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허경미무용단-무무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리뷰] 허경미무용단-무무 ‘그리하여 능청이다’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9.1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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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지난 8월 25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는 지역 창작춤 씬을 이끌고 있는 허경미의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가 펼쳐졌다. 양가(兩價)적 감응에 휘말린다. 병신춤의 정서와 동작을 현행화한 작품은 지역 춤계의 내력과 현황으로부터는 현재적 첨점(尖占)이고, 컨템퍼러리댄스 씬의 내역과 감수성을 기준으로 하자면 고답적이다. 양자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던 현장의 감응은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동력을 상실하지 않으니, 그 양단을 말하는 수밖에 없겠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더프리뷰=부산] 하영신 무용평론가 = 예술작품의 창작은 사람의 일이고 세계와 유리된 채 단독으로 출현하는 인간은 없다. 순응이건 극복이건 작용과 반작용은 세계라는 토대로부터 일, 특히나 거소(居所)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물리력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면,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대다수 무용수들은 자칭하기를 ‘부산춤꾼’이라 하는데, 이는 대개 <동래야류>를 위시한 전통춤에 대한 자긍심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자의식은 실체적 효력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부 장르를 횡단하여 의식적 개방성과 신체적 가동성을 확보한 최대한의 몸으로 춤에 임하는 근자의 흐름에서 부산의 무용수들은 탈춤과 친연성을 갖기도 하는데, 이는 고유한 몸짓의 발원을 근거하기도 하고 김윤규(댄스시어터틱)나 이용진(댄스프로젝트 에게로) 등의 작품세계에서 발견되는 극적(劇的) 감도를 지탱하기도 한다.

생활세계에서도 자의식이 자존감의 바탕임과 동시에 존재적 한계가 되듯 부산춤계 역시 그렇게 관찰된다. 전통춤의 전승과 연계가 활발한 반면 외래적 춤(발레) 혹은 현재적 춤(컨템퍼러리댄스)의 지분은 적다. 중대형 극장춤을 위한 기획보다 소극장이나 극장 밖(해변, 산, 거리)의 춤을 위한 기획이 더 많다(관광객과의 연계를 당부하는 격려사 혹은 감천문화마을이나 바지선이나 해변특설무대 등으로부터 ‘지역춤’으로서의 특화 가능성을 충고하는 비평적 시각들은 적절한 각도인가?). 물론 고유함은 작품세계, 작가, 혹은 지역 문화예술 정체성의 근간이기도 하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그러나, 각각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결정지어지는 현장의 특유함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라는 명제는 부분적으로만 참이다. 생산의 기본적인 전제들, 수요와 공급의 선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하여 가치 있는 잉여들이 창출되며 다양성의 지형을 그려내고 있는, 그러한 비등한 국면 사이에 적용 가능한 명제다. 지역분권화, 각별히 예술문화 분권이 성취되지 못한 이 나라에서 이 명제는 당위로서만 참이다. 지역에서 각 세부장르 간의 차이는 현장의 특이성을 결정짓는 의미소(意味素)라기보다는 무엇들의 부족 현상이기가 쉽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이런 결핍적 현장에서 허경미는 현행적인, 예술의 장르와 춤의 세부장르를 가로지르는 컨템퍼러리적 작업을 진척시키고 있는 작가다. 미디어아티스트 홍석진이 이끄는 진홍스튜디오와 협업하고 다양한 이력의 무용수들과 더불어 자신의 작품을 펼쳐오고 있다. 지역의 창작가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변별된다. 지역의 유산을 내면화하는 작가, 지역과 세계의 경계를 월담하는 작가. 차이나는 의미들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취향을 고백하자면 필자는 후자 편향이다(변명컨대 개방적 태도를 다짐하지만). 예술가 혹은 사유가는 본디 주어진 세계와 마찰하다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이들이라 믿기 때문이다. 작가 허경미는 부산을 뚫고 나아가는 뾰족한 송곳이다.

