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Welcome to 안은미’s World - ‘드래곤즈’
[공연리뷰] Welcome to 안은미’s World - ‘드래곤즈’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3.22 16: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더프리뷰=부산] 하영신 무용평론가 = (재)부산문화회관과 파리시립극장(Théâtre de la Ville), 리옹댄스비엔날레(Biennale de la Danse de Lyon), 웨이우잉-카오슝국립예술센터(衛武營國家藝術文化中心) 등 유럽과 아시아 예술거점들의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진 우리 시대의 문제적 춤작가 안은미의 <드래곤즈>가 2021년도 유럽 7개국 8개 도시를 경유하여 지난 3월 4일과 5일 부산문화회관에서 펼쳐졌다.

왜 ‘용’인가?

예술의 양 극단은 ‘여흥’과 ‘존재론’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이데올로기가 완결 불가능한 ‘지향’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예술작품을 나누는 가르마도 잠정적일 뿐이다. 여흥은 그저 단순한 오락거리일 수도 있지만, 현대적 일상이 억압한 감각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세계를 다시 통각하게 한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존재론이기를 작정한 작품 역시 어떤 위험(자신의 작정에 못 미치거나 혹은 매몰되는)을 소지한다. 너무 개인적인 구도(求道) 그리하여 불특정다수 관객들에게 동의 불가한 무엇이라면 그건 개인의 여흥에 다름없다. 여흥과 사유 간 가치의 무게를 저울질할 필요는 없다. 최종적으로 오락물이라고 판독 가능한 예술작품에게도 존재의 이유는 충분하다. 관객에게는 사유 없이 시간을 소비하거나 쾌락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잘 건축되었다면 예술작품은 그 양단 사이 어디쯤에서 유일무이한 무엇이다. 감각과 사유의 구성적 밸런스는 작품 나름이고, 현대미학의 방법론은 비례와 정합을 뒤틀기도 한다. 숨겨서 드러내고, 감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사유의 계기를 촉발하기도 한다. 게다가 감응은 작품을 겪는 자의 상태와도 결부되니, 복잡계도 이런 복잡계가 없다. 무수한 해석과 입장만이 있을 뿐, 오늘날 예술이 내세울 수 있는 기치는 ‘다양성’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성’은 자유를 바탕으로 하여 서식한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자유, 무엇을 제작해도 좋은 자유. 그러나 자유와 방종의 경계를 그어야 모두의 일상이 확보되듯, 예술에게도 ‘왜?’를 물어야 할 순간이 있다. 특히나 공적자금으로 만들어지는 공연예술작품에게는. 왜 이 창작의 기회가 다른 것을 말하는 작품들이 아닌 바로 이 작품에 수여되었는지를. 그러니까 왜, 지금, ‘용’인가?

우리 시대의 춤지형, 안은미의 고유한 위도와 경도

동시대에 새로이 출현한 현재적 미학관을 담지한 무용예술을 일컫는 컨템퍼러리댄스의 두 가지 키워드는 ‘해체’와 ‘융복합’이다. 반대급부일 성 싶은 두 단어지만 그 함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다. 춤작품을 성립시키던 문법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의미연관체계로 빚어진 동시대적 감성의 춤 만들기. ‘해체’는 어차피 ‘새로움’에 도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새로이 발생한 조어(造語) ‘융복합’의 의미에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복합’이 아닌 ‘융복합’, 여러 요소들이 녹아 새로운 하나로 합쳐지는 것.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새로움에의 추구는 결국 과거에 결부된 작용이거나 반작용이다. 무용예술사를 참조하자면 컨템퍼러리댄스는 일체의 스펙터클을 부정하고 오로지 움직임(movement)만을 추구하겠다는 강령을 세우고 실천한 뉴욕의 동인그룹(Judson Group. 미국의 평론가 샐리 베인즈 Sally Banes가 이들의 활동을 ‘포스트모던댄스’라 명칭한 것에는 재고의 여지가 다분하다. 이들의 예술의지는 사실 ‘빼기(-)의 역사’로 총괄되곤 하는, 장르를 독립시키고 매체적 본질을 추구하던 모더니즘적 활동으로 판명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특정 강령을 추구하는 일군의 지엽적 예술활동에 시대를 포괄하는 개념을 징표한 것 역시 적절치 않다.)에 대한 반작용이라 살필 수 있다. 무용예술작품은 본디 종합예술이었다. 움직임만으로 축소된 작품의 총체성을 살려내고자 하는 경향이 본디 무용예술의 발생지였던 서유럽으로부터 발기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지배적 무용사관은 다시 확인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지금의 총체화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협업하는 각 장르가 시절을 진행해왔고, 그 병합의 방식 역시 과거의 방법과는 다르다. 고대의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나 중세의 ‘막간의 춤’(오페라나 연극 사이에 배치된 장식적 춤) 혹은 미술과 음악과 서사의 안정적인 틀거리로 만들어지는 근대의 무용예술작품들과는 다른 지점에서 컨템퍼러리댄스의 특질들은 빚어지고 있다.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서사로 견인되지 않는 컨템퍼러리댄스 작품은 작가가 창출하는 창조적 시공간이다. 실체적 세계로부터 베어낸 세계관적 주조(鑄造)이거나 현행적 세계의 간극으로부터 출현하는 실재(the Real, 무의식적 충동)를 구현하는, 컨템퍼러리댄스가 그 미학관을 충족할 때 미술(장치며 오브제며 조명 그리고 새로 합류한 영상)과 음악은 그 자신의 매체성으로 고유한 작품세계의 특유하고 구체적인 물질성(corporeality)을 구축한다. 컬래버레이션하는 모든 장르는 주체적이다.

