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꽃씨처럼 날아간 한국무용, 한국 춤 줄기로 모이다
[공연리뷰] 꽃씨처럼 날아간 한국무용, 한국 춤 줄기로 모이다
  • 김여진 강원도민일보 문화부장
  • 승인 2023.05.12 0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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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립무용단 기획공연 ‘불휘’ (4월 26일, 춘천문화예술회관)
- 김매자 박재희 권영심 원미자 등 강원 출신 원로 중진 중견무용가 8명 한 무대에

*편집자 = 지난 5월 3일 강원도민일보에 게재된 다음 기사를 강원도민일보 및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재합니다.

[강원도민일보=춘천] 김여진 문화부장 = 강원도립무용단이 최근 선보인 기획공연 ‘불휘’는 기획과 출연진 섭외 과정 자체가 춤 같았다. ‘강원특별자치도 출범을 축하하며 강원도 출신 한국무용 명무들과 강원도립무용단이 함께 만드는 류파별 춤전’이라는 공연 소개가 붙었지만, 배경을 들여다 보면 이 문장에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강원무용의 역사, 그리고 역설이 있다.

윤혜정 도립무용단 예술감독은 강원특별자치도 출범 기념무대를 위해 지난 해부터 강원 출신 한국무용가를 찾기 시작했다. 시작은 막막했다. 강원무용사를 정리한 연구나 기록은 고사하고, 출향 무용인 명단조차 전무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출향 강원인을 수소문하기 시작한 결과 놀라운 명단이 꾸려졌다. 고성 출신 김매자, 강릉 출신 박재희를 비롯해 한국무용을 이끌어 온 명무 이름들이 연이어 나왔다. 이들을 포함한 원로·중견 한국무용가 8명이 지난  4월 26일 춘천문화예술회관에 처음 모였다.

고향에서의 기획공연에 선뜻 함께하기로 한 이들이 모이자 궁중무용, 무속, 민속, 기방예술, 창무 등 각계 류파별 무대가 한자리에서 펼쳐졌다. 권영심(태백) ‘임이조류 입춤’, 경임순(춘천) ‘정민류 교방장고춤’, 정영수(춘천) ‘이매방류 살풀이춤’, 윤혜정(속초) ‘조흥동류 진쇠춤’ , 원미자(원주) ‘김수악류 교방굿거리춤’, 김수현(원주) ‘김숙자류 도살풀이’, 박재희(강릉) ‘한영숙류 태평무,’ 김매자(고성) ‘김매자류 산조, 숨’까지… 이런 무대가 가능했던 것은 강원을 떠난 무용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갈고닦고 수련한 무용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주류’ 없는 강원무용의 아이러니다.

그간 문화올림픽 실현, 강원도민과의 가까운 호흡을 위해 대중적인 창작요소를 보여줬던 도립무용단은 이날 공연에서만큼은 강원명무들과 함께 전통 한국무용의 진면목을 펼쳤다. 유인상 밴드의 국내 최고 음악과 구음이 어우러져 흥을 돋웠다가, 멋을 풀어내고, 한을 토해냈다. 장승헌 전 춘천공연예술제 예술감독의 사회로 이해를 도왔다.

권영심 무용가의 ‘임이조류 입춤’은 손끝과 버선끝이 마주 볼듯 말듯, 흥을 풀듯 말듯 하는 움직임으로 흥과 멋을 조율하며 첫 무대를 열었다. 기본 움직임만으로도 단아하면서도 힘 있는 강원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듯했다. 경임순 무용가는 이날 출연진 중 지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고향에서 춤 춘 것은 30여년만이다. ‘정민류 교방장고춤’으로 고혹과 절제미를 선보였다. 끊길뻔한 조선의 기예를 이은 일제강점기 권번과 같은 강인함이 무대에 스몄다. 정영수 무용가는 ‘이매방류 살풀이춤’을 통해 섬세한 강약 조절의 춤사위를 통해 정지된 내면과 떠들썩한 세상 사이를 오갔다. 가락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한 발디딤이 집중도를 높여주는 동시에 한국 춤의 기품을 보여줬다.

