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10] 무당의 춤에서 '무당춤' 사이, '춤 프로'가 있었다.
[신무용 다시보기-10] 무당의 춤에서 '무당춤' 사이, '춤 프로'가 있었다.
  • 김윤지
  • 승인 2023.07.0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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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려운 이야기부터 꺼내본다.

[더프리뷰=서울] 김윤지 무용이론가 = 신무용으로서의 <무당춤>에 대한 글을 시작하기 전에, 조금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부터 해본다. 무당은 굿의 주체자이자 연희자로 그것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며, 주로 여성이다. 굿의 연원은 한국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19세기에 제작된 『무당내력 巫堂來歷』을 통해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이 책은 무당의 연원을 비롯하여 굿 형성의 과정, 굿의 대표적인 거리와 설명 등에 대한 핵심적 관점들을 제공해 주며, 평면에 그려진 그림들은 오늘날 연행되고 있는 여러 무당춤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서문에는 무당의 기원에 대해 단군이 태백산 단목 하에서 신교를 개설하고, 이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를 비치고 있다. 이는 <삼국유사> 단군신화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단군조선에서 무속이 시작되었고, 농경사회에서 곡신신앙이 가정에까지 보편화되면서 무속신앙이 자리를 잡았다고 보고 있다.’는 메시지도 한국의 굿과 무당의 내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를 제공하고 있다.

이어진 본문에서는 서울의 대표적인 굿거리를 열두거리로 구분하여, 거리별 이미지들을 도상화했다. 본격적인 굿을 시작하기 전, 부정의 생각이나 무명의 잡귀가 있으면 이를 안정시키는 의미로 몸과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기 위한 부정거리로 오프닝을 장식한다. 이후 단군을 위한 청배의 감응청배가 이어지고, 단군의 성조인 삼신제석을 위한 제석거리 그리고 농경신인 별성신의 거리, 인간의 소원을 이뤄주는 신을 모시는 대거리가 나온다. 특정 질병을 주관하는 신을 모시고 위성하는 호구거리가 있으며, 조상신을 청배하여 생전에 못다 한 한을 풀고 후손의 복을 비는 조상거리가 인간적인 신으로 나타난다. 이후 무당의 조상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만신말명의 거리가 있는데, 이 거리는 무업을 하다가 죽은 귀신을 위한 거리이다. 병을 준다는 잡귀를 제거하는 축귀거리와 광대의 신을 위한 창부거리, 성주신의 유래를 구연하는 성조거리, 벼슬아치를 나타내는 신의 거리인 구릉거리 등이 서울 굿의 대표적인 거리순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굿의 목적과 대상이 거리마다 분명하게 나타나 있고, 각자의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 욕구들을 여과 없이 꺼내고 있다. 부정을 부정하고, 다산과 잉태를 기원하고 병마를 방어하며, 출세 등의 바람들을 구성진 장단과 화려한 연희, 그리고 즐거운 유희가 합쳐진 굿으로 발현시키고 있다. 결국 우리의 굿은 자연 · 신 · 국가 · 왕 · 신하 · 개인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제액 초복'의 목적 하에  우리 삶이 듬뿍 담긴 종합적 극이자 상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굿 문화는 점점 약해지고 소멸하는 추세이다. 문화도 생물의 종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산물이며, 그 적응 가치 또는 선호 가치의 정도에 의해 퇴색되기도 하고 진화하기도 한다. 현 시대의 흐름, 요구, 감각 등을 고려하면 전통적인 굿 문화의 ‘씩씩한 행보’가 계속될 것이라고 단정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춤 예술의 관점에서 굿이라는 대상 · 행위 · 심벌, 그리고 굿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묘한 기운들은 비일상적인 동시에 강한 인상과 개성을 주기 때문에 또 다른 예술 소재가 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굿과 무당이라는 대중적인 신앙문화는 그 자체도 전통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지만, 현대예술의 문화원형 대상이자 무궁무진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소중한 옛 것을 어떻게 하면 춤의 예술로 끌어올릴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구슬이 있어도 그것을 용도에 맞게, 기호에 맞게, 그리고 요구에 맞게 꿰어야 하지 않겠는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나는 10여 년 전, 진도와 부산 일대를 돌면서 굿판을 연구했다. 굿판에서 펼쳐지는 무당의 독특한 춤 행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움직임에 대해서 굿춤을 춘 보유자에게 직접 물었다. “이 거리에서 이 움직임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왜 이 움직임을 이때 하셨나요, 이 움직임은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연희되었나요?” 춤 연구자로서는 꽤나 진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그 분의 대답은 공허할 만큼이나 단조로웠다. “그때그때마다 그냥 합니다. 사실 장단은 서울 쪽의 한예종이나 중앙대 타악기 전공자들이 굿 장단을 배우기 위해서 여기까지 내려오고, 우리는 그들을 양아들로 삼아서 가르쳐 주기 때문에 굿 장단은 잘 이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춤은 이것을 배울 전공자도 없고, 딱히 배울 춤 내용도 없어서 춤 부분이 점점 약해지는 상황이죠.”라고 응하셨다. 이 대답은 내가 왜 이 현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한국 춤의 어떤 부분들을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해주었다.

