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노네임소수의 'WHITE'
[공연리뷰] 노네임소수의 'WHITE'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3.19 07: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춤, 그 육화하는 감정에 대한 탐구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지난 225일과 26일 양일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는 노네임소수의 신작 <WHITE>가 펼쳐졌다. 공연예술 창작물 발굴을 위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주최·주관하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이하 창작산실)' 2022년 무용 부문 선정작 일곱 편 중 한 편인 <WHITE>는 역시 2020년 창작산실 선정작이었던 <BLACK>의 연장선상에서 감정을 탐구한다.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작품의 내용과 구현 모두에서 재현에의 종속을 거부하고 있는 동시대 무용 예술작품들은, 그렇다면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1990년대 말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실험적 성향의 춤작가들로부터 동시대 춤(확장적으로 퍼포먼스)의 특성을 추적하는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의 저서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Exhausting Dance: Performance and the Politics of Movement에는 존재론이라는 단어가 무수히 등장한다. .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나아왔다면, 그리하여 그 문제적 화두 동시대성의 일면(동시대성에 관한 진술이 단순한 정언명제일 리 없다. 특히나 각각의 입장들이 첨예하게 겨루는 오늘날이라면 더욱이)을 성취하였다면 그 작품은 춤 혹은 무용예술작품 그리고 주체성에 관한 질문이거나 그 질문에 관한 스스로의 답변이다. 과거의 춤들을 소진시키고(exhausting)’ 새로운 견해와 입장 혹은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정치적(politics)’이 되는, 컨템퍼러리댄스는 과연 존재론의 일종이라 할 수도 있겠다.

노네임소수 ‘BLACK’ / 노네임소수 제공 ⓒ조태민
노네임소수 ‘BLACK’ ⓒ조태민

컨템퍼러리댄스 안무가들은 춤과 춤작품의 정의에 관하여, 춤추는 몸들의 정체성과 그로부터 펼쳐지는 생에 관하여 다중적 짓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새삼 새로울 일일까도 싶다. 표현·양식/내용·주제라는 양축으로 건립된 고유함, 예술작품의 명세(明細)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 아닌가. 아무튼 동시대의 안무가들은 재현의 구도 바깥에서 발명하거나 발견해낸 어떤 사유적 차원의 특이점들을 고지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노네임소수의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최영현은 그런 면에서 매우 선명한 작가군에 속한다. 그에게 춤은 무엇보다도 몸, 정신도 강렬한 행위역량을 지니는 일원론적이고 주체적인 몸들의 일이다. 2018년의 문제작 침묵 Silentium에서 선취한, 정신의 사태를 표지하는 그 특유의 농축적이고 집약적인 신체이미지로부터 오늘의 <WHITE>도 개시된다.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생 혹은 춤의 원천적 동력, 감정에 관하여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다사상주의(寫像主義) 시인 매리앤 무어(Marianne Moore)의 말을 공유함으로써 전작인 <BLACK>과 신작인 <WHITE>는 감정에 관한 연작이 된다. 가장 깊은 감정, 근원적 감정. 선험(先驗)으로 내재되어 있고 경험으로 강화되어 온, 행위를 추동하고 사유를 진전시키는 생의 가장 직접적인 동력인 감정에 관하여. 최영현은 영혼’ ‘정신등등 우리가 기어이 육체와 변별해보곤 하는 몸의 실존적 부분내역인 감정을 가시화하기를 의욕했다. 사상주의, 명확한 이미지의 집중적이고 공략적인 표현, 감정 그 자체의 시각화, 사물화.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사실은 지난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우선, 감정을 작가의 관점을 통과한 고유한 것, 즉 작가만의 사유적 결과물로서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희로애락쯤으로 구획되는 일상적 용례보다 감정의 용적은 넓고 깊다. 프로이트조차 언캐니(uncanny)’, 연유를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촉발쯤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던, 심리·정서·정념·충동·무의식 기타 등등 무엇으로 호명되든 강렬하지만 불확실한 미지들의 세계가 감정의 영역이다. 기쁨이니 슬픔이니(최영현은 프로그램에 슬픔, 기쁨, 외로움, 고통, 긴장, 불안, 당혹감, 섬뜩함, 전율, 공포 등을 세분하였다) 주관적 쾌와 불쾌 사이에서 마치 낱낱인 양 각각의 명칭으로 추상화된 감정들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알 수 있듯이 중첩하고 연속하는 분리불가능성. 사출(寫出, 査出)하기에 과히 쉽지 않은 대상이다.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그런데 그 종잡을 수 없는 대상의 영역이 예술 혹은 예술적인 것들과 사태들(학제상 예술의 위상으로 구별되지 않는 감응적 대상과 사건들. 이를 포함하려는 시도들이 동시대 예술의 이념이다)의 지대이기도 한 것이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감화-이미지’(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이미지존재론에서 이미지는 심상(心像)이라는 범용으로부터 깊이 탐구되어 존재의 극소단위, 실재적이고 실체적인 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로부터 소통, 특히 공연예술에 있어서의 현장적이고 체험적인 교류의 기제 정동(情動, affect)’이 정밀한 설득력을 갖게 되지만 여기서는 들뢰즈의 이미지에 관한 논의가 존재론을 향방하였으나 아직 그에 도달하기 이전, 그러니까 시네마1운동-이미지에서 이미지의 범용을 허용하며 각종의 영화들을 섭렵,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를 수행하는 단계에서의 이미지에 관한 이해를 소환한다. 공연 프로그램에 나와있는 최영현의 진술대로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극대화된 감정을 시각화"하는 작업이기에 그리 한다)들이 관계를 짓고 풀며 활성화되는 세계가 예술의 시공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번째 우려가 발생한다. 감정을 다룬다면 더욱이 작품을 채우게 될 그 감화-이미지들이 일상의 감정으로부터 그리고 기존하는 무수한 예술작품의 내역들로부터 얼마나 다른질감과 강도의 것으로 특정될 수 있을 것인가. 동시에 그 특별해진 것은 얼마나 같은공감대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인가.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감정은 어떻게 포장되든 예술작품의 내역이었다. 더구나 춤은 원천적으론 감정이 실린 움직임인 것이다. 항진이든 저하든, 연속이든 분절이든, 기교적이든 일상적 행위를 포함하든, 춤은 감정과 더불어 출현하고 감정의 성질과 역량으로 표출되고 전이된다. 익히 다루어져온 감정을 어떻게 각별히 적출해낼 수 있을 것인가. 감정 그 자체를 다루어보겠다는 시도는 여러 각도에서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감정의 탐닉이 필요한 이유

