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바비레따’ 열 번째 계절
[기고] ‘바비레따’ 열 번째 계절
  • 장은정
  • 승인 2021.12.16 10: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이 늘 계속되기를

[더프리뷰=서울] 장은정 안무가 = 2012년 1월 10일 아르코예술극장 3층 스튜디오 ‘다락’. 매서운 추위와 그보다 더한 긴장감으로 우리는 정신없이 떨고 있었다.

생전 처음 만나는 공간, 생전 처음 해보는 공연의 형태로 관객을 기다리던 우리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에 서서 초조하게 막 한 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겨울바람은 시리고 차갑게 불어오고 있었다. 

아트플랫폼 야외무대 (제공=
아트플랫폼 야외무대 (제공=장은정)

그 날 그 순간의 떨림이 아직도 몸과 마음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우리는 어느덧 10년의 세월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공연을 이어오며 2021년의 마지막 날 다시 관객들을 기다리려고 한다. 

생각보다 앞선 화려한 움직임으로 많은 선배 안무가들의 작업에 무용수로 참여하고, 과작이지만 꾸준히 개인 작업을 이어오던 2000년대 초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무용의 대중화라는 말이 무용가들 사이에서 화두가 되었고 소통, 교감이라는 말 또한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있던 시절, 나의 고민은 어쩌면 그 어디쯤에서 시작되었었던 것 같다.

ㅇ
어린이 관객과 소통과 교감하는 과정 (제공=장은정)

네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공연 전에는 마치 숙제검사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혼나지 않을까 불안에 떨며 작품을 보여드리고 선생님께서 체크해주신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보여드리고를 반복하며 혼란에 빠지곤 하였다. 

극장에 가면 온통 화려함으로 치장한 무용가들이 마치 가족모임이라도 하듯 떼 지어 몰려다녔고 작품이 끝날 때마다 괴성을 지르곤 하던 어린 관객들은 썰물처럼 극장을 빠져나갔다. 막이 오르면 아... 이 작품의 견적은 얼마겠구나를 생각하며 나도 언제쯤 저만한 예산으로 작업을 해볼까 부러움과 질투와 냉소 가득한 시선을 보내곤 하였다.

그러다 문득 이건 내가 아니야. 내 생각이 아니야. 아바타가 될 순 없지. 자각하기 시작했고 나만의 꿈을 꾸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고답적 예술의 가치를 모르는 바 아니고 훌륭한 선생님들, 선배님들께 작업자로서의 덕목에 대해 깊이 배운 바 있었지만 어쩐지 그것이 다인 것 같지만은 않다는 고민으로 이후 나는 또래의 많은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러기를 5-6년 마음 맞는 몇몇 동료들과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생일도 똑같은 친구 최지연, 오랜 시간 함께 작업했던 후배 김혜숙, 친구처럼 많은 것을 나누었던 후배 최경실, 그리고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강애심 배우님, 그룹 공명의 일원이었던 타악주자 조민수님,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라는 너무나 멋진 제명을 주신 맘통합심리상담센터의 장정희 작가님이 바로 그들이다.

관객과 함께하는 야외무대 (제공=장은정)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만났고 얘기했고 함께 기대했다. 그동안 알고 있던 것 말고 분명히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몇몇 그룹을 섭외하여 워크숍을 진행했고 사람들을 만나 함께 얘기하고 울고 웃고 춤추며 서서히 안개가 걷히듯 어떤 길을 보기 시작하였다.

2011년 제10회를 맞이한 춘천아트페스티벌의 최웅집, 장승헌 대표님의 응원에 힘입어 춘천의 여인들과 함께 20분 남짓의 <당신은 지금 봄내에 살고 있군요>가 탄생되었고 이 만남이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

춘천으로 향하는 주말은 늘 설렘으로 가득했고 그녀들과 함께 춤추며 춤의 초심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국내 유수의 무용단들 틈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그녀들의 날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통해 오히려 어떻게 춤 출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고, 춤추는 아내, 춤추는 엄마를 놀라움으로 지켜보던 그들의 가족들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제공=장은정)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장은정)

그렇게 우리는 그 만남을 통해 얼마쯤의 자신감을 얻었고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으며, 경실은 최보결의 춤의학교를 이끌며 많은 사람들과 힐링의 춤을 나누고 있다.

