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6] 제22회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6] 제22회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3.11.2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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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르기와 생성의 춤판

[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 화가는 순백의 캔버스에 무엇인가를 채우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외려 비워내야 한다. 그가 마주하는 캔버스는 온갖 판에 박힌 것들, 진부한 구상적 소여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지각하고 반응하도록 미리 구획하고 조직해 놓은 이미지들이자 기표들이다. 그러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이것들을 조금도 남김없이 모두 치우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즉흥춤을 추는 춤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춤판에 들어서기 전에, 그는 먼저 춤에 관한 관습적인 생각과 자기 몸에 새겨진 고답적인 행위 도식을 떨쳐내야 한다. 요컨대 즉흥춤은 춤추는 이의 몸에 새겨진 각종 클리셰와 춤에 관한 낡은 사유 이미지를 떨쳐낸 이후에야 시작될 수 있다는 말이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그런 의미에서 제22회 서울국제즉흥춤축제의 개막공연(2022년 5월 24일, 남산국악당)은 유달랐다. 내로라하는 7명의 즉흥 춤꾼이 펼치는 춤판은 돌발적인 상황과 우연성이 수시로 개입해 즉흥춤의 묘미를 한껏 즐기기에 충분했고, 나아가 즉흥춤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무대였다. 국내외에서 즉흥춤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7명의 춤꾼, 즉 줄리엔(Julyen Hamailton)과 남정호, 이미리, 양승희, 김요셉, 홍지현, 박유라와 걸출한 3명의 생음악 연주자, 즉 판 헬(Oene van Geel), 김지혜, 김보라는 노련하게 판을 읽고, 섬세하게 소통하면서 무대를 예측불허의 춤판으로 몰고 갔다. 각자 개성을 달리하는 움직임과 소리, 표정과 행위를 동반한 퍼포먼스를 통해 ‘체(body)’와 ‘체’가 접속과 해체를 반복하며 새로운 몸적 배치를 세웠다가 허물기를 지속하는 흥미로운 무대였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타원형의 조명 빛이 선명하게 새겨진 무대로 먼저 줄리엔이 입장한다. 파란 셔츠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늠름하면서도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그는 마치 대사를 하듯 두 팔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한 손을 높이 들고 가만히 서 있는 등, 마치 연극적 제스처와 같은 단호하면서도 간결한 몸짓말을 구사하며 단번에 공연 상황을 구축한다. 이어서 시차를 두고 다른 춤꾼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걷고, 두리번거리고, 서성이며 제각각 오가던 그들은 간혹 서로 마주보기도 하고, 또 다른 춤꾼의 동작을 따라 하기도 한다. 선율악기 소리와 구음이 개입하면서 이들의 움직임과 관계 맺기는 한층 더 활발해지고,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서로 짝을 짓고, 여럿이 계열을 이루기도 한다. 또 멀리서 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이들도 보인다. 동작과 정지, 느림과 빠름, 강과 약이 병행하고 교차하는 움직임 속에서 공연 상황은 수시로 바뀌고, 공연 중간중간에 예고 없이 끼어드는 돌출 행동과 구음, 라이브 연주는 시시때때로 시공간을 다르게 분절하고 구획하면서 극장 전체를 사건적 상황 속으로 밀어 넣는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무대 공간은 춤꾼들에 의해 꽉 채워졌다가 비워지기를 반복한다. 여럿이 동시에 등장해 서로 소통하다가, 때로는 한둘만 무대에 남아 퍼포먼스를 수행하기도 한다. 무대 바닥에 넓게 새겨진 조명 빛 가장자리를 돌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저 관조하는 이도 있고, 모든 일에 무관심한 채 홀로 묵묵히 무대를 배회하는 이도 보인다. 그러다가 라이브 연주도 멈추고 모든 춤꾼이 조명 빛 밖으로 물러난 적막한 무대에서 홀로된 이가 움직임을 이어가면 추임새를 하듯 구음이 따라붙고, 연이어 다른 춤꾼들이 등장해 함께 퍼포먼스를 펼치면, 선율악기의 섬세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소리가 보태지기도 한다. 다채로운 사운드와 일상적이면서도 자유스러운 몸짓이 서로 조응하며 극장 공간은 생생하고 활기가 넘친다.