한국 전통사회의 종합적 예능인에 의해 춤의 움직임은 조금이나마 연희될 수 있었지만, 근세 · 근대 · 현대로 이어오는 과정에서는 ‘춤 프로’의 부재로 인해 굿의 춤은 일차원적이고 사실적이며 단순해진 것이다. ‘춤 프로’의 전문성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렵고, 귀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이러한 현상은 굿뿐만 아니라 탈놀이, 농악 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것이다. 전통문화가 다양한 예술적 소재들을 담고 있고 예술적 모티브를 선사한다고 해도, 그것을 또 다른 전문적인 작품으로, 전문적인 춤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춤 역사에는 예술로서의 춤 장르 안에서 그런 이동을 해온 사례가 많다. 승의 무를 <승무>로, 천의 무를 <수건춤> <살풀이춤> 등으로, 부채를 들고 추는 춤을 <부채춤>으로, 북을 들고 추는 춤을 <고무> <무고> 등으로 완성도 있게 만들어 낸 것이다. <무당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적이고 직접적이며 즉흥적인 무당의 춤을 인상적인 예술로 이동시킨 <무당춤>이 1930년대 이후부터 무대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때의 기록은 1937년 최승희 공연에서 <무당춤>으로 연희되었고, 이 춤은 한국춤 관련 주요 저서들에서도 다뤄졌으며, 관련 기록도 다른 춤에 비해서 많은 편이다.

[사진1] 1930년대 최승희의 '무당춤'_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진1] 1930년대 최승희의 '무당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재 서울 소재 공연예술박물관 전시실에서도 이 춤의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영상 속 춤은 사진에서 보여주는 의상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고, 손에 부채를 든 채 아주 빠른 장단에 맞춰 뛰고 도는 동작을 수행한다. 복장의 이미지와 장단의 구성력을 고려할 때, 이 춤은 서울 굿의 영향을 받아서 무대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서울 무당춤>과 <시골 무당춤>이라는 작품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들은 한국 무용사 관련 주요 저서 등에 작품명만 간략히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 수 없다. 다만 작품명을 통해 무당의 춤을 민속적인 춤 자원으로 보고 지역성을 강조하는 춤으로 무대화한 것으로 짐작만 할뿐이다. 나아가 이 시대의 <무당춤>은 향토적인 춤문화를 토대로 근대적 외래요소들을 적절하게 접목시킨 재래적 신무용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무용 작품을 본격적으로 무대화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1945년 해방과 1950년 6.25전쟁의 환란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춤들은 위기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휴전 이후 민족문화 재건이라는 시대적 요구로 인하여 이 춤의 조각 찾기는 아래 사진처럼 시작된다.

[사진 2] 1950년대 무당춤의 재현 장면_ 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2] 1950년대 무당춤의 재현 장면. 출처: 국가기록원

국가적 차원에서 촬영되고 홍보된 위 <무당춤>은 1980년대까지 대외적인 국가 공식행사의 주요 레퍼토리로 등장한다.

[사진 3] 1972년 '무당춤'의 오색기 매듭 장면_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3] 1972년 '무당춤'의 오색기 매듭 장면. 출처: 국가기록원

위 사진의 <무당춤>은 1972년 국정홍보를 위해 국립영상제작소에서 촬영한 4분 가량의 영상물이다. 무대 중앙의 천장에는 오색의 수많은 긴 천이 늘어트려져 있다. 그 천들을 10여 명의 무용수들이 하나씩 잡고 춤을 춘다. 이내 천을 매듭지을 수 있는 동작으로 이어가다가 천을 가지런히 원 둘레 끝에 내려놓는다. 그 천들이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고 무용수들은 바닥에 놓인 부채와 방울을 양손에 들고 매우 격렬하게 흔든다. 좌 · 우 · 상 · 하로 빈틈없이 빠른 장단에 맞춰 쉼 없는 움직임을 이어간다. 굿 장단에서 사용되는 ‘구궁 타법’ ‘더르덩 타법’ ‘더르덩덩 타법’ ‘덩더궁따 타법’이 몰아치며, 올림채장단과 푸너리장단이 들린다. 기본 장단이자 사물놀이 장단인 자진모리장단과 휘모리장단도 사이사이 들리는 듯하다. 경기도 굿 장단이 이 춤의 배경 장단으로 사용된 듯하며, 매우 단조로운 타법이지만 거의 때리듯 몰아치는 급행 장단에 맞춰 춤의 동작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중에서도 춤추는 프로들은 큰 원의 대형을 만들기도 하고, 뒷걸음질하면서도 두 개의 원을 순식간에 변형시키며 구사해 낸다. 다시 2열로 나열하면서 무대 정면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한 발씩 들면서 뛰는 동작을 가볍게 소화해 낸다. 바닥으로부터 30센티미터 이상 ‘깡충깡충’ 도약하기도 하고, 두 발로 뛰면서 무대 앞뒤로 움직인다. 이때의 춤 동작은 매우 역동적이고 경쾌하며 가벼운 느낌을 준다.

