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해 있는 슬픔을 어떻게 하지?”
“도착해 있는 슬픔을 어떻게 하지?”
  • 이종찬 기자
  • 승인 2021.03.23 2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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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야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류미아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제공=
류미아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사진제공=서울셀렉션)

[더프리뷰=서울] 이종찬 기자 = 류미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가 서울셀렉션에서 나왔다. 슬픔의 근원으로 걸어들어가 따뜻한 위로와 성찰, 비움을 통해 충만함에 도달하는 시편들이다.

류미야 시인은 첫 시집 <눈먼 말의 해변>에서 자신의 삶과 언어가 걸어온 여정을 묵직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길어올렸다. 3년여 만에 출간한 이번 시집에서는 생의 슬픔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도착해 어떻게 서식하고 있는지를 맑고 뜨거운 언어로 그리고 있다.

아울러 단순한 슬픔의 발견에서 멈추지 않고 희노애락이라는 삶의 근원적 속성을 통찰하면서, ‘왜 슬픔이 찾아오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도착해 있는 슬픔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물음 속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또 투명한 슬픔을 길어올리는 이런 ‘안간힘’이야말로 어둠 가득한 지상의 삶에서 슬픔과 연대하며 가장 순수한 절망을 통해 영원의 빛 속으로 향하는 길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슬픔으로 슬픔을 건너기
“사랑할 만한 것들은/ 언제나 곁에 있고, 있었다./ 우리가 늘 잊고 또 잊었을 뿐.”이라 말하는 류미야 시인은, 회피나 절망이 아니라 생의 서늘한 복기와 갱신을 통한 슬픔의 정면 돌파를 예고한다. 그런 능동적 직면만이 빛의 세계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며, 냉혹한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대의 삶을 따뜻한 위로와 충만 속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의 아름다운 것들이 늦게 도착하는 것은 늦게 깨닫는 마음 때문이다. 시인은 기쁨의 반대말이 ‘슬픔’이 아니라 ‘희망을 믿지 않고 기쁨을 잊어버린 마음’임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의 평을 빌리면, 류미야는 “삶의 적막과 공허를 두 손으로 가만하게 감싸는 사랑의 언어”로 “시편들은 꽃핌과 낙화, 보름과 삭망 사이쯤에 놓여 있지만, 열매와 빛과 생의(生意)를 가꾸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류미야의 시편을 ‘슬픔에 대한 새로운 재배치’라고 평한 서윤후 시인은 해설에서 이 시집을 한번 완독한 후 끝에서 처음으로 반대로 읽어가기를 권한다. 그때쯤 비로소 우리의 슬픔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있고, 그 주소지를 먼저 다녀가며 물기 많은 손자국을 두고 간 시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슬픔으로 출렁이는 삶의 함정 속에서 스스로 지상의 ‘눈물점’을 찾아 애써 그 운명을 살아보는 시인의 깊고 따뜻한 영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추천의 글
시인은 미지의 감식가. 견자(見者)의 눈과 경청의 귀는 필참이다. 먼 길의 탐험이니 고독과 고통도 필수다. 오래된 양식을 밀고 가는 류미야 시인도 그런 자취가 역력하다. 정형시의 새로운 미학을 꿈꾸기 때문이다. 확장과 심화의 모색은 갱신의 성취로 이어진다. “물고기는 눈멀어 물을 본 적이 없네/ 그래야 흐를 수 있지/ 그렇게 날 수 있지”라고 되뇌듯, 무릇 도약은 아름답다. 눈이 멀더라도 날개가 타더라도 갈망은 비약의 자양이다. “왼편 심장 가까이 사연을 문지르”거나 “붉은 혀로 시간을 핥”는 여정을 골똘히 짚어내듯. 그래서 나비에게 건넨 ‘무혈의 전사(轉寫)’를 ‘무혈의 전사(戰士)’로도 읽게 된다. 시인 또한 붓의 전사를 마다치 않을지니. 이러한 시적 개진의 발화들이 널리 개화하길 기대한다. ‘오래된 미래’처럼 선취된 정형시의 오랜 새로움으로. 미지에 이마를 부딪는 당당한 외로움으로. (정수자 시조시인)

류미야 시인의 시는 삶의 적막과 공허를 두 손으로 가만하게 감싸는 사랑의 언어이다. 사랑의 간구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간절하겠는가. 시인의 시편들은 꽃핌과 낙화, 보름과 삭망 사이쯤에 놓여 있지만, 열매와 빛과 생의(生意)를 가꾸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류미야 시인의 시편들은 향상(向上)의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꽃대를 곧게 세우는 부드럽고 넓은 땅이 있듯이 시인의 짧은 시행의 미려(美麗)한 시는 큰 생각을 그 대지로 삼고 있다. 우주적인 시간도 그 대지요 모천(母川)이나, “어머니의 옛 궁(宮)”도 그 대지이다. (문태준 시인)

이번 시집에 실린 작품 몇 편을 읽어본다.

그래서 늦는 것들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그런 어떤 소멸만이 꽃을 피우나 봐요
사랑을 완성하는 것 물그림자에 비친
언제나 한발 늦고 마는
깨진 마음이듯이

철들고 물드는 건 아파 아름다워요
울음에서 울음으로
서로 젖는 매미들
제 몸을 벗은 날개로 영원 속으로 날아가요

폐허가 축조하는 눈부신 빛의 궁전
눈물에서 열매로
그늘에서 무늬로
계절이 깊어갈수록 훨훨
가벼워지네요


물고기자리

나는 눈물이 싫어 물고기가 되었네
폐부를 찌른들 범람할 수 없으니
슬픔의 거친 풍랑도 날 삼키지 못하리

달빛이
은화처럼 잘랑대는 가을밤
몸에 별이 돋아 날아오르는 물고기
거꾸로 박힌 비늘도 노(櫓) 되어 젓는

숨이 되는 물방울……
숨어 울기 좋은 방……
물고기는 눈멀어 물을 본 적이 없네
그래야 흐를 수 있지
그렇게 날 수 있지

생은 고해(苦海)라든가 마음이 쉬 밀물지는 내가 물고기였던 증거는 넘치지만, 슬픔에 익사 않으려면 자주 울어야 했네

맹목

세상 가장 앞뒤 없이 아름다운 말 있다면
눈앞 캄캄해지는 바로 이 말 아닐까
해와 달 눈부심 앞에 그만 눈이 멀듯이

큰 기쁨 깊은 사랑 크나큰 마음으로
아무것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눈멀어, 아주 한마디로 끝내주는 이 말

눈물점

내 왼쪽 눈 아래엔 점이 하나 있다
눈물이 많을 거라 누구는 빼라 하고
누구는 왼쪽 오른쪽 뜻도 다르다 한다

태생적 모반(母斑)으로 꿈틀거리는 역심
점 하나가 삼켜버릴 거대한 운명이라니!
샘 하나 품어주지 않는 자비 없는 생이라고?

먼지 풀썩거리며 살비듬이나 털다 가는
이 생에서 스스로 눈물마저 도려내면
예언은 실현되는 것,
나는 울어야 한다

마른 땅 휘적시는 몇 방울 이슬처럼
갈증의 한나절에 반역하기 위하여
냉담과 눈먼 증오를 애도하기 위하여는,

류미야 시인은 2015년 유심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2018년 공간시낭독회문학상, 2019년 올해의시조집상, 2020년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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