기존의 춤 공연에서 춤추는 몸은 약속된 행위 규칙을 따라야만 하는 수동적인 몸이다. 반면 즉흥춤 공연에서 춤꾼의 몸은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몸이 된다. 여기서 몸은 다른 ‘체’, 곧 다른 몸과 조명, 음악, 소리, 말 그리고 오브제와 무대장치, 나아가 객석의 관객 등과 다방향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하게 변주하고, 이를 통해 어떤 하나의 춤 메소드, 어떤 하나의 춤 관념은 탈구축된다. 그러기에 즉흥춤 공연에서는 일상적 감성에 충격을 가하는 새로운 몸짓 감각들이 우발적으로 생성되며, 춤은 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하는 춤, 춤과 몸의 해방을 만끽하는 춤이 되는 것이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그러다 둘이 짝을 이뤄 귓속말로 속삭이다가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은 연극적 상황이 연출되는데, 몸짓으로 사뭇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다른 춤꾼들이 멀리서 무관심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한 명의 춤꾼이 둘에게 슬며시 다가가더니 셋이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나간다. 그 사이에 뜬금없이 손뼉을 치면서 등장하는 남정호를 남성 춤꾼 한 명이 갑자기 어깨에 들어 올린 채 무대를 빙빙 돌면 남정호가 살려달라고 외치다가 다급하게 “나 안 해”라고 소리치면 객석에서 웃음과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그러다 다른 이들이 상황에 개입하면서 공연은 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말과 몸짓, 입말과 몸말이 뒤섞이며 시끌벅적한 상황이 연이어 연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돌발적으로 분출하는 즉흥적 퍼포먼스를 통해 공연 상황은 수시로 급변한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특히 줄리엔은 공연이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말과 몸짓말을 시의적절하게 구사하며 상황을 바꾸거나 돌리는 데 뛰어난 자질을 보일 뿐만 아니라, 공연의 진행 상황을 민첩하게 감지하면서 공간을 새롭게 배분하거나 나누는 능력이 출중하고, 또 유희 정신으로 무장한 남정호는 갑작스럽고도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공연 흐름에 틈과 균열을 내면서 구축된 공연 상황을 순식간에 제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재치를 발휘한다. 몇몇 대목에서 그녀는 놀이성이 돋보이는 퍼포먼스를 통해 공연의 진행 속도를 늦추거나 촉진하는 연출 감각을 과시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춤꾼들의 움직임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리의 절도가 있는 특이한 손동작과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몸동작은 공연에 다른 질감을 불어넣으며 상황을 더욱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만든다. 즉 그녀는 움직임의 변이를 통해 춤판을 이질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변환시킨다. 하지만 몇몇 춤꾼의 뛰어난 개별적인 능력 못지않게, 이 공연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7명의 춤꾼 모두가 가로지르기의 귀재, 즉 안정적으로 구축된 판을 예기치 않게 흔들어 버리는 재주가 탁월한 진짜배기 즉흥 춤꾼이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공연에서 그들 모두는 춤적 클리나멘 혹은 특이점으로 작용하며 무대를 이질적인 생성을 장으로 만든다.

고대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기원전 99년-기원전 55년)는 모든 생성은 ‘클리나멘(clinamen)’ 곧 기울어짐, 비켜 감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클리나멘은 원자들이 운동할 때, 자신의 직선 경로에서 아주 미세하게 벗어나 기울어져 빗나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모든 원자가 평행하게 아래로 운동하는 가운데 한 원자가 우연히 빗나가고, 그 때문에 원자들은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시작된 무한충돌의 연쇄, 즉 혼란과 무질서가 모든 생성의 근원이다. 원자들의 충돌이 없었다면 모든 사물의 형성도, 심지어는 우리의 삶과 세계도 없다는 의미이다. 가로지르는 운동이 생성의 원동력인 셈이다. 생성은 ‘무’에서 ‘유’로의 운동이 아니라, 이러한 마주침에서 일어난다. 말하자면 이 공연에서 7명의 즉흥 춤꾼은 예기치 않은 마주침을 야기하는 예측불허의 행동을 통해 즉흥춤의 묘미를 잘 살려내면서도 고정된 틀을 무너뜨리는 탈영토화의 운동을 멋지게 수행한다. 기존의 춤 질서를 횡단하는 춤적 클리나멘, 곧 새로운 춤 질서를 창안하기 위한 위태위태한 일탈과 빗나감이 돋보이는 공연인 셈이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다음 장면은 훨씬 자유스럽다. 