챙겨볼 기회가 없었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광활한 국토, 유라시아 횡단열차와 보드카, 마트료시카 등 단편적인 정보와 이미지들을 제외하면 러시아는 사실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그동안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북방정책’, ‘철의 실크로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 거창한 수사를 내세웠고, 문재인 정부 역시 ‘신북방정책’과 ‘9개 다리(bridge)’ 전략이라는 대러시아 정책을 제시했지만 미국, 일본, 중국 등 다른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에 비해 러시아는 언제나 한발 뒤처진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나온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의 <한국 외교에는 왜 러시아가 없을까>(우물이 있는 집, 392쪽, 19,800원)를 ‘새로운 러시아’의 발견을 위한 필독서로 권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와 한국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판단에서 박 소장의 설파는 시작된다. 우리의 입장은 미국이나 중국, 서방세계, 일본 등과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는 중국의 시각으로, 오늘날에는 미국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볼 뿐 우리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보물창고와 다름없는 러시아를 아깝게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러시아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러시아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 실현을 위한 강력한 조력자이고 한국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한 석유, 가스 등 천연자원의 안정적 공급원이며 중국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21세기 번영의 대륙인 유라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 및 물류의 통로이며, 남-북-러 삼각협력의 파트너이자 북한 상황 급변시 건설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우군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정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기대해 볼 수 있다. 1990년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미국도, 유럽연합도 아닌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동의였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남북통일의 경우에도 러시아는 전략적, 경제적 이익을 고려했을 때 평화적인 방법이라면 남한 주도의 통일에 대해 호의적이다. 왜냐하면 1990년 수교 이래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철도, 가스 및 전력망 연결과 같은 메가 프로젝트와 남-북-러 삼각협력을 통한 러시아 극동지역 개발은 남북관계가 원만해야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통일한국의 등장이 자신의 안보를 위협하기보다는 극동지역에서 중국에 대한 상대적 열세를 상쇄해 줄 수 있는 견제세력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전략적 협력을 기대할 수 있는 파트너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반기술 분야인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자율주행, 블록체인, 양자암호화 개발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수학, 물리 등 기초과학이 발전한 러시아는 노벨상 자연과학부문 수상자가 14명이나 될 정도로 과학기술 수준이 매우 높다. 소련 해체 이후 1990년대 급격한 체제전환 과정에서 붕괴된 제조업 기반이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아 일반 생산기술에서 문제가 있는데, 이에 비해 한국은 수준 높은 노동력과 생산기술을 지니고 있다. 한국과 러시아는 거의 완벽한 상호보완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책 속으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을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시장점유율은 압도적이다. 초코파이로 유명한 오리온제과, 사발면 ‘도시락’으로 더 알려진 팔도라면, 그리고 롯데제과도 현지 공장을 세워 승승장구하고 있다. 롯데호텔의 경우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호텔을 열어 양호한 영업실적을 올리고 있고, 현대자동차는 2010년 현지 공장을 준공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솔라리스’ 모델은 러시아에서 국민차로 불릴 만큼 잘 팔린다. 그리고 CJ제일제당은 비비고 브랜드로 호평을 받고 있다. (p. 108)

김치냉장고에 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생산기술이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러시아로부터 탱크냉각 기술을 도입해 1995년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2008년 상용화된 휴대폰 통화 노이즈 제거 기술은 러시아의 통신기기 및 레이더 잡음 제거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어컨의 결로 방지 기술도 러시아 위성표면 처리기술을 응용한 것이다. 이 밖에도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 원천기술을 응용해 상업화에 성공한 예는 적지 않다. (p. 111-112)

러시아 연해주에 대한 농업협력 강화가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전후와 그 이후를 대비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면 우리 정부는 현지 진출 기업들을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연해주는 북한과 육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환경과 지형, 식생 등이 북한지역과 거의 같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영농경험은 향후 대북협력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다. (p. 211)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의 하나이며 한반도 정세뿐만 아니라 남북통일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강대국이다. 러시아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을 보면 마치 한국이 미국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는 한국이 가볍게 여겨도 되는 나라가 아니다. (p. 272)

한국 기업 중 인력난과 고임금에 시달려 생산원가 절감이 절실한 중소기업들이 극동 시베리아 지역내 ‘개성공단’을 조성하여 옮겨가고 여기에 북한 노동자들을 불러들여서 공장을 운영하여 러시아인들이 중국산에 의존하고 있는 저질의 일반 소비재를 양질의 우리 제품으로 대체하여 공급하게 되면 남북한과 러시아 모두 윈윈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제3국인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개성공단을 둘러싼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거의 없을 것이다. (p. 342-343)

저자 박병환 소장은

1956년 서울 태생으로 1975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1985년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부에 입부하여 1987-89년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과정을 이수했으며, 2005-07년 러시아 외교부 산하 외교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서 근무했으며, 특히 러시아에서는 4차에 걸쳐 약 11년간 근무했다. 2016년 말 주러시아 대사관 경제공사를 끝으로 퇴직하고 현재는 활발한 강의와 기고, 연구생활을 하고 있다. 공저서로 <시베리아 개발은 한민족의 손으로>(2009년, 국학자료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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