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
[공연리뷰]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
  • 이용숙 공연평론가
  • 승인 2021.12.2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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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서사보다 감동적인 실패의 서사”

[더프리뷰=서울] 이용숙 공연평론가 = 국립극장의 3개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다 함께 참여한 창극 <명색이 아프레걸>이 지난 12월 1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고연옥 극본, 나실인 작곡, 김광보 연출로 올해 1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원래 한 달간 공연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상황 때문에 아쉽게도 단 5회 공연했다. 소극장 버전에서 대극장 버전으로 몸집이 커진 이번 공연에는 초연의 두 배인 총 75명이 출연한다. 여섯 명이었던 초연 무용수는 22명으로 늘었고, 음악은 소규모 실내악 편성에서 국악관현악단 22명에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을 더한 26인조 편성으로 커졌다.

고연옥, 나실인, 김광보는 2019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초연한 <극장 앞 독립군>에서도 호흡을 맞춰, 연극과 극장의 의미를 홍범도 장군의 인생에 결합한 일종의 메타극을 창조했다. 이 세 예술가가 이번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의 삶과 그가 만든 영화 <미망인>을 교차 편집하는 방식으로 실패의 서사가 성공의 서사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프레걸-자신이 만든 영화 간판 앞에 선 박남옥 감독 (사진제공=국립극장)
'아프레걸'-자신이 만든 영화 간판 앞에 선 박남옥(국립창극단 이소연扮) (사진제공=국립극장)

작품 제목에 쓰인 ‘아프레걸(après-girl)’은 한국전쟁 이후에 출현한 새 시대의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봉건적 사회구조와 관습에 얽매인 전통적 여성상을 포기하고 사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 했던 이들을 일컫는다. 작가 고연옥의 가사 속에서 이들은 “망한 줄도 모르는 망한 세상에 선전포고”를 하며 “이러다 우리만 쫄딱 망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지만, 명색이 아프레걸이라면!”이라며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전진하는 여성들이다.

촌철살인으로 가득한 고연옥 대본의 흡인력은 공연시간 100분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르게 했고, 관객을 쉴 새 없이 웃기고 울렸다. 시대를 앞서간 박남옥이라는 실존인물은 사실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비범하고 독특한 존재였지만, 작가 고연옥은 이 인물의 욕망과 좌절과 상실을 관객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로 공감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 공감에는 남녀의 구분도 연령의 차이도 없었다. 좌절의 굽이굽이를 겪어낸 주인공이 마침내 ‘무거운 꿈’을 투포환처럼 던져버리며 “잘 가라, 내 무거운 꿈이여”라고 외칠 때 관객은 음악극에서 대본의 비중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아프레걸-달리기와 투포환 선수였던 박남옥 감독의 학창시절 (사진제공=국립극장)
달리기와 투포환 선수였던 박남옥의 학창시절 회상장면 (사진제공=국립극장)

최초의 여성감독 영화 <미망인> 촬영 장면을 액자극으로 표현

막이 열리면 높이 솟구치는 파도를 배경으로 바닷가에서 춤추는 무용수들이 보인다. 안무가 이경은은 “세파에 흔들리는 인간 군상들, 풍랑에서 헤쳐 나와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도전하는 인간상’”이라고 이 도입부의 안무 의도를 설명했다. 그리고 국도극장, 오복식육센터 등의 간판이 보이는 50년대 서울 종로거리 풍경이 LED 영상으로 펼쳐진다.

영화판에서 일하며 ‘박군’으로 불리던 박남옥은 출산한 지 사흘 만에 영화를 보러 나왔다가 오랜만에 영화판 동료들을 만난다. 한국전쟁도 끝났으니 50만 명에 달하는 전쟁미망인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오자 박남옥은 그 영화를 자신이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극 초반에 극중 영화배우들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하나하나 신명나게 소개된다.

친언니에게서 투자받은 돈으로 자신의 집에 세트를 짓고 일본에서 온 촬영기사 김영준을 소개받은 박남옥은 갓난아기 딸을 업은 채 촬영장에서 ‘레디 고!’를 외친다. 몰려드는 구경꾼들을 막고 배우들과 스태프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까지 모두 혼자서 해내며 죽을 힘을 다해 촬영을 마치지만, 영화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흘 만에 극장에서 내려진다.

