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아름다워라, 청춘이여 -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리뷰] 아름다워라, 청춘이여 -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20 12: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올겨울에도 어김없이 <라 보엠>이 올려졌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공연물은 많고 많지만, 음악 애호가들이 가장 기다리는 작품은 오페라 <라 보엠> 아닐까. 지난 12월 1일부터 4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올려진 국립오페라단의 <라 보엠>. 관객들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에 웃고 울며 겨울이 찾아왔음을 확인했다.

<라 보엠>은 여느 오페라와는 참 다른 매력이 넘친다. 귀족의 이야기도 아니고, 전쟁터의 이야기도 아니다. 음모술수도 배신도 처절한 희생도 없다. 1830년, 프랑스 대혁명이 휘젓고 간 자리에는 낭만주의 대신 사실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와 예술과 철학은 여전히 살아있던, 빅토르 위고와 베를리오즈의 시대. 가난해도 시와 그림과 음악으로 귀족 부럽지 않은 꿈을 꾸는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는 한 세기를 훌쩍 지나서도 사랑받는 명작으로 남았다.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나는 행복한 가난 속에서

대귀족 같은 사치를 누리며

시와 사랑의 찬미가를 쓰지요

꿈과 환상 속에 성을 짓는

백만장자랍니다 - ‘그대의 찬 손’

파리 라탱 구역의 허름한 지붕 아래 사는 시인 로돌포는 노래한다. 비록 땔감으로 쓰기도 하는 원고지만, 끊임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쓰고 있다고.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불을 얻으러 온, 손이 차가운 여인 미미에게 한 눈에 반한다. ‘미미’라는 이름은 본명이 루치아인 그녀의 과거를 설명한다. 아마도 파리 뒷골목의 댄서였을 것이다. 남다른 미모로 화려한 무대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수를 놓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낭만을 찾으며 살아가는 여인이다.

하얀 방에서 홀로 살고 있는 여자예요

옥상과 하늘만 보고 살죠

그러나 해빙기가 오면

첫 번째 태양은 나의 것

4월의 첫 입맞춤은 나의 것이죠! - ‘내 이름은 미미’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라 보엠>의 등장인물들은 다 사랑스럽다. 이 작품에는 악인이 나오지 않는다. 시인 로돌포, 화가 마르첼로, 음악가 쇼나르, 철학자 콜리네. 장난꾸러기 같은 젊은 예술가 청년들이 베개싸움을 하거나 서로를 놀려먹는 장면은 관객을 웃게 만든다. 연출가 김숙영은 인물들의 디테일한 표정과 움직임을 생생하게 살려야 하는 장면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이 지붕 위를 오가며 투닥거리도록 무대를 설정해 자유분방한 이들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1막과 4막의 지붕 밑 다락방도 좋았지만 2막의 카페 모무스도 활기 넘치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그대로 재현한 듯했다. 계단과 테라스를 활용해 북적이는 인파의 동선을 살리고,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신나고 생기발랄한 크리스마스의 거리를 묘사했다. 막과 막 사이에 피에로를 등장시켜 로돌포의 마음을 알려주는 마임을 보여준 설정도 재치 있었다.

<라 보엠>의 인물들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에밀 졸라와 에두아르 마네는 스스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고, 오페라의 원작 역시 앙리 뮈르제의 소설 <보헤미안의 삶의 장면들>이다. 보헤미안의 심장을 가진 이들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사랑한다.

출연진은 최고의 현역 성악가들다운 기량을 펼쳤다. 소프라노 서선영은 소녀 같은 감성을 지녔으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오는 강단 있는 여인 미미를 연기해 객석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연기파 성악가는 서선영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로돌포의 강요셉은 볼 때마다 안타깝다. 연기력은 출중한데 고음에서 항상 목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가장 관객이 기대하며 듣는 아리아가 1막 ‘그대의 찬 손’인데, 테너의 음정이 흔들리니 탄식이 나왔다. 다행히 이어진 이중창에서는 안정감을 찾았다.

무제타의 박소영은 ‘무제타 왈츠’를 일반적 템포보다 조금 느리게, 여느 무제타보다 더 피아니시모로 시작해서 피아니시모로 마무리했는데 굉장히 매력 있게 들렸다. 콜로라투라의 장점을 살짝살짝 감질나게 보여준 것이 오히려 무제타를 돋보이게 했다.

마르첼로는 바리톤 김기훈이 연기했다. 김기훈의 노래는 펄떡거리는 활어 같다. 열정적이고 정직하고 거침이 없다. 김기훈의 힘 있고 우직한 음색은 마르첼로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2막에서 마르첼로가 무제타를 향한 마음을 못 참고 “나의 청춘이 죽지 않았구나. 당신에 대한 기억도 죽지 않았어! 그대가 나의 문을 두드리면 내 심장이 당장 열어 주리라!”하며 노래할 때 객석도 벅차오르는 희열로 동요했다.

3막에서도 성악가들의 연기력이 빛났다. 3막의 노래들은 대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미미와 마르첼로의 대화는 두 커플의 서로 다른 사랑을 대비시킨다. 미미와 로돌포의 이별 대화도 그렇다. 로돌포는 사랑의 꿈과 미소, 입맞춤과 작별하지만, 미미는 비난과 질투, 의심에 작별을 고한다. 마침내 힘겨운 이별도 꽃피는 봄으로 미루는 미미-로돌포 커플과, 홧김에 ‘독사, 두꺼비, 마녀’를 내뱉으며 요란스럽게 헤어지는 무제타-마르첼로 커플의 이별 장면은 극명한 대조의 정점을 찍는다. 무제타와 마르첼로가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커플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로 인해 미미와 로돌포의 사랑이 더욱 애처롭고 슬프게 부각된 것이다.

4막에서 미미와 로돌포의 이중창, 콜리네의 ‘외투의 노래’, 로돌포가 “미미!”하며 절규할 때 터져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슬픔의 폭풍 속으로 청중을 몰아넣었다. 쇼나르의 김종표도, 콜리네의 박준혁도 작품에 완전히 녹아들어 1800년대 파리에서 숨 쉬는 착한 음악가와 철학자 같았다. 모든 출연진이 세심하게 노력을 기울여야 완성도 높은 무대가 만들어진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한 시간이었다.

사랑은 불현듯 시작된다. 불 꺼진 가난한 예술가의 방에서도, 시끌벅적한 카페 모무스에서도. 그러나 가난과 무력감은 질투와 의심으로 전환되고, 아름답던 사랑은 추위와 질병 앞에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아름답다. 음악이, 그들의 꿈이, 사랑이. 아름다워서 더욱 슬퍼지는 청춘의 초상으로 겨울을 맞이한다. 보헤미안이었던 그들의 계절에 건배를.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라 보엠'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