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논객의 춤시선-14]​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낭만논객의 춤시선-14]​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 장승헌 공연기획자
  • 승인 2023.05.1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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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의미와 결과물이 주는 행복감, 그리고 전통예술 변주와 국악의 힘

[더프리뷰=전주] 장승헌 공연기획자 = 기대 이상의 완성도 높은 공연 결과가 놀라웠다. 전라북도 전주지역 공공단체의 공연장에서 모처럼 중견 중진 무용가들과 연주자들이 열과 성을 다해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서로를 배려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모습에서 오는 신묘한 감정이 오롯이 느껴진 토요일 오후였다. 달포 전 국립무형유산원 예울마루에서 2시간 30분 동안 레지던시 두 번째 자문을 마치며 느꼈던 민낯의 만남, 그때의 생생한 기억이 소환되었기 때문이리라.

봄 날씨가 적당하게 아름다웠던 지난 4월 29일 오후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 대공연장 무대에서 무용가 2명(이노연, 공민선)과 가곡 이수자(김미경)의 조합으로 시연 발표무대 <숨·가·춤>이 펼쳐졌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것은 필자가 이번 레지던시 지원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 사람의 전통예술 전승자들이 지난 3개월간 얼마나 아프면서 성장했는지를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이들이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 늦은 오후까지 로드맵(규정)에 따라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시행착오를 극복해 가면서 기량을 다지고 작품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지난 몇 년간 이 지원사업의 성과와 결과물에 대한 여론을 수렴한 결과, 올해부터는 진행 방식을 바꾸고 ‘2023년 무형유산 제작 예능풍류방 레지던시’라는 다소 긴 제목을 달았다. 지난 1월 12일 사업공고를 시작해 공연제작 및 자문을 거치고 스태프 회의 및 홍보물 사진 촬영을 마쳤다. 이날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지난 3개월 여 동안 진행된 로드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만큼 공기관 지원사업에 대한 신뢰감 확보는 물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작품 감상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 프로젝트임에 틀림이 없다.

우선 심플한 무대 공간, 연주석의 미장센에 시선이 머문다. 대부분 무대 상수(객석 기준 오른편) 나 그 반대인 하수, 또는 프로시니엄 무대의 뒷공간에 연주자들이 자리하는 통례적 풍경에서 탈피했다. 이날 무대는 ‘기역, 니은’ 한글 모형의 단상을 무대미술 효과로 활용했다. 이같은 세련된 형식의 악기별 연주자 자리 배치가 새로운 풍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춤꾼들의 동선과 춤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는 무대공간 구성과 연주를 통해 관객들을 작품에 몰입시키면서 담백한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이매방 류 승무 이수자 공민선이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에서 대승무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사진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이매방류 승무 이수자 공민선이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에서 '대승무' 춤사위를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프롤로그격인 가곡 전승자 김미경이 등장하며 정악 분위기로 서막을 알린다. 다소 긴장한 듯한 소리에 잠시 불안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곧바로 승무의 북소리와 장구 장단이 합을 이루며 역발상 실연의 묘미를 선사했다. 1장 ‘대승무’는 ‘구음승무’와 ‘회심바라승무’로 이어졌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이매방류 승무 이수자 공민선은 허리를 엎드린 채 시작하는 기존 춤 순서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발상전환을 시도했다. 조심스레 승무북에 다가서며 기존 상식을 비틀어 낯선 분위기를 연출했다.

염불장단으로 시작되는 기존 승무 순서를 후반부에 배치시키며 곧바로 대북 앞에 선 채 비장하게 북가락으로 숨을 고른다. 이어지는 법고 장단과 가락이 집중감을 견인한다. 북가락을 내려놓고 목탁 소리를 시작으로 자신만의 호흡으로 새하얀 장삼을 힘껏 공간에 날리며 그녀만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어느새 검정 장삼에 노랑 치마저고리를 입은 이노연이 빠른 걸음으로 무대에 자리해 다소곳한 먹장삼의 팔사위를 통해 마치 수묵화를 그리듯 편안하게 장삼자락을 펼치며 좀 전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꿔놓는다. 이노연은 자신만의 춤 내공으로 국악기 연주 흐름의 분위기까지 바꾸어 놓은 듯했다.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이노연의 공연 장면 (사진 국립무형유산원 제공 )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에서 이노연의 '회심바라 승무' 장면 (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제공)

지구촌 모든 사람의 얼굴과 표정이 다르듯,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나 성장한 무용가들의 춤의 결도 저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전통예술 전승(이수자)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두 춤꾼을 보면서 실감했다. 같은 레퍼토리이지만 해석이 서로 다르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2장, 삭대엽 풀이에서 먼저 섬세하고 애잔한 해금 연주(이동훈)를 배경으로 김미경의 목소리가 얹어졌지만 무척이나 안타까운 소리로, 조금씩 음정이 떨어지며 불편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곧바로  공민선이 살풀이춤(이매방류)에서 명주수건을 흩뿌리며 무대를 이어갔다. 항암치료 중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먹먹했지만 과하지 않은 감정처리와 함께 춤의 진심에 담아낸 그녀의 용기가 새삼 경이로웠다. 그 춤의 마음을 이어받은 이노연의 <남녘 살풀이>는 의상부터 대조적이었다. 머리에 끈을 두른 상주머리 코스프레를 하고, 먼저 떠난 이들에게 전하는 회한과 치유의 헌무로 또 다른 정서와 ’한‘이란 화두를 절절이 객석에 전했다.