아프레걸-영화 미망인 촬영 장면. 미망인과 연인 (사진제공=국립극장)
영화 '미망인' 촬영 장면. (사진제공=국립극장)

 

이 극에 등장하는 영화 <미망인> 속의 장면들은 바로 박남옥이 촬영 중인 장면들이다. 실제 박남옥의 영화에서는 전반적인 사건 진행이 느린 편이지만, 무대 위 액자극으로 짧게 압축된 장면들은 속도감이 있으면서도 영화 속 각 에피소드의 핵심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의 미망인 여주인공 역은 기혼 여성을 ‘현모양처 아니면 자유부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구분했던 당대의 남성중심적 시각을 벗어나 여성감독 박남옥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려졌다. 박남옥 자신이 그러했듯 이 여주인공 역시 상실과 좌절과 욕망의 주체로 묘사된 것이다. 박남옥 감독이 자기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어 했던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신재와의 우정을 표현한 장면에서도 전쟁미망인인 김신재의 삶을 바라보는 동일한 시선이 드러난다.

연출가 김광보는 무대를 위아래로 나눠 위쪽 공간에서는 박남옥의 인생 여정을, 아래쪽 공간에서는 박남옥이 제작하고 있는 영화 <미망인>의 촬영 현장을 보여주었다. 위쪽 무대에는 현실의 비율을 뛰어넘는 거대한 창문과 가구들이 있어 그 무대가 회상의 공간 또는 꿈과 환상의 공간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채롭고 세련된 영상과 세심한 의상, 적절한 소품과 분장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감각과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 무대였다.

흡인력 강한 대본과 음악, 설득력 있는 연출과 안무

작곡가 나실인은 오페라 <나비의 꿈> <블랙리코더> <빨간바지> <춘향탈옥>, 음악극 <극장 앞 독립군> 등으로 매 작품마다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귀에 수월하게 꽂히는 음악으로 관객들을 만족시켜왔다. 학창시절에 달리기 선수이자 투포환 분야의 국내 신기록 보유자였던 박남옥을 떠올리며 나실인은 상행하는 네 음으로 박남옥의 음악적 주제를 시작했다. 투포환의 무거운 쇠공을 던지는 이미지, 꿈을 향해 달리는 이미지를 염두에 둔 작곡이라고 한다. “꿈을 성취하고 성공을 이루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꿈을 위해 걸어야 했던 굽이굽이 펼쳐진 길, 그 길 위에서 흘린 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겨우 한 걸음 나아간 것입니다.”

아프레걸-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박남옥 (사진제공=국립극장)
'아프레걸'-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박남옥(국립창극단 이소연扮) (사진제공=국립극장)

극의 배경인 50년대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국악기와 양악기를 조합해 독특한 효과로 구현된다. ‘투포환처럼 던져 버릴 수도 없는 아기’를 노래할 때 삶의 무거운 짐을 표현한 피아노, ‘당신이란 영화’ 부분의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리듬 등은 특히 효과적이었다.

<심청가>나 <수궁가>처럼 판소리 작품을 토대로 한 창극들에 비하면 이번 작품의 가창은 판소리 특유의 깊고 걸쭉한 소리를 상당히 절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날 공연을 본 관객들 다수는 오페라나 뮤지컬 가수들과는 다른 국립창극단원들의 음색에 특별히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작곡가가 직접 지휘한 국립국악관현악단은 매 장면의 의미를 탄탄하게 받쳐주며 작곡가의 의도를 명징하게 전달했다.

대본과 음악, 연출과 안무가 빈틈없이 맞물려 감동을 자아낸 장면도 많았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인 박남옥과 김신재의 이중창, 완행열차를 잘못 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박남옥과 “감독님, 빨리 돌아오세요!”를 외치는 김영준의 간절한 음성, 동반자살한 윤심덕과 김우진의 등장 등도 인상적이었다. 물, 짐(삶의 무게), 거울을 키워드로 한 국립무용단의 춤이 은유와 상징을 품고 모든 장면에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대본과 음악의 해학성에 상응하는 유머러스한 안무도 눈에 띄었다. 각 배역이 적역이었고 연기 호흡도 뛰어났지만 박남옥 역을 노래한 이소연, 김신재 역의 김지숙, 미망인 배우 이민자 역의 김미진, 미망인의 연인 역 이택균을 맡은 김수인, 촬영기사 김영준 역의 이광복 등이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연령층이 젊은 관객들이 대부분이었고, 공연 뒤 인터뷰에 응한 관객들은 “재미와 감동이 함께한 작품” “구구절절이 마음에 꽂히는 강렬한 대본” “이해하기 쉽고 흥이 넘치는 음악” “경쾌하고 활력 있는 안무” “아름답고 세련된 무대” 등을 장점으로 꼽으며 만족을 표했다. 국립극장의 기획력과 단체 간 협업의 힘이 돋보인 무대였다.

1월 공연 때 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인 만큼 재공연을 기다리고 있던 관객이 많아, 이달 말일까지 이어지는 공연은 이미 좌석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이다. 박남옥의 영화 <미망인>을 미리 유튜브로 보고 가면,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어떻게 무대화되었는가를 비교하며 관극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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