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평범한 듯 비범한 퍼포먼스 - 금배섭의 'WORK'
[공연리뷰]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평범한 듯 비범한 퍼포먼스 - 금배섭의 'WORK'
  • 김혜라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1.2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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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배섭의 'WORK' 공연 (사진=박태준)

[더프리뷰=서울] 김혜라 춤비평가 = 춤판야무 금배섭의 신작 <WORK>(12월 29-31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실험성과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안무가는 작년에 무려 5시간 30동안 솔로연작 <오>를 실연하며 작품에 임하는 집요한 근성과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그 내용 또한 제도권 밖에서 홀로 버틴 사람들(탈북민, 이주여성, 세월호 구조대원 등)을 8년간 추적하는 집념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금배섭은 기존 춤계에서 볼 수 없었던 창작력으로 주목을 받았고(2021년 한국춤비평가협회 작품상), 무엇보다 일상적인 행위와 노동에 기인한 움직임으로, 세밀한 연출로 파편화된 극적 퍼포먼스를 구현했다. 재현과 수행의 경계 어디 즈음에서 부유하기도, 안착하기도, 넘나들기도 하며 말이다.

대학시절 미추연극학교에서 춤과 판소리, 연기와 무용 테크닉을 배운 경험과 손진책, 김광보 등과 연극계에서 작업을 한 영향이 현재 그의 작업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드라마투르그 김풍년과의 이상적인 협업은 이번 신작에서도 시너지를 보였다. 다만 전작 <오>에서는 탐색 대상이 타인이었다면 이번 <WORK>는 자신의 내적 세계로 침잠한다. 5개의 키워드인 ‘꿈’ ‘추락’ ‘대화’ ‘생년월일과 쌀과의 상관관계’ ‘셰익스피어 햄릿 4막 7장’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전개는 독립적인 신(scene)마다 관객이 개입할 틈, 다시 말해 해석의 공간을 넓게 열어 놓았다. 무거운 주제를 위트 있게 다루는 춤판야무의 솜씨로 관객은 때론 모호한 장면의 의미도 구슬 꿰듯 엮어 보며 퍼포먼스에 참여하게 된다.

첫 번째 제시어인 ‘꿈’ 장면은 이 단어만의 아름다운 의미가 아닌 팍팍한 현실에 초점이 맞춰진 인상이다. 무대는 어둡고 음악도 없는 적막한 상태이나 상대적으로 천에 싸여 미세하게 반짝이는 불빛이 꿈을 상징한다. 조심스럽게 천으로 감싸져 미처 손이 닿을 수 없는, 이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꿈의 이미지이다. 희망적이지 않다.

막대기와 (밥)그릇 소품을 중심으로 두 번째 제시어인 ‘추락’이 전개된다. 기다란 막대기에 여러 개의 그릇을 올려놓고 퍼포머가 균형을 잡고 있다. 두 남자는 총을 쏘며 그릇을 떨어뜨리려 하나 실패한다. 막대기가 휘청거릴지언정 그릇이 떨어지지 않게 안간힘을 쓰는 장면에서 치열한 밥벌이 현장이 연상된다. 두 퍼포머(금배섭과 정한별)는 막대기를 살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인 양 어깨에 메고 머리에 인 채로 옷을 입고 벗는다. 일한다. 정한별이 떠나자 그릇은 떨어지고 애써 지켜 낸 균형(일상)이 무너진다. 까치발로 서서 막대기를 티셔츠에 구겨 넣어 서라도 버티려 하나 추락하고 마는 씁쓸한 장면이다. 앙상한 금배섭의 몸을 둘러싼 미장센이 여운을 남긴다.

금배섭의 'WORK' 공연사진(사진제공=춤판야무 박태준)
금배섭의 'WORK' 공연 (사진=박태준)

‘대화’의 제시어와 함께 두 퍼포머(김석주와 권정훈)가 돌돌 만 종이를 머리에 쓴다. 앞뒤 맥락 없이 우스꽝스런 형상이 이어지며 종이더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확성기로 작동한다. 옴브레의 감각적인 음악에 퍼포머는 제법 화음을 맞춰 대화하듯 노래하다가 싱겁게 포기한다. 대화란 상대와 함께 나누는 일이나 이들은 혼자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소통의 행위가 아니라 종이 벽에 대고 일방적으로 중얼거린다. 소리는 허공으로 울릴 뿐이고, 나른하고 어리숙한 움직임만이 허우적댈 뿐이다. 배우 김석주는 지난번 <니가 사람이냐>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극대화시키는 퍼포머인 것 같다. 익살스러움과 진지함으로, 능수능란하지만 애써 티 나지 않게 그의 노래와 연기에는 오묘한 힘이 있다.

