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러시아의 샛별, 화려한 첫 내한무대 -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
[공연리뷰] 러시아의 샛별, 화려한 첫 내한무대 -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
  • 김준형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23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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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청라블루노바홀
Editor Mari KIM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사진제공=인천서구문화재단)

[더프리뷰=서울] 김준형 음악칼럼니스트 = 차이콥스키 영 아티스트 콩쿠르 외에 화려한 입상 경력은 없지만, 오로지 연주력으로 승부하고 있는 떠오르는 신예 피아니스트 말로페예프. 강력한 후원자인 미하일 플레트뇨프와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물론이고 리카르도 샤이, 정명훈 등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들의 부름을 받아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같은 정상급 관현악단과 협연한 바 있다. 린가우 음악제, 메라노 국제음악제, 마추예프의 크레셴도 축제, 게르기예프의 미켈리 음악제, 베르비에 음악제 등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의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200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유서깊은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세르게이 도렌스키 교수와 파벨 네세시안 교수에게 배웠다. 이제 압도적인 스타성과 뛰어난 예술성으로 신동 이미지를 벗고 훌륭한 예술가로서 각광받고 있다.

국내에선 올해 4월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으로 데뷔 무대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무산된 바 있다. 그 안타까움이 이번 이틀간의 리사이틀로 말끔히 해소되었다. 롯데콘서트홀에서의 9월 3일 데뷔 리사이틀도 화려했지만 보다 친숙한 레퍼토리를 들고 청중과 더욱 긴밀한 소통이 가능했던 9월 4일 인천 청라블루노바홀의 연주는 더욱 훌륭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사진제공=인천서구문화재단)

이 공연은 2018년 일만명의 관객이 모인 청라호수공원 야외음악당에서 피크닉 페스티벌로 시작하여 2021년 2만4천명의 관객 수를 기록한 인천 대표 클래식 음악 축제인 정서진 피크닉 클래식의 메인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국립오페라단의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인기 절정의 포르테 디 콰트로를 초청한 피날레 콘서트 등은 축제를 주관하는 인천서구문화재단의 베이스 캠프라 할 수 있는 서구문화회관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번 말로페예프의 리사이틀은 오랜 산고 끝에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청라블루노바홀 무대에서 열렸다. 세련된 외관과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가능한 부대설비가 인상적이었다. 486석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클래식 전용 공연장은 아니지만 솔직하고 직설적인 음향이 이채로웠다. 어쩌면 떠오르는 러시아 청년의 연주를 온전히 즐기기에 최적의 여건이 아닐까 했다.

1부는 슈베르트가 전작 이후 4년 간의 장고 끝에 세상에 내놓은 <제14번 D.784>로 시작했다. 작품이 담고 있는 다채로운 정서를 모두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어느 러시아 피아니스트보다도 예리하고 선명하게 선율을 부각시키며 자신만의 음악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그의 차이콥스키의 <둠카>를 들으면서 이것이 바로 '러시아의 정서'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화롯불을 쬐고 있는 풍경이 보이는 듯했다. 말로페예프의 음악성은 러시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큼 그 설득력이 실로 대단했다.  그가 더 이상 어린 신동이 아니라 어엿한 예술가라는 것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어 메트너의 <2개의 동화> 가운데 요정의 이야기와 춤 이야기를 연주했다. 이틀 간의 리사이틀을 통해 메트너의 음악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것도 필자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메트너는 러시아의 음악사에서 길을 잃고 20세기의 모더니즘과 끊임없이 분투했던 작곡가”라고 평가한 말로페예프는 소나타를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연주하면서 작곡가의 진면목과 마주하는 소중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사진제공=인천서구문화재단)

2부의 첫곡으로 연주한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은 플레트뇨프의 전유물인줄 알았다. 말로페예프의 연주는 보다 솔직하고 직설적이면서 섬세한 묘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필자가 들었던, 보다 밝은 톤의 화려하고 풍부한 감정이 인상적이었던 꿀띠쉐프의 연주에 비견할 만했다. 이틀 모두 마지막은 그의 우상이라는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 op. 33>으로 장식했다. 곡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곡마다 다채로운 악상을 조각하듯 파고들어 그려낸 치밀한 연주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 후 무려 다섯 곡의 앵콜을 아낌없이 들려주었는데, 얼굴 가득 환한 미소로 상냥하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그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졌다. 특히 발라키레프의 대작 <이슬라메이>는 피아노를 폭발시킬 듯 격정으로 연주했고,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제7번> 가운데 '프레피치타토'는 문자 그대로 맹렬하게 몰아치며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의 진수를 알려주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길렐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같은 지난 세기의 거장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하일 플레트뇨프, 그리고리 소콜로프, 아르카디 볼로도스, 니콜라이 루간스키, 알렉산더 마슬레예프, 미로슬라프 꿀띠셰프 등 현역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계보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제 이 계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 같다. 말로페예프라는 러시아의 신예 피아니스트는 보다 세련되고, 보다 화려하게 그리고 관객 친화적인 연주자로 높은 스타성을 지니고 있다. 올해 21살인 이 청년은 이번 10월에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더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며, 연주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밤이 무척 기다려진다. 

지난 4일에 열린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 포스터(제공=인천서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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