철학과 예술은 확장지향적 활동이다. 언제나 현재의 규정들과 현상 너머를 추구한다. 전망(展望)은 인류를 살게 하는 이유와 살리는 원인들 중 하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혼용하듯 희망에 정합(整合)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대의 철학과 예술이 의식 너머, 주체 너머로 지평을 넓히는 것, 충동·무의식·신유물론(압축하자면 물질의 주체성과 주체의 물질성 사이를 횡단하는 사유. 인간중심주의에의 회의에서 비롯하는 주체 사유의 최근 동향이다)의 세계로 돌진해 들어가는 것이 과연 언제나 긍정을 담보하는 일일까.

개인적 경험을 말하자면. 충동과 무의식, 해체적 주체에 전념하는 컨템퍼러리댄스의 체험이 누적될수록 불행’ ‘불안등등 부정적 감정에 민감해진다. 예술의 탓만은 아니다. 현대적 삶이 그렇게 직조되고, 예술은 삶에 대한 명징한 의식과 감응인 것을 어쩌랴. 꽤 오랜 동안 나는 컨템퍼러리댄스로부터 서사와 재현의 한정(限定)을 돌파해보려는 장르에의 의욕, 일상을 초과해보고자 하는 예술에의 의욕을 충당받기도 하였다. 몇몇 작품으로부터는 문자 그대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충족감, 생으로의 감응과 생명력의 정동을 선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최근엔 말초성에의 함락, 폭력의 배양, 주체의 와해, 전망의 말소 등 불길한 징후를 전송 받는다.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현대의 문명은 위독해졌지만 그것은 본디 카오스적 자연에 대하여 인류 나름의 질서를, 모두의 생존을 위한 방편을 간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명은 치달았고 문명의 일종인 동시대의 예술 역시 종종 인간적인'이라는 수사(修辭)를 거뜬히 배반하는 위험한 레토릭이 되고 있다. 너무 항진적이거나 너무 해체적으로 강화하는 컨템퍼러리댄스들. 간단명료하자면 감정이 실린 행위연속인 춤들은 왜 점점 알 수 없거나 공감 불가능한 구역으로 좌초하는 것인가. 불가해한 충동들 혹은 해독 불가능한 기호들의 쇄도는 점점 일방적인 폭력의 양상을 닮아간다. 지금쯤은 맹목적 추종을 의혹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모처럼 반갑게 최영현은 무의식, 충동, 와해된 주체들의 세상이 된 오늘날의 춤세계에서 다시 감정의 탐구를 선언한다.