다시 워크숍을 진행하며 이듬해 공연장소를 찾던 우리는 또 한 번 운명 같은 만남을 통해 아르코 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 이라는 공간을 접하게 된다.

2014년도 다락
2014년도 스튜디오 '다락'에서 진행한 공연 장면 (제공=장은정)

2007년 아르코예술극장 극장장이셨던 최용훈 연출님이 만드신 ‘다락’은 원래 연습실의 기능을 목적으로 한 스튜디오 공간이었는데 관객과의 벽을 허물고 눈을 맞추고 함께 얘기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우리에게 최적의 공간이었다. 마치 옛날 나만의 비밀 공간 같았던 다락방이나 옥탑방을 연상시키는 그 곳은 마치 마법의 공간이 펼쳐지듯 관객들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었고 우리는 옥상 마당에서 관객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첫 일주일의 공연은 우리들의 기우를 비웃듯 성공적이었고 입소문을 탄 때문인지 입장 인원을 제한해야 할 정도가 되어 극장에서도 놀라는 반응을 보여주게 되었다. 

프로젝트 초기 40대 중반이었던 우리는 모르는 얘기 하지 말고 또래 친구들이 사우나에 앉아 달걀 까먹으며 수다 떠는 기분으로 작업 해보자는 것이었고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를 화두삼아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보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출연자들의 솔직한 이야기에 관객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들이 쏟아내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에 함께 눈물 흘리고 서로를 토닥여주었다.

2014
2014년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장은정)

이후 공연예술센터와의 공동기획,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민참여형 예술프로젝트, 신나는 예술여행사업,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방방곡곡사업, 문화가 있는 날 직장문화배달사업에 선정됨과 동시에 강동아트센터, 인천아트 플랫폼, 창무국제무용제 등에 초청되어 공연장은 물론 전국 각지의 다양한 장소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관객들과 함께 춤으로 소통하고 그들에게서 생생한 에너지와 삶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있다.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장은정)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장은정)

50대 중반이 되어 <바비레따, 열 번째 계절>을 맞은 오늘 생각해본다.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멀리 춤과 나눔의 순기능을 스며들게 해보자는 꿈을 꾸며 우리 10년은 해보자 의기투합했던 그 날, 정말로 10년을 하게 될지는 몰랐었다. 한 번이 다음을 이어주고 다음이 그 다음을 이어주는 기적 같은 시간들과 만남 속에서 한 해도 같은 버전을 공연하지 않고 늘 공간과 대상에 맞는 버전을 준비하며 각자의 장르가 가진 작업의 특성상 과정의 지난함은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얼굴 붉히지 않고 함께하고 있는 바비레따는 현재진행형이다.

 

3년이 되던 해, 관객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에 몰입되어 몸도 마음도 너무나 아팠고 그만 해야겠다 생각한 적도 있었으며, 초기 무용계 어른들로부터 힐난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혹자는 “또 하니?”라는 말로 뜨악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왔다. 때로는 서로를 불편해하기도, 때로는 살짝 미워하기도 했지만 10년을 함께한 지금 이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일의 가능성과 가치를... 그리고 그것은 나의 바비레따와 바비레따의 사람들이 가르쳐 주었음을...

(제공=장은정)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장은정)

새로운 문명에 접어든 오늘, 손을 맞잡고 안아주며 뜨겁게 춤추던 소중한 기억들을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을 찾아가는 준비를 하며 힘들고 아픈 팬데믹의 시간을 살아내고 견뎌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자기돌봄과 자기다움을 찾는 바비레따로 초대하고 싶다.

(제공=장은정)
공연 장면 중 일부 (제공=장은정)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연대하는 것만이 우리를 우리로서 존재하게 할 수 있음을 믿어본다.
여러분~~ 당신은~~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습니다~~

(바비레따란 러시아에서 늦여름에서 초가을 무렵의 계절을 뜻한다. 이때 날씨가 얼마나 화창하고 정열적으로 뜨겁고 화려한지, 오히려 진짜 여름보다 더 아름다운 날씨로, 젊었을 때보다 더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중년여성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