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세은의 에투알 승급이 특별한 이유
[칼럼] 박세은의 에투알 승급이 특별한 이유
  • 정옥희 무용평론가
  • 승인 2021.06.1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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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들의 계급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장면(사진=파리오페라 페이스북)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장면(사진=파리오페라발레단 페이스북)

[더프리뷰=서울] 정옥희 무용평론가 = 파리오페라발레단(POB)의 박세은이 에투알(étoile)로 승급했다는 소식이 연일 화제입니다. 박세은은 6월 10일(현지시간) 파리 바스티유 극장에서 열린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서 줄리엣 역으로 데뷔했는데, 공연 후 커튼 콜 도중 에투알로 공식 지명되었지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쏟으며 인사하던 그녀에게 많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국내 언론에선 “김연아의 세계 제패에 필적할 사건”이라고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더프리뷰 6월 11일자 기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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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알 지명 순간의 박세은

세계 정상급 발레단에서 한국인이 주역 무용수가 된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현재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김기민,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서희,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최영규,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강효정 등 여러 무용수들이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에투알이 된 것은 특별합니다. 외국인 단원이 5%에 불과한데다, 대부분 자매학교 출신인 단원들로 이루어진 자부심 강한 발레단에서 이룬 성취니까요. 이 글에선 발레의 종주국인 프랑스에서도 최고 발레단인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역사와 특징을 살펴보며, 에투알 승급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POB 단원들의 모습(출처=operadeparis.fr)

1669년에 설립된 파리오페라발레단(Ballet de l'Opéra national de Paris)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발레단으로 올해 352주년이 되었습니다. 흔히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의 발레 형태가 만들어진 것은 프랑스이며, 극장예술춤을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발레단이라는 형식은 파리오페라발레단이 최초입니다. 그렇다면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전 세계 발레단의 원형이라 할 수 있지요.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1669년 루이 14세는 오페라아카데미(L’Académie d'Opéra)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곧 왕립음악아카데미(L’Académie Royale de Musique)로 개칭되었고, 오늘날에는 파리오페라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오페라와 춤이 결합된 ‘오페라-발레(opéra-ballet)’라는 형식이 유행하면서 무대를 채울 군무 무용수가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1713년 남녀 각각 열 명으로 구성된 무용단을 신설하고 이들을 훈련시킬 왕립무용학교(École Royale de Danse)를 설립했습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시작점은 1713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리 오페라 극장 1925년의 모습
파리 오페라 극장 1925년의 모습

왕립기관으로 출발한 발레단과 학교는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민간기관이 되었다가 국립기관이 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1830년대에는 8세에 입학하여 18세에 졸업한 후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기초교육부터 심화교육까지 단계별로 진행하여 일관된 스타일의 프로페셔널 무용수로 키워내는 것이지요. 오늘날 파리오페라발레학교에선 매년 5월에 열리는 시험을 거쳐 20%의 학생이 낙제합니다. 또한 졸업생 중 5-20%만 발레단에 연수단원으로 입단하게 됩니다. 오랜 검증을 거친 제도에서 긴 경쟁을 뚫고 올라온 무용수들이니 최고라는 자부심이 강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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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오페라 발레스쿨에서 연습중인 어린 학생들(출처:POB 트위터)

학교부터 발레단까지 이어지는 연결성은 데필레(défilé du ballet)라는 행렬로 구현됩니다. 파리오페라만의 독특한 행사인 데필레는 매년 공연 시즌을 시작하며 발레학교의 어린 학생부터 발레단의 주역무용수까지 차곡차곡 걸어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공연입니다.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행진곡>에 맞춰 20분간 250여 명의 무용수가 끊임없이 등장하여 인사한 후 모두 한 무대에 서서 연출하는 장관은 그것이 하나의 정교하고 단단한 세계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아름다운 무용수가 아니라 무수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이들이며, 철저히 계급에 따라 한 줄 한 줄 등장합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무용수 등급은 카드리유(quadrille)-코리페(coryphée)-쉬제(sujet)-프르미에 당쇠르(premier danseur)-에투알(étoile)로 차곡차곡 올라갑니다. 일반 발레단에서 쓰는 용어인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솔리스트(soloist)-주역(principal)과는 사뭇 다르지요. 카드리유(quadrille)는 정단원 중 가장 낮은 등급으로 제1 카드리유(premier quadrille), 제2 카드리유(deuxième quadrille)로 나눠집니다. 정단원 아래에는 준단원(stagiaire, 연수생)이 있습니다.