그러나 칸트의 말처럼 우리의 인식은 범주화(categorization)의 형식을 벗어나 단독적일 수는 없다. ‘컨템퍼러리댄스’는 결국 ‘춤’이다. 협업하는 모든 장르의 주체적 총합으로서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주관자는 안무가. 안무가로서의 작가는 춤으로 말하는 자이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춤작가들이 협업의 과정에서 춤적 줏대를 잃고 종국엔 춤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작품을 만들거나 혹은 타장르로 종속되는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정교하고 강력한 몸성의 춤을 구가했던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나 빔 반데케이부스(Wim Vandekeybus)의 실험적 미학 여정에서 볼 수 있듯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설치미술이나 영화로의 친연성으로 기울며 춤적 소실을 우려하게도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안은미의 특이성이 발견된다. 현대적 감성의 타장르들이 총망라하는 가운데서도 ‘육덕’진, 안은미표 춤의 장악력. 특유하고 강렬한 몸성을 지닌 그녀의 작품들.

안은미라는 특별한 고유명사

안은미의 춤은 고유하고 특별하다. 그녀의 춤은 춤의 구문(構文) 밖에서 발생한다. 발레도, 모던댄스도, 그 어떤 전통춤도 참조되지 않는다. 무용수가 아닌 자들의 몸짓을 취하고(땐스 삼부작(2015); 청소년을 모티브로 한 〈사심없는 땐쓰〉, 중년 남성들을 모티브로 한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 할머니들을 모티브로 한 〈조상님을 위한 땐쓰〉),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월경(越境)함으로써(〈大心땐쓰〉(2017), 〈굿모닝 에브리바디〉(2018)) 안은미는 기존하던 춤의 지평을 흔들고 그 균열 사이로 그 자신의 질감으로서의 춤을 출현시킨다. 스스로 호명한 바, ‘댄스’의 규격과는 다른 ‘땐스’, ‘막춤’적 질감의 춤. 전통(클래식발레)으로부터 전위(농당스)에로까지 포용력 넓은 프랑스 파리(2015년)에서조차 열렬한 호응을 성취해낼 정도로 진취적이면서도 완결적인 새로움. 그런데 그 새로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용사에, 예술사에 그리고 우리의 일상사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왜 ‘용’인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주지하다시피 이번 작품의 모티브는 ‘용’이다. 실재하지 않음으로써 미래지향적이라 여겨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위한 환유. ‘용’은 목적이기도 하다. 70여 분간의 작품은 집요하리만치 내내 용적(龍的)인 이미지들을, 그 이미지들만이 서식 가능할 법한 판타지적 세계를 창출해내고 있다. 그 이미지와 세계가 직조되는 방식은 파편적이고 충돌적,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진) 안은미스러운 방식으로 용이주도한 완결성을 갖는다. 민머리와 큼직한 장신구들, 저고리를 탈의한 한복치마 차림, 짝짝이 양말, 보색과 메탈릭한 소재와 스팽글, 안은미의 시그니처. 이 세계의 의미연관체계에서 벗어난 안은미적인 것들이 작열하는 안은미 월드.