권영심(태백)의 '임이조류 입춤' (사진 =강원도립무용단 제공)
권영심(태백)의 '임이조류 입춤'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경임순(춘천)의 정민류 교방장고춤 (사진 =강원도립무용단 제공)
경임순(춘천)의 '정민류 교방장고춤'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정영수(춘천) '이매방류 살풀이'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기획을 총괄한 윤혜정 무용가도 '조흥동류 진쇠춤'으로 도립무용단 단원들과 함께했다. 무용단 부임 이후 단원들과 군무로 한 무대에 선 것은 처음이다. 경쾌한 힘이 넘치는 쇠의 장단과 울림이 특별자치도를 위한 액막이처럼 들렸다. 이날 가장 화려한 색의 의상으로 눈에 띈 원미자 무용가는 '김수악류 교방굿거리춤'으로 관객을 만났다. 자유롭게 여러 감정을 담아내다가 의상만큼 선명한 박자감으로 마무리한 그는 커튼콜에서도 흥을 돋우며 박수 받았다.

'김숙자류 도살풀이'를 선보인 김수현 무용가는 한과 사랑의 정서가 미묘하게 버무려진 듯한 선의 아름다움을 펼쳤다. 몸짓 가운데로 기교가 흘렀고, 퇴장하는 순간까지 너울대는 너른 폭의 수건만큼 긴 여운을 남겼다 . 박재희 무용가는 왕비의 춤으로 공연 도중 환호성과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영숙류 태평무'의 초대 보유자인 그는 크지 않은 움직임과 절제된 호흡 가운데에서도 다채롭고 세밀한 발디딤으로 한국무용의 정수를 선사했다.

윤혜정(속초)의 '조흥동류 진쇠춤'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원미자(원주)의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춤 (사진=강원도립무용단 제공)
원미자(원주)의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춤'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김수현(원주)의 김숙자류 도살풀이 (사진=강원도립무용단 제공)
김수현(원주)의 '김숙자류 도살풀이'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마지막으로 자줏빛 고름이 선명한 흰색 의상의 김매자 무용가가 무대에 오르자 모두 숨죽였다. ‘긴 시간, 자줏빛 응어리, 내 핏속에 머문다, 토할 때’라는 짧은 장 제목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넓혔다.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의 매서운 추위, 오랜 기간 몸을 달궈 온 열정, 여전히 감도는 서러움, 그 모든 것을 대입해 볼 수 있는 창작무용은 관객 각자의 자줏빛을 찾아 토해내도록 도왔다.

박재희(강릉)의 '한영숙류 태평무'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김매자(고성)의 산조춤, 숨 (사진=강원도립무용단 제공)출처 : 컬처램프(http://www.culturelamp.kr)
김매자(고성)의 '산조춤, 숨'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도립무용단이 이들 무용가 8명의 공연을 앞뒤로 감쌌다. 소고의 기교와 시나위 춤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도립무용단의 신전통춤 레퍼토리 '윤혜정류 소고춤'이 공연을 열고, 화려하게 휘몰아지는 칠고무가 닫았다. 도립무용단원들과 함께한 윤 감독의 '진쇠춤'이 정가운데에 배치된 것을 보면 처음 마주하는 강원무용의 뿌리들을 관객 앞에 모셔올리면서도, 고향을 떠나 묵묵하게 심신을 갈고 닦아 온 선배들을 보듬어 안고자 하는 구성으로 읽혔다.

오프닝으로 펼쳐진 윤혜정류 소고춤 (사진 =강원도립무용단 제공)
오프닝으로 펼쳐진 윤혜정류 '소고춤'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이번 무대에서 함께한 이들은 서로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동향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공연 프로그램을 본 무용계 인사들도 모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윤혜정 감독은 “강원특별자치도가 출범하는 시점에서 넓게는 문화계, 좁게는 강원무용도 소리없이 성장했고, 엄청난 명무들을 배출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며 “무용계가 몰랐던 강원의 저력이 드러나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일정이 맞지 않거나 강원 출신임을 늦게 알게 되어 이번 공연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도 많다. 불휘 ‘시즌2’를 꾸려도 넘칠 정도다. 척박한 문화예술 환경에서도 강원을 떠나지 않고, 지역 무용의 맥을 이어온 무용가들도 이날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김말애(삼척) 전 경희대 교수를 비롯해 유옥재(춘천) 전 강원대 교수, 김영주(춘천) 전 도립무용단 상임안무자, 박선자(강릉)·고은숙(원주)·양숙희(속초) 무용협회장, 김인숙(춘천) 전 안산문화재단 이사장, 정혜진(춘천) 서울시립무용단장, 권금향(태백), 김희정 태백민예총 회장, 임수정(춘천) 경상대 교수, 정혜(원주) 전 서울예술단원, 김윤수(속초) 김윤수댄스컴퍼니 대표, 우재현(원주) 문화강국을만드는사람들 대표, 김유미(인제) 고양예고 무용반 전임 등의 이름이 영상으로 무대에 올랐다.