각자 흩어져 퍼포먼스를 펼칠 때 이들의 동작은 잘 짜진 세련된 춤이라기보다는 막춤에 가까워 보인다. 이리저리 뛰어서 돌고, 한 사람이 다른 이의 손을 부여잡고 빙빙 돌다가 쓰러지면, 이번에는 다른 이가 그의 손을 잡고 끌어서 무대 가장자리로 이동하기도 한다. 이들은 기존의 춤 동작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운 몸짓으로 장난을 치듯 서로 어울리며 놀이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기실 놀이에서 춤은 목적이 없고, 규정할 수 없는 순수한 몸짓이 된다. 그것은 춤을 새로운 배치로 이끄는 잠재적인 역능이다. 그리고 여기서 기존의 춤은 전복되고 새로운 몸짓이 생겨나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힘을 활성화하는 몸짓으로 기존의 춤이 그어놓은 한계에 가닿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몸짓 감각을 창안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기존의 몸짓, 판에 박힌 춤으로는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가 클리나멘을 말한 좀 더 심층적인 이유는 인간의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발성’이 요구된다고 본 데에 있다. 클리나멘, 즉 질서가 잡힌 직선운동만 있는 세계를 가로지르는 횡단 운동을 통해 혼란을 조성하고 그것을 통해 새 질서가 생겨나듯이, 이 공연에서 7명의 춤꾼은 뿔뿔이 흩어져 운동하다가 때때로 둘이나 셋, 혹은 무리로 계열을 이루고, 그러다 갑자기 우연적인 마주침을 유발하고, 무제약적인 자유를 구가하는 몸짓으로 새로운 춤적 배치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라이브 연주가 전면에 나선다. 춤꾼들을 비추던 조명이 사라지고, 대신에 무대 왼쪽 뒤편에 자리 잡고 앉은 악사들에게만 조명 빛이 들어온다. 환한 불빛 속에서 라이브 연주를 이어가는 악사들과 대조적으로 춤꾼들은 악사들 주변과 어두운 무대를 오가고, 운동하는 춤꾼들의 어슴푸레한 모습이 간헐적으로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다시 조명은 춤꾼들과 악사들을 비슷한 밝기로 비추다가, 이내 무대에는 둥근 조명 빛 하나만 내리쬐고, 그 안팎에서 춤추는 이들의 모습이 한동안 보인다. 이를테면 조명이 적극적으로 공연 상황에 개입하면서 예기치 않은 긴장감이 조성되고,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라이브 연주음이 전경화되면서 소리가 몸짓보다 더 강하게 어필되는 장면이다. 일시적으로 악사들이 주인공이 되었다가 다시 춤꾼들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렇게 타악기 소리와 구음, 목소리, 빛과 몸짓 등 여러 ‘체’들이 이산적인 계열체를 형성하며 수렴과 확산을 반복하는 공연은 수미일관한 동일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차이를 생산하는 패턴으로 끝까지 지속된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2022 서울국제즉흥춤축제 개막공연 ⓒ박상윤

7명의 춤꾼에 의해 발생하는 자유와 생성의 가변성은 일시적인 질서를 낳고, 또 곧바로 거두어 가기를 반복한다. 질서와 무질서를 오가며 연속적으로 새로운 배치를 만들었다가 허물기를 지속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들은 기존의 춤을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하는 춤적 실천을 통해 준안정적인 질서의 구축과 와해를 실험함으로써 우리가 기존 춤의 질서들을 영속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을 막아준다. 또 진부하고 무미건조한 춤에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기존 춤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것에 저항하며 변형을 가하는 수단으로 즉흥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즉흥춤을 추는 춤꾼은 기존의 춤이 가진 고착화되고 코드화된 몸짓으로부터 탈주하며, 각종 춤 장치와 제도에, 이러저러한 춤 메소드와 스타일에, 또 춤을 분류하는 강고한 장르 체계에,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과 권력이 유포하는 일상적 감성에 의해 억압당하고 억눌리는, 자기 몸에 잠재하는 제 맘대로 쓸 힘을 일깨우는 자이다. 그것은 어느 춤꾼에게나 애초에 있는데도 착취당하거나 제약당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생성의 힘을 발현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즉흥춤에서 기존의 춤은 전복되고 새로운 춤 질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울국제즉흥춤축제는 소중한 행사이다. 오늘날 춤이 봉착한 여러 난제를 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새 길을 모색하고 탐색하는 의미 있는 무대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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