팔레 가르니에 극장 내부(grand salon) 모습 (c)Eric Pouhier
팔레 가르니에 극장 내부(grand salon) 모습 (c)Eric Pouhier

오늘날 대부분의 발레단에서는 군무 무용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코르 드 발레’를 사용하지만 파리 오페라에선 이 말이 ‘발레의 몸체’ 즉 발레단 전체를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카드리유는 어디서 왔을까요? 원래 남녀 네 커플이 추는 사교춤으로 18세기에 유행했습니다. 남녀 커플 무용수들이 주로 짝수로 추는 춤이라는 의미에서 확대되어 군무를 지칭하게 된 것이지요. 코리페는 군무의 리더로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코러스의 리더를 지칭하는 koriphaius에서 왔습니다. 쉬제는 ‘주어’ 또는 ‘주체’ 즉 이야기의 주인공을 뜻하지만 파리오페라발레에선 솔리스트급이지요. 프티 쉬제(petit sujet), 그랑 쉬제(grand sujet)로 나뉩니다. 프르미에 당쇠르는 제1무용수라 번역할 수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 first dancer라고 하면 솔리스트이지만 여기에선 주역무용수에 가깝습니다.

복잡한 등급은 11월마다 열리는 연례 승급심사(concours de promotion)를 통해 결정됩니다. 1860년 마리 탈리오니를 포함한 파리오페라발레학교 교사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제도로, 심사에 지원한 무용수는 무대 위에서 11명의 심사위원과 일반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개의 베리에이션을 선보여야 합니다. 이를 통해 무용수들은 카드리유, 코리페, 쉬제, 프르미에 당쇠르로 차곡차곡 올라갑니다. 하지만 가장 꼭대기에 있는 에투알은 시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명됩니다. 공식적인 경쟁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모호한 과정을 통해 지명된다는 점에서 에투알의 차별성이 극대화됩니다.

POB의 전설적 에투알이었던 아녜스 레테스튀(c)Jacques Moatti(출처:operadeparis.fr)
POB의 전설적 에투알이었던 아녜스 르테스튀(c)Jacques Moatti(출처:operadeparis.fr)

에투알은 별, 즉 ‘스타’를 뜻합니다. 1940년대부터 공식 직급으로 사용되었지요. 남녀 무용수 각각 8명 내외로 유지되는데 일반적으론 프르미에 당쇠르로서 주역 배역을 몇 년 한 후 에투알로 지정됩니다. 파리오페라발레는 모든 무용수가 42세에 은퇴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니 경우에 따라선 몇 년 밖에 활동을 못할 수도 있지요. 에투알은 언제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지정할지 모른다는 게 묘미입니다. 때론 2주 간격으로 지정되기도 하고 때론 몇 년간 소식이 없기도 합니다. 에투알 지정을 내부적인 인사제도가 아니라 공연 후 무대 위에서 선포하는 방식은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예술감독이었던 루돌프 누레예프가 만들었습니다. 공연을 보러갈 때마다 잭팟이 터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니, 예측하지 못한 타이밍에 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습중인 박세은과 폴 마르크(출처:POB 페이스북)
연습중인 박세은과 폴 마르크(출처:POB 페이스북)

에투알은 그저 테크닉이 좋은 무용수가 아닙니다. 전체 작품을 이끌어가는 안정된 기량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깊은 감동을 선사할 표현력과 예술성도 지녀야 합니다. 최고의 등급인 만큼 모든 무용수를 압도하고 관객을 숨죽이게 할 개성과 매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투알은 테크니션을 뛰어넘어 예술가가 되었다는 인정입니다. 승급심사가 아무리 면밀하다 하더라도 이를 담아내긴 어렵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박세은의 에투알 승급은 우아하고 유려한 춤으로 깊은 여운을 남겨온 그녀에 대한 정중한 인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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