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음악적 시간의 연금술사, 바리톤 양준모
[공연리뷰] 음악적 시간의 연금술사, 바리톤 양준모
  • 박수인
  • 승인 2023.08.11 0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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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회의 모든 시간을 음악 작품으로 만드는 시간의 주인

[더프리뷰=서울] 박수인 음악학자 = 음악은 시간과 함께 펼쳐지는 소리 예술이다. 음악을 통해서 우리는 미처 인식할 새 없이 흘러가 버리고 마는 시간을 감각한다. 음악회장에서 음악을 듣는 경험이 값진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거기서는 유려한 선율과 아름다운 목소리뿐만 아니라 소리가 멈춘 침묵의 순간까지 음악이 된다. 그러니 음악가의 작업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좋은 음악가는 음악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시간과 공기, 기운까지도 음악적으로 고려한다. 그렇게 하나의 음악회는 그 자체로 음악이 된다. 그 음악 만들기에 동참하는 한, 무대 위 연주자뿐 아니라 객석에 앉은 청중, 객석 안 질서를 돕는 안내원 모두 훌륭한 음악가가 된다.

지난 8월 4일 금요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열린 바리톤 양준모의 리사이틀은 무엇보다도 내게 음악이 소리와 침묵의 시간예술이라는 점을 곱씹게 하는 계기였다. 좋은 쪽으로도, 그렇지 않은 쪽으로도.

양준모 독창회 (사진제공=영음예술기획)

오후 8시 정각. 객석 조명이 어두워지자 무대가 밝아졌다. 크고 작은 말소리가 잦아들고 금세 긴장되는 공기가 몸을 감쌌다. 얼마 뒤 바리톤 양준모가 무대로 들어섰다. 객석에서는 그를 반기는 박수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무게 있는 발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피아노 옆에 선 성악가는 우측 관객에게 한 번, 좌측 관객에게 또 한 번 묵직한 눈빛으로 인사했다. 웃음기 없는 짙은 인상과 강렬한 눈빛. 아직 노래 한 소절 부르지 않았지만 그가 무대에 들어선 순간 음악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중은 그의 또렷한 발걸음과 진한 눈빛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1부에서는 로베르트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불렀다. ‘연가곡’이 그렇듯 <시인의 사랑>을 구성하는 열여섯 개 노래는 느슨하게나마 연결된다. 전체적으로는 사랑하는 이를 향한 고백과 끝내 마음을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이 그 주된 내용이다. 슈만 음악의 부드럽고 부서질 듯 연약한 화자 ‘시인’은 바리톤 양준모의 단단한 목소리를 거쳐 강인한 성격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바리톤 양준모의 <시인의 사랑>은 시간을 다루는 솜씨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연주에서는 노래와 노래 사이의 짧은 침묵의 순간까지도 음악이 되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침묵의 순간은 모두 세 번이었다.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산뜻하고 설레는 마음을 노래하는 1곡부터 6곡까지 노래를 부른 후 다른 때보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7곡부터는 실연의 아픔을 표현하는 노래가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6곡과 7곡 사이에 둔 긴 호흡의 시간은 이 작품의 내용적 구조를 염두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겨내기 힘든 거대한 실연의 고통을 노래하는 10번 곡 ‘그 노래가 들려오면(Hör’ ich das Liedchen klingen)'을 마친 뒤에는 예측을 빗나가는 정도로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마치 시인이 느꼈을 비통한 고통 옆에 가만히 있어 주려는 듯, 혹은 그 아픔을 시인과 함께 온몸으로 감각해보려는 듯.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 수백 명의 긴장되는 숨소리만이 부유했다. 내내 들려오던 노래 소리가 멈춘 후의 적막함은 흘러가기만 할 뿐 멈출 줄 모르는 시간을 음악으로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움직임을 멈춘 청중의 몸은 그 시간의 중단과 함께 딱딱하게 굳는 듯했다.

그 후 13곡 ‘꿈속에서 나는 울었네(Ich han’ im Traum geweinet)'에서 양준모는 또 한 번 긴 호흡을 내주었다. 관객은 가장 이완되어야 할 잠자리에서조차 실연의 슬픔으로 꿈속을 헤메는 시인의 곁을 가만히 지켰다. 성악가가 내어준 침묵의 시간에서 청중은 시인이 감당했을 기쁨과 설렘, 행복감과 두근거림부터 고통과 신음, 눈물과 부서짐까지 촘촘하게 감각했다.

이렇듯 <시인의 사랑> 전곡이 울리는 동안 침묵은 소리 못지않게 큼지막한 음악적 사건이었다. 그 침묵은 단순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성악가가 호흡을 고르기 위해, 혹은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시인의 사랑>과 함께 시인의 마음과 감정 상태에 함께 있기로 한 음악가가 치밀하게 재구성한 음악의 시간이었다. 양준모가 노래의 시간을, 나아가 침묵의 시간을 섬세하게 고려한다는 점은 2부에 이어진 말러의 가곡 <뤼케르트 시에 의한 노래>에서도 드러났다. <시인의 사랑>과 달리 연결성 없는 독립적 노래 다섯 곡을 묶은 이 곡을 부르면서 성악가는 마치 계산이라도 한 듯 노래와 노래 사이에 일정한 틈을 두었다.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유연하게 다루었던 노래들 사이 틈을, 말러의 노래에서는 고르게 할애해 노래 하나하나의 독립성을 지켰다.

양준모 독창회 (사진제공=영음예술기획)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간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는 무대 위에 오른 순간부터 무대를 떠날 때까지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 손짓, 발걸음, 고갯짓이 형성하는 신비로운 아우라를 결코 거두지 않았다. 모든 노래가 끝난 후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에도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가 발산하는 깊고 오묘한 기운은 그가 무대에 서 있는 한 음악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무대에서 퇴장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던 그와 그의 음악은 강인한 표정만큼이나 짙은 인상을 안겼다.

요컨대 그의 음악회는 그 자체로 음악이었다. 그러니 그 음악회에서 난 슈만과 말러의 음악만큼이나 양준모의 음악을 들었다. 이번 음악회가 영음예술기획의 초청 '월드클래스 시리즈'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리톤 양준모의 성악가로서 기량에 대해서는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이번 독창회는 그가 훌륭한 ‘성악가’이기 이전에, 음악의 시간을 자신만의 것으로 재구성하는 창조적 ‘음악가’라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객석의 반응이 아쉬웠던 건 바로 그런 점에서다. 청중은 그가 초대하는 침묵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여러 번의 긴 침묵이 있었던 <시인의 사랑>에서 양준모는 앞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또 한 번의 긴 침묵으로 청중을 초대했다. 바로 연가곡의 마지막 열여섯 번째 음악을 마친 후다. 그러나 그 정적은 곧바로 깨어졌다. 피아노의 마지막 울림이 다 가시기도 전에, 성악가의 호흡이 미처 이완되기도 전에, 객석에서 누군가의 박수가 터져 나와서다. 그 누군가의 박수는 2부 말러의 음악이 끝난 뒤에도, 성악가의 마지막 선물 앙코르곡을 마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음악을 만드는 것은 무대 위 연주자만이 아니다. 객석에 앉은 우리, 청중이 음악을 함께 만드는 음악가가 될 때 그 음악회는 비로소 음악이 된다.

바리톤 양준모 리사이틀 포스터 (사진제공=영음예술기획)
바리톤 양준모 리사이틀 포스터 (사진제공=영음예술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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