허경미의 시도들, 결정(結晶)된 작품들

필자가 허경미의 춤과 초면한 장소는 부산이 아니다. 2015년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 사단법인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주관)에서 본 <쿰바카(Kumbhaka)>(2014)로부터 그녀의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는데, 영상과 몸의 절묘한 연동(連動 그리고 延同)으로 내재적 자아와 외재적 자아(들)의 펼침과 수렴을 가시화해내며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는 수작(秀作)이었다. 춤의 무대에 새로이 동참하게 된 영상미디어는 여전히 다루기 어려운 매체지만 당시라면 더더욱 그 가능성을 탐색하며 좌충우돌하던 시기. 몸과 춤을 침탈하기 일쑤거나 아니라면 디지털화된 배경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 고작이던 그 시기에 각기 매체적 질량을 소실하지 않고 실존의 사태(‘쿰바카’는 요가의 수행체계 중 하나인 호흡법에서의 용어로 들숨과 날숨 사이 ‘무호흡의 호흡’ 상태를 지시한다. 수행에서는 이 찰나를 ‘참자아’의 순간으로 여기고 이 상태의 보유와 지속을 훈련한다고 한다)를 시연해낸 양자의 경합은 치열했고 그 결과로서의 의미와 미감도 꽤나 충족적인 작품이었다.

이후 필자가 관람했던 허경미의 작품들은 대개 홍석진과의 협업으로 빚어졌다. <<Body of Projection>>(2015, 허종원 안무의 <풍문으로 들었소>를 포함하여 <쿰바카>와 <Two, One, Room>으로 구성된 기획공연), <dialogue 바이트의 궤적>(2017), <스트리밍 시티>(2017), <콜링 감만(Calling Gamman)-기억의 좌표>(2019) 등으로 연이어진 협업에서 미디어아트와 결합하는 허경미의 춤이 언제나 <쿰바카>의 성취만큼 영상과 몸, 가상과 실재, 미디어와 실체 간 춤편의 존재론을 꽉 채운 것은 아니었다. 간혹은 양자가 더불어 예술로부터 이탈하여 기술의 지대를 헤매는 지점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경미의 작업은 언제나 몸을 첨부한 미술, 퍼포먼스를 능가하는 춤적인 순간들을 쟁취해냈다. 시각적이거나 공감각적인 이미지를 초과하는, 베르그손(Bergson)의 이미지 존재론으로 해석 가능한 일원(一元)적이고 원형질적인 그 ‘존재-이미지’로서(“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다.” 이미지 존재론의 대표적 테제인 이 문장이 함축하는 바 베르그손은 ‘이미지’를 관념론자들이 ‘표상된 것(관념)’이라 부르는 것 이상, 실재론자들이 ‘사물’이라 부르는 것 이하, 존재자들의 미분적 요소로 정초하였다. 이로써 유물론 대 유심론이라는 서구 사유 전통의 대립구도를 내파해 내었는데 그로부터 몸은 정신과 육체의 이분구도에서 심신일원론적 몸으로 통합될 수 있었고 그 몸에 대한 사유를 근간으로 존재론적 양상을 펼치는 동시대적 예술의 전개가 진행 중이다. 특히 이미지이지만 실체적 질량과 실재적 강밀도(剛密度)를 지닌 특별한 이미지인 춤에 대한 설명에 적절한 단초가 된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서사로 견인되지 않는 동시대 춤의 내역이 캐릭터를 껴입지 않은 그들/그녀들의 몸 그 존재 자체와 존재양식으로부터 전이되어오는 몸성(corporeality)이라면, 춤이 지극할 때 그 관람의 기제가 몸성의 정동(情動, affect)이라면, 허경미는 몸성이 짙고 몸성의 구동(驅動)을 이해하는, 그 구동의 위력을 경험해본 작가다. 정동은 사실 관계항, 관람자의 감응력과 함수관계에 있다(현대예술이 작품의 입지를 열린 해석의 지대로 옮겨놓은 이유다). 정동의 체험은 주관성에 연관할 수밖에 없는데 그 체험이 집단적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017년 부산원도심거리춤축전(부산문화재단 후원, 거리예술창작단 사하라 주최)에 놓였던 그녀의 작품 <진화>가 그렇다.

작품이 지닌 역능의 설명을 위해 ‘거리춤’과 ‘축제’가 결합하는 기획들에 관한 사견(私見)부터 피력하겠다. 춤작품은 시간과 공간과 몸 그리고 연관하는 장르(매체)의 필연적 건축물이다. 이항(異項)적 콘셉트를 세우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그러하다. 극장이 부러 재단하여 비워둔 ‘공간(space)’, 그 밖은 지형지물과 역사로 점유된 ‘장소(place)’다. 작가가 주도적으로 구성력, 예술성을 발휘하기에 만만치 않고 기실 연행자들과 관람자들에게 용이한 환경도 아니다. 극장이란 공간이 인류의 역사와 동행하며 이러저러한 형태로 고안되어온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변형하거나 파기할 때는 작품의 성과로 설득 가능한 내적논리가 필요하다.