오히려 한 가지의 류파가 강원도에서 자리잡았다면 이날 공연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 류파가 없는 강원은 호남, 영남, 경기 등 하면 떠오르는 명인이 있는 다른 지역들과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고향을 떠난 무용가들은 출신을 밝히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말없이 이매방·김백봉·한영숙·임이조·김수악 등 명인들에게 춤을 배웠다.

이번 공연을 통해 강원 근현대 무용사의 체계적 정립을 시작해야 할 당위성도 확인됐다. 홍천 태생으로 알려진 신무용의 선구자 최승희가 강원무용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다. 그러나 실제 한국무용이 전수체계를 갖춰 발전해 온 시기는 한국전쟁 후인만큼 이후 활약한 무용가들을 강원무용 1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특히 최근 별세한 김백봉 선생 등이 한국무용 전공을 맡아 국립무용단을 창단한 연도가 1962년임을 고려하면 강원 무용사의 핵심에는 이날 공연 무대에 오른 원로·중견 명인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내 무용가 산실의 양대 산맥인 이화여대와 경희대에서 모두 강원 출신 무용가들이 후학을 기른 점만 봐도 주요 포스트에서 도 출신 무용가들의 중심을 잡아왔음을 알 수 있다. 김매자 선생이 이화여대, 김말애 선생이 경희대에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특히 한국무용은 지난 수십년간 조선의 전통무용만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무용과 구별하는 개념에서 현대적 창조 등을 거쳐 왔다. 여러 류파에서 이수자들이 뻗어나가고 왕가와 기예, 민중 사이, 전통계승과 창작 사이에서 각자만의 예술세계를 넓혀온 것이 한국무용계다. 이날 공연에서 확인한 강원무용의 역사적 흐름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한국 춤 역사를 이어온 강원 무용가들의 삶 자체가 강원 춤의 역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출연진들에게도 남다른 감상을 안겼다. 고성과 영월 상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후 부산으로 간 김매자 무용가는 “부산 일대 지역에서 저는 타향 출신 예술가로 분류되고 있다. 늘 강원에 뿌리를 두고, 또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고 밝혔다. 한국무용 분야의 축제를 국내에서 처음 만든 그는 강원도에서 무용축제를 계속 이끌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그가 설립한 창무예술원이 주최하는 창무국제공연예술제가 내년이면 30회를 맞이하는 가운데 2016년 고성 화진포에서도 연계축제를 열었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북고성에서 남한으로 올 때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낸 작품 ‘얼음강’을 통해 고향의 기억을 계속 소환해 왔지만 지역의 응답과 관심은 그를 ‘출향인’이라고 부르는 지역보다 오히려 적었다. 김 무용가는 “동향 무용가들이 모두 다른 류파인데다 각자 그 분야에서 이름난 분들이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면서 이번 공연을 계기로 강원 무용인에 대한 지역의 애정이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무엇보다 도립무용단의 젊은 단원과 지역에서 공부하는 차세대 무용가들에게도 희망과 자부심을 주는 계기가 됐다. 윤혜정 감독은 “출향 명무 분들과 도립무용단원들이 함께 공연을 완성시킨 것은 명실상부한 프로 단체로서 손색없이 성장했다는 반증이어서 매우 보람되고 기쁜 일”이라고 밝혔다.

클로징 무대로 펼쳐진 강원도립무용단 칠고무 (사진 =강원도립무용단 제공)출처 : 컬처램프(http://www.culturelamp.kr)
클로징 무대로 펼쳐진 강원도립무용단 '칠고무' (사진제공=강원도립무용단)

강원 땅에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민들레 꽃씨처럼 전국 곳곳으로 날아갔던 이들이 한국무용의 큰 줄기가 되고, 각 류파에서 꽃을 피워 다시 고향에 모였다. 현대적 창조를 거치며 면면히 흐르는 한국무용의 한가운데, 강원의 뿌리 속 흥과 멋, 한과 태가 부피감을 갖게 됐다. 이 부피감을 계속 늘려갈 수 있을까. 이번 공연처럼 뿌리를 찾고, 꽃씨를 모으고, 아래서부터 다시 피워내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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