금배섭의 'WORK' 공연사진(사진제공=춤판야무 박태준)
금배섭의 'WORK' 공연 (사진=박태준)

이어지는 ‘생년월일과 쌀과의 상관관계’는 네 명 퍼포머의 행위와 연기로 절정을 보여준다. 특히 소품들의 활용이 재미와 의미를 만드는데, 와인 잔에는 쌀이 있고 김석주가 이를 마시기도 바닥에 뿌리기도 한다. 빗자루와 쌀로 점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일생 동안 씨를 뿌리고 일하며 살아 온 시간과의 상관성도 있어 보인다. 반면 정한별은 와인 잔을 입에 물고 납작 엎드려 마치 김석주의 점괘에(결정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황당하다. 와인의 생산지와 등급을 말하는 “도멘 프리에르 로크 본 로마네 크뤼 레 슈쇼”라는 가사로 순간 폭소를 자아낸다. 김석주는 특권층의 허황된 취향과 매너를 직설적인 어법으로 천연덕스럽게 노래한다. 이와는 상반되게 그로테스크한 움직임으로 바닥에 밀착된 정한별은 밑바닥 인생을 암시하는 것일까. 이 둘의 상관관계는 태어난 날과 무관하게 억울한 세상의 위계를 전시하는 것일까? 알 듯 말 듯 하다. 일상적인 소도구를 상투적이지 않게 오브제로 변신시키는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금배섭의 'WORK' 공연 (사진=박태준)

이와는 또 별개로 무대 뒤쪽에서 권정훈은 무아지경의 뜀박질을 하며 굿 행위를 하고, 금배섭은 묵묵히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움직인다. 순간 갑작스런 화면 정지! ‘간주’ 시간이란다. 네 명의 퍼포머는 바닥을 뒤집어 다시 리셋한다. 그간 진행된 의미망은 깨지고 현장의 시간은 되돌려진다. 제 각각 읊는 불협화음의 소리들, “모든 게 허사로다”라는 창으로, 여러 결 존재들의 몸짓 반란(斑爛)이 교묘하게 어우러진다. 천태만상 세상사가 그러하듯 말이다.

금배섭의 'WORK' 공연 (사진=박태준)

마지막 ‘셰익스피어 햄릿 4막 7장’ 오필리어가 익사한 상황이 텍스트로 제시된다. 이쯤 되면 작품의 결말이 비극적임을 누구나 감지하게 된다. 화관에서 죽은 원작의 오필리어는 핑크빛 한복을 입은 정한별이 투명한 물 양동이에 얼굴 담그기를 반복하며 극을 실행한다. 소박하게 마련된 장치와 스크린에 투사되는 정한별의 행위는 물속에서 숨이 끊어지는 오필리어의 시간을 대리하는 것이다. 정한별을 지켜보는 세 퍼포머는 오필리어의 죽음을 발단시킨 <햄릿>의 등장인물이다. 정한별(오필리어)은 물속을 유영하다 서서히 가라앉고 세 퍼포머도 함께 죽어가는 춤을 추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안무자는 허무한 오필리어의 죽음을 소환해 불안하고 흔들리는 오늘의 햄릿 자신을 투영시킨 듯하다. 원작의 내용을 춤판야무 식으로 해석한 연출이 출중하다.

금배섭의 'WORK' 공연 (사진=박태준)

일련의 다섯 장면을 굳이 이야기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자신의 꿈을 좇다 현실에 부딪혀 추락하기도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하듯 인생을 살아내는 고된 시간으로 읽힌다.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는 자세와는 대조적으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퍼포머들의 교묘한 행위와 능청스러운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작품은 아슬아슬한 몸들이 휘청거리고 무심하게 노래하며 적절한 관조와 냉소적인 시선으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독창적인 구성으로 완성시켰다.

누군가가 인생이 질문한 만큼만 살아진다고 했듯이, 작품 <WORK>는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평범한 듯 비범한 퍼포먼스로, 나와 일, 개인과 타자와의 숙명적인 관계를 자문하는 작품이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자기 직시적인 질문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며 일반론적 물음으로 확장시킨다. 사람들에게 일이란 삶을 지탱하는 희망이기도 하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십자가이기도 할 터. 개개인이 부여잡은 의미는 다르겠으나, 금배섭은 일을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가짜의 행위로 규정한다.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일하는 고귀한 인간이 아닌 허망한 행위라고 네 퍼포머도 무심하게 속삭인다. 고유한 ‘나’는 없고 가짜의 ‘나’만 있을 뿐이라는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생의 시간이 ‘허구’라는 안무가의 기조에 개인적으로 동감하기는 어렵지만, 공회전 같은 인생을 그려낸 안무가의 비관적인 시선이 그저 쓸쓸할 뿐이다.

금배섭의 'WORK' 공연사진(사진제공=춤판야무 박태준)
금배섭의 'WORK' 공연 (사진=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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