between <BLACK> and <WHITE>, 감정을 돌출시키기

감정을 탐닉하는 두 작품에 최영현은 <BLACK><WHITE>라는 제목을 붙였다. 2022년 창작산실을 위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발간한 책자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최영현은 색면추상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업을 언급했다. 형태를 버리고 그저 압도적인 면적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그가 구가한 색들은 보는 이를 곧장 어떤 감정적 사태에 침윤시킨다. 그 그림들 앞에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낀 최영현은 감정의 실체와 그 작용의 메커니즘을 궁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감정의 명징한 형태로서의 신체 이미지와 감정의 역학으로서의 순전한 움직임을 창출하는 작업 <BLACK><WHITE>를 내놓게 되었다. ‘검음은 색들의 중첩이고 ’(‘투명이 보다 적확할)은 빛들의 중첩. 최영현은 혼재하는 바탕으로부터 감정의 선연한 스펙트럼을 추출해보기로 한 것이다.

노네임소수 ‘BLACK’ / 노네임소수 제공 ⓒ조태민
노네임소수 ‘BLACK’ ⓒ조태민

<BLACK>에서 감정은 모든 것을 삼킨 어둠으로부터 떠올라 신체이미지와 행위로 발광(發光)한다. 서사에 개연하지 않는 감정 그 자체. 역시 드라마적 함의를 소거한 빛과 사운드와 오브제가 절단한 매끈한 단면적 상황으로부터의 사태로 감정은 출현한다. 의미론상으로도 미감상으로도 잉여 없이 조형된 세계, 그 수축과 이완에 필연하여 움직이는 신체이미지의 연속과 관계로서의 춤이 감정을 적시한다. 감정의 구체성과 그 운동에 면밀히 부합하는 신체이미지의 씬들이 작품의 시간을 경과하여 퇴적하면 감정들은 다시 짙고 무거운 공포, 연유를 추적할 수 없는 두려움, 현대인들을 괴롭고 불안케 만드는 어둠으로 뭉쳐진다. 비닐에 휩싸여 절규하는 무용수, 위해한 세계의 기류이거나 위독한 감정의 조류이거나, 그에 휘말리면 절규할밖에. 비닐도 절규도 이미 오래된 상투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미심장한 클리셰임을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동시대 예술작품들의 그 무한 동어반복을 견디어내고 있는 거다. 미지(未知), 허투른 문명 밖 온통의 잔여는, 심지어 주체 안에 잔존(殘存)하는 타자들인 충동과 무의식은 끝끝내 미지적 광역으로 항존(恒存)할 터이니. 알 수 없는 세계와 다스릴 수 없는 자아가 공포와 절규로 귀납되는 걸 어찌 탓할 수 있겠나. 그러나 자연에 대하여 문명은, 그 문명 가운데 예술은 어떻게든 해결과 해방의 단초를 마련해보려는 의지의 소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특별히 감정을 말하는 최영현의 탐구가 충동과 무의식에 대하여 조금은 더 인간적인 감정, 몸에 조금 더 결부하는 감정으로의 역전적 진척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하나의 화두를 다루는 명백히 다른 두 제목 <BLACK><WHITE>. 최영현은 <WHITE>를 통해 소멸을 말하겠다고 하였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소멸은 생성과 작용의 누적을 통과하여 달성된다. 그러니 <BLACK>에 대하여 대별적 감정(오늘의 예술가들이 도무지 말하지 않는 사랑과 이해의, 따뜻하고 가볍고 환한)의 사태들이기를 바랐던 기대가 어긋나는 것은 양해가 된다. 그러나 너무 유사한 관념과 장면의 적층구조는 차이(variation)의 발생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WHITE>적 방점이어야 할 추락하는 몸들의 씬은 느닷없고 쉬워서 감정의 소멸은 그저 죽음, black으로의 투항으로 여겨질 뿐 해소와 해탈의 성취감, white로의 진입을 안내하지 못한다.

노네임소수 ‘WHITE’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옥상훈
노네임소수 ‘WHITE’ ⓒ옥상훈

전작의 정점이었던 비닐의 장면은 역시나 같은 종지부 그 중요한 위치에서 전혀 다른 상황을 환기한다. 인간을 휘감아 절규하게 만들었던 비닐은 이번 작품에서는 바닥에 놓인 두 대의 송풍기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불리어 나아가 허공을 유영한다. 해탈은 과연 주체가 감정을 벗어버리는 것이지만, 그 유려하고 감각적인 움직임 장면의 주체는 단연 비닐이었다. 너무 쉬이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감정, 사람을 초탈해 스스로 자율적이고 초월적인 존재가 된 셈이다. 일원론적 몸의 일로서의 춤 본연으로의 귀환이었던 최영현의 춤이 다시금 멀어져가는 순간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