간혹 각종의 난관들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이용하여 색다른 국면을 전개하는 어떤 작가들의 어떤 작품들이 있어왔다. 면밀한 리서치로 특정 장소성을 작품의 특이성으로 이끌어낸 작품군을 ‘장소 특정형(site-specific) 예술’이라 하는데 거리에 놓인 춤들이 모두 그러한 미학적 성취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거리예술은 누군가들의 영역으로 들어가 디오니소스적 시간으로 초대하는 것. 응대는 합의의 일종이다. 관객과의 접면성 확보라는 공공예술적 가치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작품과 연행자들이 진입하기에 2017년 부산원도심거리춤축전이 축전의 거리로 지정한 중앙동 40계단 일대는 호락호락한 장소가 아니었다. 10만 피난민의 내력을 지녔고 2002년부턴 ‘문화관광테마거리’로 거듭났으니, 기입된 유서가 강인하고 문명이 즐비하여 ‘마당’이나 ‘판’, 연행의 공간으로 열리기가 만만치 않았다. 양일에 걸쳐 거리에 선 스무 편 남짓의 작품들은 상점들의 불빛, 차량의 통행,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과 간간히 내린 비, 공연을 원치 않는 혹자들의 불만 등 적대적인 환경을 견뎌야 했다.

지신밟기를 하듯 저 멀리 대로변으로부터 그 거리의 유서와 저항을 즈려밟고 나아와 삽시간에 일대를 벽사진경(辟邪進慶) 제의(祭儀)적 공간으로 승화시켜낸 작품이 허경미의 <진화>다. 허경미는 권수정· 김현정· 박재현· 박정윤 등 헌신적인 부산춤꾼들과 한 달여 워크숍을 거친 열 댓 명 시민들로 구성된 군단을 거느렸다. 사잇박자의 특유한 리듬에 온몸을 싣는 강도(剛度)적 발구름은 지축을 흔들었고 그들의 발목에 매인 인도방울의 쩌렁쩌렁한 소리는 지상의 모든 것들을 호령했다. 도시를 점령한 스펙터클은 순식간에 그 빛이 바랬고 둥둥 그들의 발구름은 그 거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내부를 진동시켰다. 제의는 그렇게 치러졌다. <진화>에게 길은 숙명이었다. 전진하는 춤, 모두의 신명을 북돋아내는 위력, 무대가 품을 수 있는 춤이 아니었다.

우리 시대의 구원적 ‘진화’, 문명으로 점철된 세계를 가로질러 맨몸의 감응력을 회복해내는 허경미의 <진화>는 아직도 지역 여기저기의 요청으로 길 위에 선다. 전율케 하는 몸성의 강렬한 체험이 이유인지 <섬-섬>(2019), <길을 잃다>(2019) 등 이후의 작품들에선 변화가 감지된다. 시각예술의 협업은 간명한 감도로 조율되고 춤적 발현이 강화되어 왔다.

다시 극장, 다시 극장. 작품으로서의 세계를 건축하기

베르그손의 테제들을 물려 안아 들뢰즈(Deleuze)는 현대영화의 이미지 분류를 통해 운동과 시간을 사유하여 이미지존재론을 완결해낸다(『시네마』). 긴축하자면, 이미지는 물질이고 세계는 명멸하는 이미지들의 운동이다.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현대영화가 프레이밍(framing)된 세계라면, 극장에서의 무용예술은 어떠한가? 나는 들뢰즈의 삶이 지금까지 지속되었다면(1995년에 영면하였다) 아마 컨템퍼러리댄스의, 문자 그대로 생동하는 이미지들을 탐닉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지존재론에 의하면 생명의 역능과 사물 혹은 자연의 현상은 ‘운동’이라는 기제로 동일한 평면에 놓였다. 몸과 오브제와 빛과 사운드가 각자의 매체성(물질성)으로 운동을 영위하는 세계, 컨템퍼러리댄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예술작품을 지지하는 두 축은 ‘무엇을 말하였는가’와 ‘어떻게 말하였는가’인 바. 운동으로써 존재적 양상을 지시하고 구사하는 컨템퍼러리댄스는 그것이 충족적일 때는 존재의 심급. 일상 아래 깊숙이 생의 진면모를 펼치는 예술의 일을 수행하지만 그렇지 못하여 기제만 작동시켰을 경우 내역 없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간혹은 동일한 주제의식으로 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염증이 나기도 한다. 대도시 환경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조율되고 있는 삶을 생각하면 결국 삶으로부터 융기할 수밖에 없는 예술작품을 탓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예술가의 구체적인 진술이 듣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허경미의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는 오랜만에 명백하다.

