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동백꽃으로 피어난 여인의 슬픈 사랑
[공연리뷰] 동백꽃으로 피어난 여인의 슬픈 사랑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6.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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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리아 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1막 공연 모습 (사진제공=)
'라 트라비아타' 1막 공연.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대한민국에 오페라라는 장르가 선보인지 75년이 지났다. 최초의 오페라는 1948년 1월 명동 시공관에서 <춘희>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였다. 소프라노 김자경과 테너 이인선이 비올레타와 알프레도를 맡았다. 이인선은 이 공연의 제작자이기도 했다.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제14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이 올랐다.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 대한민국 오페라 75주년과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알맞은 선정이다. 카를로 팔레스키가 지휘를, 최이순이 연출을 맡았다.

2막 1장 공연 모습 (사진제공=)
'라 트라비아타' 2막 1장.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무대가 굉장히 아름다웠다. 흰 색의 박스를 세우고 그 안에 커다란 동백꽃을 걸어두었다. 박스형 무대는 쇼윈도를 표현했고, 쇼윈도 안에 피어있는 동백꽃은 쿠르티잔(courtisane)인 비올레타를 상징했다. 비올레타가 알프레도와 행복한 날을 보내는 2막 1장에서는 조명과 영상으로 무대를 연초록빛으로 채워 동백꽃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제르몽에게 이별을 강요당할 때의 비올레타의 심경은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표현되었다. 비올레타가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간 2막 2장의 무대는 샹들리에 장식 같은 쇠사슬이 늘어져 동백꽃을 가렸다.

3막에서는 흰 천으로 동백꽃이 덮여 있었다. 무대디자이너 신재희의 말에 의하면 ‘폐업한 상점의 쇼윈도’같은 느낌이었다. 비올레타가 숨을 거두는 순간 흰 천이 떨어지고 동백꽃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비로소 비올레타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같았다. 세련되고 우아한 미장센이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최이순 연출가는 섬세하게 캐릭터를 분석했다. 첫 등장부터 자기 몸의 이상을 알고 있는 비올레타는 쾌락의 파티로 근심을 지우려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알프레도에게 도도하게 거절하지만, 실상은 자신은 고귀한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며 체념할 뿐이다. 쇼윈도 안의 꽃 같은 쿠르티잔은 그저 불나방처럼 짧게 타오르려 하다가, 불도저처럼 적극적인 알프레도에게 불현듯 의지해 버린다. 소프라노 홍혜란은 비올레타의 내적 갈등과 변화를 세밀한 호흡과 영롱한 울림으로 표현했다. 레쩨로 소프라노로 출발했던 홍혜란의 가녀린 소리는 ‘아, 그이였던가’의 최고조에서, 제르몽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며 죽어갈 때, 더욱 흡인력을 발휘했다. 파티장의 화려한 주인공은 홀로 있을 때 더 외롭고 작아 보였는데, 연출이 노린 이 대비효과를 살린 것은 홍혜란의 힘이다. 알프레도의 최원휘도 사랑에 빠진 순수한 청년을 진지하게 연기했다. 최원휘는 2020년 메트에서 알프레도로 데뷔한 바 있다. 두 사람의 음색은 조화로웠고, 두 사람에게 기대했던 케미스트리도 충분히 보여주었다.

2막 2장 공연 모습 (사진제공=)
'라 트라비아타' 2막 2장 공연 모습.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제르몽을 연기한 바리톤 김동섭도 주목할 만했다. 일반적으로 풍부하고 윤택한 음색의 바리톤이 주로 제르몽을 맡아왔다. 제르몽은 지방 유지의 느낌이고 가족이기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김동섭의 제르몽은 시골에서 집안의 기둥인 아들을 잡으러 올라온 가련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집안을 일으키라고 도시로 보냈더니 여자와 향락에 빠진 아들을 데리러 온, 그래서 아들 몰래 여자에게 헤어져 달라고 사정하는 힘없는 노인. 젊은 바리톤들이 제르몽을 노래하면 음량이 세서 비올레타 앞에 다소 고압적으로 보이지만, 김동섭은 정말 시골에서 온 지친 노인으로 보였다. 다소 메마른 음색이 훨씬 진정성 있게 들렸다. 그래서 엔딩에서 그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할 때 더 와 닿았다.

또다른 캐릭터의 발견으로 하녀 안니나를 꼽을 수 있다. 주로 젊은 신인 소프라노들 몫이었던 안니나를 소프라노 신선영이 맡아 현실감을 높였다. 오랜 시간을 주인과 함께한 하녀는 순종적이거나 수동적이지만은 않았다. 비올레타의 재산을 팔아서 호사를 누리는 줄도 모르는 알프레도에게 툴툴거리며 사실을 밝혔고, 비올레타가 아플 때 충직하게 그 곁을 지켰다. 안니나의 비중이 이렇게 커 보인 무대는 처음이다. 닥터 그랑빌 역시 잠시 나오는 캐릭터를 넘어 개연성을 부여했다. 그에 비해 뒤폴의 비중은 작아보였다. 사실 뒤폴도 설정하려면 얼마든지 빌런화시킬 수 있는 캐릭터인데 연출가는 비올레타와 알프레도에 집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카를로 팔레스키의 지휘로 뉴서울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유려하고 깊이 있게 음악을 끌고 나갔다. 비올레타의 희생이 인간의 위선 속에서 빛날 수 있는 것은 베르디의 음악 덕분이다.

1991년 창단된 글로리아 오페라단은 민간 오페라단의 어려움을 딛고 언제나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 왔다. 2021년부터 글로리아 오페라단과 합을 맞춰온 지휘자 카를로 팔레스키와 최이순 연출가는 <라 트라비아타>로 절정을 보여준 것 같다.

'라 트라비아타' 3막 공연 장면. (사진제공=글로리아 오페라단)

비올레타의 순애보는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쾌락을 좇는 시대, 영원한 사랑이 의심받는 시대다. 죽어서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노라는 여인의 사랑은 베르디의 음악을 입고 구원받는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한 여인을 ‘라 트라비아타(타락한 여인)'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녀에게 헌정하는 무대 위 동백꽃이 처연하게 빛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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