무대 대형이 다시 하수 쪽의 사선 두 줄로 변형되고, 가슴을 살짝 뒤집는 동작과 목 또는 손목의 스냅을 활용하는 동작, 스타카토처럼 한 동작씩 끊어서 수행되는 형상들이 구사되면서 두 줄 사이로 왕무당역(고 강선영)의 솔로가 등장한다. 사선 두 줄 사이의 늘어져 있는 흰 천을 위로 올리는 그 순간, 빈 공간 속 왕무당은 무대 쪽으로 나오고, 다시 흰 천의 중앙을 가르기도 한다. 무대 위 무용수들과는 다른 쾌자 의상을 입은 또 다른 무당역을 맡은 무용수까지 합세하면서 빠르고 강하고 경쾌한 무당춤은 마무리된다.

[사진4] 1972년 '무당춤' 왕무당역의 故강선영_출처:국가기록원
[사진4] 1972년 '무당춤' 왕무당역의 故강선영. 출처: 국가기록원

이 작품은 이 공연 이후 아마 오랫동안 유명세를 치렀을 것이다. 지금 봐도 손색없을 정도의 작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1980년대에도 국가대표 무용단 공연에서 무당의 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굿의 무당 움직임을 탄탄한 안무력으로 승화시켰고, 굿 장단을 완벽하게 소화시킬 수 있는 춤 테크닉이 완벽했으며, 공연예술로서 갖춰야 하는 구성 요소들의 연출이 매우 조화롭다. 굿의 신비로움, 무속 요소의 색채감, 무속 장단의 역동성 등이 ‘춤 프로’에 의해서 살아있는 <무당춤>을 보여준 것이다. 생기 있는 춤의 기운으로 모든 공간을 채운 것이다. 연구자의 관점에서 이 작품이 지닌 가치를 더해본다면, 객관적인 고증을 통해서 작품의 깊이를 더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아래 <무당 내력>에서 귀신을 쫓는 ‘축귀’라는 거리의 무당 형상과 도구들을 <무당춤>에서는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림 1]19세기  『무당내력 巫堂來歷』 속 축귀 형상_출처:  『무당내력 巫堂來歷』
[그림 1]19세기 『무당내력 巫堂來歷』 속 축귀 형상. 출처: 『무당내력 巫堂來歷』

위 그림의 축귀 거리에서 무녀는 흑전립을 쓰고 붉은 저고리에 녹색 치마를 입고 검은색 쾌자를 걸쳤다. 오른손에는 적색, 황색, 청색 세 개의 기를 들고, 왼손에는 백색과 흑색 두 개의 기를 들고 서 있다. 오방의 색기를 통해 귀신을 쫓고 있다. 이런 오방색이 지닌 기능과 의미까지 이 <무당춤>에서는 의상과 천 도구를 통해서 반영했다. 결국 이 춤이 지닌 작품성, 우수성, 학술성 등이 맞물리면서 이 춤은 한국을 대표하는 춤 무대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30년대 처음 무대화되어 선보였던 한국적인 신무용 <무당춤>은 또다시 춤 문화원형의 대상이 되어 1970년대, 1980년대의 <무당춤>으로 진보하였다.

<무당춤>의 상상과 표현, ‘춤 프로’가 답이다.

무속은 우리 민족사 속에서 자생한 고유 신앙으로, 유교, 도교, 불교 사상을 다양하게 흡수했다.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 기질에 부응하면서 대중신앙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고, 각 시대 상황에 따라 일정한 역할도 수행해 왔다. 무속의 춤 요소들을 모아 1930년대 <무당춤>이라는 작품화를 이뤄냈고, 우리 민족문화의 재건과 구축을 위한 도구로서 1970년, 80년대에 <무당춤>은 가동되었다. 이 춤을 온전하게 보전하여 전승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춰 ‘콘텐츠화’ ‘디지털화’ ‘미래화’하여 시대의 기호에 맞는 예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에 주목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매 시점마다 춤을 상상하고 표현하고 더 나은 무엇으로 진화시킬 수 있는 그 중요한 작업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 높은 단계의 작업을 ‘춤 프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춤의 모티브를 기억해 내고, 춤을 사유하고, 춤을 상상하고 결국 춤을 만들어 내는 것,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춤을 전문적으로 체득하고 연마하여 표현하는 ‘춤 프로’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춤 뿐만 아니라, 소중한 문화적 조각들을 더 나은 그 무엇으로 이끌어내어 한국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주인공들이 많이 배출되는 그 날을 희망해 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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