그 세계에서 한국·일본·대만·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5개국에서 차출된 용띠생 무용수들이 안은미적 소여(所與)로 산화한다. 전통춤의 동작구와 의상이 현란하게 재해석되고 성별과 의복이 어긋나고(애초에 인간의 성별은 의미가 없고)… 갖가지 콜라주로 연출되는 상상적 도상(圖像)들이 현실세계로서는 용이하지 않거나 그에 내속하는 의미로부터 탈각한 행위들을 수행하면서, 주체들이 해체된다. 작품의 중간 어디께에서 무용수들은 그 자신의 이름과 국적, 춤의 이력을 말함으로써(그 번역된 자막으로써) 기표(記標)되지만 그것은 간신히 남은 흔적에 불과할 뿐이다. 작품의 전(全)시간을 경과하고도 왜 이들이 다국적과 용띠생으로 특정되어야 했는지 그 내적 논리와 효과를 간파할 수는 없었으니, 이는 다만 패셔너블하나 의미는 소실한 텅 빈 수사(修辭)라 말해도 좋지 않은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더욱이 이 작품에서 안은미적 소산(所産)들은 홀로그램이 사출하는 찬란한 세계에 거한다. 미래적 미감을 제공하는 홀로그래피는 너무도 생생한 나머지 실상을 초과해버리거나(꽃밭), 인간으로서는 거처할 수 없는 공간(물속, 비눗방울 내부)에 무용수들을 위치시키거나, 환상적 이미지의 충천으로 신화와 우주적 공간을 펼침으로써 작품의 가상성을 한껏 증폭시킨다. 아예 홀로그램 주체도 산출해내었는데 그 가상무용수들의 가상적으로 연출된 무용수들과의 ‘춤적’ 연동이 능히 ‘춤적’이기조차 하니, 춤 밖의 무수한 것들을 다루어 작품을 만드는 안은미의 춤작가로서의 역량이 출중한 것만은 인정할만하다.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그렇지만 지속하는 질문들

이 휘황찬란한 세계의 제작자 안은미. 실제로 작품 안에서 이 세계의 작인(作人)으로서의 연행을 수행하는 그녀는 시간과 공간과 주체라는 지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현행적 세계의 근원들을 분해하여 특유의 색과 형으로 재조립해낸다. 그녀의 방식으로 빚어진 그 세계의 흐름은 혹은 그 세계 속 주체들의 몸짓은 이 세상 어법상으로는 맥락을 이루지 못한다. ‘물’ ‘사랑’ ‘감격함’ ‘고수하다’ ‘따뜻함’ ‘자유’ ‘보다 나은’ ‘열정’ ‘감사하는’ ‘영원한’ ‘멈출 수 없는’ 등 작품의 종국에서 명멸하는 단어들이 그 자체 하나하나로는 충일하다 한들 그 어떠한 문장으로 완결될 수 없듯이.

어쩌면 이것이 생의 구조다. 그 순간만의 진실이 있을 뿐 혹은 자족적인 진실만이 있을 뿐, 생애 전체나 그에 관여한 모두를 관통하는 진실이란 성취될 리 만무한 허위. 그러나 허위의 나열이나 허상의 도열만으로 작품은 충족 가능한가? 현대미학이 표상하지 않는 것들은 미처 표상되지 못하는 무수한 것들을 함축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가 의식 아래의 무의식을 지시하여 이성중심주의가 빚어낸 문명에의 반성을 고대하듯, 해석을 기다리는 작품이 소통 가능한 작품이다.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드래곤즈' 공연 장면 (c)옥상훈(제공=(재)부산문화회관)

‘안은미’s 월드’ <드래곤즈> 세계의 품위(品位)들은 빛과 형과 에너지 그 존재적 장력(壯力)이 다부지다. 그 주도면밀한 작위(作爲)는 한 시대를 풍미한 초현실주의의 표면과 닮아있다. 그러나 춤은 곧 운동이니 자력을 강행하는, 더군다나 빈틈없이 휘몰아치는 안은미의 세계는 이 시절 오락물의 폭력성도 지녔다. 관객의 주관(主觀)을 정지시키고 세계와의 연관을 떨군, 현실세계의 무덤 같은 그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알레고리라고 하기엔 이 세계와의 접점이 없고, 해탈의 경지라고 하기엔 감각적 소여가 너무도 비비드한. 불량식품, B급영화, 키치, 스펙터클 등의 어휘들을 호출하고 그것의 결여적 측면을 환기시키는 강렬한 감각들의 향연. 모든 게 미감적 대상이 되고 상품도 되는 이 물신주의의 시대를 살면서 끝끝내 ‘왜 지금 용인가?’라는 질문을 생략할 수 없다면 너무도 고루한가? 소통은 공연예술의 본령이다. 바이러스와의 사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실전, 그리고 뜨거웠던 선거전. 2022, 3월, 용이 오기엔 날이 좋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