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감옥에서 펼쳐진 역설의 퍼포먼스 ‘인간의 수치심’
[단독] 감옥에서 펼쳐진 역설의 퍼포먼스 ‘인간의 수치심’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9.03.19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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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연기, 대사로 꿰뚫어보는 인간성의 본질
마테라 ’유럽 문화수도’ 공동창작 프로젝트

[더프리뷰=마테라] 이종호 기자 = 감옥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아무리 재래식 극장을 벗어난 공연이 유행하는 요즘이라지만, 웬만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을 ‘감옥에서의 공연’이 지난 3월 1-9일 이탈리아 동남부 바실리카타주 마테라에서 매일 한 차례씩 열렸다. 마테라 시내 체레리에가 24번지 소재 마테라 관할구역의 집(Casa Circondariale di Matera). ‘감옥’이란 단어는 없지만 분명 재소자 150명이 들어있는 감옥이다. 이들도 두 차례로 나뉘어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5일 현지에 도착한 기자는 저녁 6시 40분부터 감옥 정문 앞에서 관람을 신청한 현지 주민 80여명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렸다. 알파벳순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 직원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휴대전화를 맡긴 다음(사진촬영 절대금지!) 여러 건물을 거쳐 100석이 채 안되는 아담한 공연장에 들어섰다. 그러다보니 7시 시작이라고 돼있던 공연은 정작 7시45분경에야 시작됐다.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이탈리아, 마케도니아, 일본에서 온 연기자/무용수 5명이 열연을 펼치는 <인간의 수치심(Humana Vergogna, Human Shame)>은 연기, 춤, 대사가 속도감있게 얽히면서 인간이 느끼는 수치심의 다양한 종류와 양상을 부담없이 보여준다. 결코 우아하달 수 없는 몸들을 가지고 멋지게 해내는 도약과 공중돌기, 레즈비언 키스 등 갖가지 동작과 우스꽝스런 대사들은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서글프게, 그러나 결코 공격적이지 않게 보는 이의 마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개인의 수치에서 집단과 국가의 수치까지, 결국은 자신들의 수치심을 관객의 마음 속으로 전이시킨다. 무겁고 심각한 주제를 가볍고 즐거운 일종의 자기역설(自己逆說)로 치환하면서 매장면, 매순간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유난히 몸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안무자 실비아 그리바우디의 창작적 관점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었다.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실비아 그리바우디가 공연 후 술자리에서 “사실 나도 몸이 뚱뚱해지면서 무용수로서 수치와 절망감을 느꼈고, 그래서 이 프로젝트 제안이 왔을 때 두말없이 받아들였다”고 고백했듯이 수치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종류도 아주 많다. 신체와 외모, 잘나지 못한 가족, 실패, 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까, 성적인 수치심, 가난, 사회적 무능력 등등. 인간본성의 무시할 수 없는 한 얼굴이다.

어떻게 하면 수치에서 벗어나 평온과 자신감에 이를 수 있을까. 1시간 여 격렬하고 재미나고 웃기는 무대를 통해 관객들은 마침내 아주 쉬운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수치에 솔직해지는 것,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당신을 편안하게 하리라. 공연 후 영상으로 보여준 몇몇 재소자들의 관극 소감에도 그런 결론이 드러난다. “이제 감옥에 있다는 것이 그다지 창피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를 좀더 사랑하고 존중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등.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인간의 수치심' 공연장면. (사진제공 = 공연주최측)

그렇다. 수치를 뒤집어보이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피렌체에서 온 평론가 톰마조 키멘티의 표현처럼 ‘수치심(la vergogna)’이야말로 ‘진짜 형틀(la vera gogna,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인 것이다. 수치심에서 스스로 해방되면 비로소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리라.

아주 편안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객석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작년 봄 소피아에서 본 이바 스베시타로바의 <Shamebox>도 생각났다. 섹스에 대한 부끄러움을 솔직하고 재밌게 표현한 작품인데, 거기에 비해 <인간의 수치>는 ‘수치심 종합버전’이었다. 왜 제목에 ‘수치(Vergogna)’는 이탈리아어로 쓰면서 ‘인간의(Humana)’는 라틴어로 썼느냐는 질문에 제작총괄 코디네이터인 프랑코 웅가로는 수치의 보편성을 강조하게 위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단어인 ‘Humana’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공연은 11일 인접 도시 레체에서 한 차례 더 공연된 뒤 막을 내렸으며, 이탈리아의 아르무니아 축제, 세르비아 노비사드 축제의 예술감독들은 관람 직후 즉석에서 이 작품을 초청했다. 일본과는 올 가을 공연을 논의중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마테라-바실리카타 재단이 마테라의 2019년 ‘유럽 문화수도’ 선정을 기념해 제작한 27건의 공동창작 가운데 하나로 이 지역 극단연합과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 인접국들은 물론 일본까지 참여해 만든 작품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국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단체인 EU-Japan Fest가 프랑코 웅가로를 토쿄에 초청해 공동제작의 취지를 설명하고 출연자 공모를 실시, 연기자 타시로 엠마(지하공항 극단 소속)가 이번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재단이 ‘수치’를 공동창작의 주제로 정한 것은 마테라가 과거 ‘이탈리아의 수치’로 불리던 지역이었음에 착안한 것이다. 원래 바위가 많은 지역으로 선사시대부터 석굴 거주의 오랜 전통이 이어져온 마테라는 근대 이후 산업의 부진과 낙후한 생활상, 극심한 빈곤으로 ‘국가적 수치’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얻었다. 1950-60년대부터 정부가 석굴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적극 권장하면서 서서히 변화를 맞기 시작, 과거의 가난에서 벗어나 매력적인 관광지로 변신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주변 지역에서 유전까지 발견돼 새로운 경제적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한편 재단은 주민들이 금년 1년간 열리는 공연, 전시, 강연 등 모든 유럽 문화수도 관련 행사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도록 단돈 19유로 짜리 ‘올-패스’ 카드를 만들어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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