“굼실굼실하고 어정거리고 우쭐우쭐 낭창거리다 또 다시 하릴없이 능청이다.” 프로그램 앞뒷면에 부제처럼 앉은 이 볼드체의 문구가 본작의 내역이다. 암묵적인 듯해도 춤들의 서사는 명시적이다. 세월호 참사, 역병, 그리고 작금의 갈등들로 이어지는, “현실이 가관”이라 허경미는 탈춤의 춤사위를 불러내었다. 그리하여 능청, 해학의 정서가 아니라면 이 시절 견뎌낼 수 있겠나. 또렷한 말걸기로서의 춤, 공감과 연대, 위무가 되었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그러나 춤 외엔 공백이 선연하니 탈락된 조형성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오랜만의 극장 작업이다. 미술관, 영화의전당 로비, 항만의 폐공장, 도심천과 공원과 거리… 개방되고 확장된 세계와 부대끼며 몸성 충천하는 춤으로 너끈히 불특정다수들을 감흥케 하여 왔으니 중극장 공간에서의 일이야. 압축된 세계, 농축된 몸성의 출현을 기대했다. 그러나 작품은 예상 밖, 기대 밖에서 펼쳐졌다.

예전의 작품들에게는 성격이 있는 공간, 지형지물과 내력이 있는 장소들이 주어졌다. 그 바탕에서 허경미의 춤과 동반하는 홍석진의 시각예술로 작품의 세계는 충전되었었다. 매번이 의미롭거나 조화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기술과 가상의 지대로 춤을 데리고 가버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 세계들은 조성이 완료된 세계였다. <그리하여 능청이다>에서는 홍석진의 시각예술이 동참하지 않았다. 그 자리를 신상현(시어터 아我 대표)의 공동안무가 채웠으니, 이번 작품을 대하는 허경미의 의욕은 춤에 그 방점이 찍혔다 할 수 있겠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그러나 춤 외에 동세(動勢)가 없다. 춤 장면 혹은 춤추는 이에 집결되는 단초점(單焦點), 단조로운 선형(線形)의 동선. 시선에서 시야로 확장된 동시대춤의 시각장(視覺場)에 비하면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민머리, 빈틈없는 근육질의 신체, 나신을 연출하는 누드 톤의 드로즈, 강렬하여 작품의 인상을 좌우하는 신상현의 이미지는 독일 표현주의, 일본 부토의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미감을 환기한다.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비단 컨템퍼러리댄스의 미학관, 그 충혈하는 운동감을 충족시키지 않아서가 아니다. 휘감았다 펼치고 주저앉다 벌떡 일어나고, 활달하기로 치자면 탈춤의 춤사위만큼 역동적인 것이 있겠나. 쓰지 않은 탈의 안면성(顔面性)이 보이리만큼 연행은 충분했다. <그리하여 능청이다>의 미감을 취향적 관점이나 동시대 감수성을 기준으로 감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미처 구성되지 않은 세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 작품의 세계에 작가가 책임지지 못한 공백이 도사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작품세계, 정녕 하나의 예술작품은 작가들이 건축하는 세계다. 3차원 공간을 실체적으로 전유(專有)하는 공연예술의 작품은 더더군다나 입체적이고 즉물적인 세계다. 그 세계를 물론 오로지 몸, 춤 그것의 동선으로만 조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라면, 공간의 나머지는 동양화의 여백처럼 자체의 의미와 미감을 지닌 채로여야지 극장공간의 진공, 작가가 미처 다스리지 못한 공간의 잔여, 의도치 않은 무의미여서는 안 될 일이다. 춤은 결단코 공간과 시간과 몸의 작용이다. 춤과 조응하지 않는 극장 내 나머지 공간은 작가가 미처 조형해내지 못한 미완의 공간이다. 더군다나 춤작품세계 내 모든 이미지가 베르그손적으로 운동하는 요즘, 동시대의 감수성은 시각에서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 촉각으로 강화되어 왔으니 완성도는 자연스레 그에 기준할 도리밖에.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허경미 신작 '그리하여 능청이다' 공연장면 (c)박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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