공민선의 살풀이춤(이매방류) (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마지막 3장 ‘춤, 떨림으로 소리를 담다’는 이번 ‘숨·가·춤’ 공연의 백미였다. 진도 출신 명인 박병천류의 진도북춤. 생전 선생께서 대부분 여성 무용수들에게 이 마당춤(들녘춤)을 전수한 탓에 의상을 곱게 차리고, 혹은 서민적 분위기의 치마 저고리를 입고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전라남도 끝자락, 진도의 대자연, 들녘이나 바닷가에서 조금은 투박하게 추어지던 연희적 놀이(춤)가 극장무대에 오르기 시작하며 그 원형의 멋과 흥, 신명이 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여 자문을 할 때 두 무용수의 춤사위와 북장단이 선연하게 다른 만큼 음양의 대비를 강조하며 남녀의 결이 다른 춤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3장 ‘춤, 떨림으로 소리를 담다’에서 이노연과 공민선은 자유로움 그 자체의 당당한 들녘 춤을  재현했다. (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공민선은 황톳빛 바지 저고리와 머리띠를 상투로 장착하고 그간 치마 속에 갇혔던 다리에서 파생되는 발놀음을 자유로움 그 자체의 당당한 들녘의 춤으로 재현했다. 다른 여러 지역에서 추어지는 농악 북춤과는 다르게 양 손을 굳건하게 쥔 북가락의 장단과 엇박의 타악, 특유의 두드림은 여느 북춤에서 들을 수 없는 명품 전통춤으로 손색이 없었다. 한껏 분위기를 띄워 놓은 그 신명을 이노연이 등장해 손목을 활용한 정교한 장단과 가락을 무대에서 펼치자 연주석에서도 상쇠소리와 구음이 흥을 더욱 올려 놓기에 이른다.

음악감독 이태백은 아쟁을 내려놓고 상쇠 역할을 자청했다. 꽹과리를 손에 들고 아쟁 연주자에서 돌연 사물놀이 리더의 흥겨움을 연출했다. 연주석에서 벌떡 일어나 장구, 징, 대금, 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대표 타악기의 흥과 신명, 그리고 ’가무악 일체‘의 완성형으로 공연장을 축제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객석으로부터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간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고민들에서 잠시 해방되는 일탈의 행복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출연진의 숨(호흡)들이 최고점에 이르자 순간 쇳소리와 함께 이노연의 검무가 에필로그 형식으로 무대공간을 채웠다.

에필로그 격으로 펼쳐진 이노연의 ‘검무‘ (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어쩌면 연주회에서 마지막 곡이 끝나면 으레 앙코르를 요청하는 분위기를 미리 파악해 준비한 듯한 이 짧은 칼춤이 ‘기운생동’이라는 단어를 소환시키면서 이날 공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태백 음악감독은 아쟁 및 쇠 연주는 물론이고, 공연 전체에 적절한 소리와 각 연주자의 역량을 최대치로 조율해 주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한껏 높임으로써 단연 이날 공연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두 무용가 역시 닮은 듯 서로 다른 춤의 마력을 객석에 선물하며 중진 전통춤꾼으로서 그간의 노력과 내공의 춤사위를 펼쳐 보였다.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에서 가곡전승자 김미경이 해금 반주로 공연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다만 작품의 전반적 연출에 집중한 후유증인지, 가곡 이수자 김미경은 2장 ‘삭대엽 풀이’를 이끌어 가는 동안 음정 불안을 드러냈다. 아울러 해금 연주(이동훈)와의 협업도 기준치를 밑돌아 이번 작품에 옥에 티로 남은 점은 무척이나 아쉽다. 이번 공연은 사회자 없이 오롯이 무용가와 소리꾼, 그리고 7명의 빼어난 연주자들만이 참여해 순도 높은 결과물을 창출했다는 점 또한 높이 치켜세우고 싶다.

이번 레지던시 기획공연을 지켜보며 몇 가지 드러나는 지점을 발견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향후 이런 형식의 지원을 확장해 좀 더 많은 중견 중진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울지역은 단 한 번, 신기루처럼 1회 공연이 대부분이다. 민간 독립 연주자와 춤꾼들은 리허설 시간조차 짧아 기대했던 완성도는 커녕 아쉬움이 가득한 채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모두가 알면서도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이런 문제는 민간 예술가들에게는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여기에 공기관이 주목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특히 젊은 창작자나 원로 예술가 예우 성격의 지원도 좋지만 50-60대 중진 예술가들은 지원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좌시하지 말아야 한다.

공연자들과 연주자들이 화합하며 극적 무대를 선보인 국립무형유산원 레지던시 기획공연 ‘숨·가·춤’ (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공연계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이런 형식의 레지던시 재교육 사업은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국악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전통 공연예술계에 입문해 오랜 시간 스승께 사사한 종목에 목숨 걸고 학습과 반복 연습을 통해 전수자, 이수자 자격증을 취득했음에도 개인공연 무대를 마련한다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기만 하다. 향후 이와 같은 어려움을 고려해 조금은 긴 호흡으로 제작 과정을 공유하며 예술가들이 감수해야 하는 수많은 어려움에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사례가 줄어들기를 진심으로 희망해 본다. 이번 공연의 합평회나 결과보고 모임을 통해 진정성 있는 생산적 의견들이 적극 수용되길 바라며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작품으로 재공연의 기회가 반드시 다른 지역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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