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3, 스펙터클 4 , 현대서커스 – 눈의 오페라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13, 스펙터클 4 , 현대서커스 – 눈의 오페라
  • 조복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3.2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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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서커스 – 눈의 오페라

재연극화

서커스는 영화가 대중화되기 전,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서양의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특히 미국의 철도서커스는 19세기 중반부터 절정기에 돌입한다. 이 시기를 서커스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1940년대 이후 서커스는 점점 쇠퇴한다. 영국의 서커스는 19세기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뮤직 홀의 성장때문이었다. 뮤직 홀은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에서 유행했던 엔터테인먼트로서 노래, 코메디, 서커스 등을 공연하던 버라이어티 쇼였다. 술과 음식까지 팔았던 자유분방한 쇼로서, 미국의 보드빌과 유사한 공연형식이었다. 뮤직홀, 보드빌, 영화와 텔레비전 등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등장은 기존의 오락산업의 판도를 혁명적으로 바꾼다.

서커스는 이들 새로운 쇼의 공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미 1950년대에는 서커스의 위기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서커스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기간을 거쳐 새로운 형식의 서커스가 등장할 것으로 내다보는 시각이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 이후 현대(컨템퍼러리)서커스가 등장하여 서커스 산업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폴 부이작, 『Circus and Culture』, 4).

수공업적 성격의 서커스가 제도화되고 산업화된 형태로 바뀐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서커스는 부단한 변신을 시도해 왔다. 관객들의 시각적 욕망에 부응하는 스펙터클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했고 다른 오락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 내용과 형식을 바꾸어야 했으며 문화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야 했다.

부이작에 따르면 서커스는 퍼포먼스에 가해지는 문화적 제약을 벗어나서 문화체계를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예술이다. 똑같은 기술과 묘기를 반복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커스는 오히려 끊임없는 문화적 변용이다. 서커스는 지속적으로 변해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서커스의 기술은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지역이나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또한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지고,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으며 더욱 상업화되고 있다. 서커스의 변신을 ‘ 재연극화’ 개념을 빌어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공연예술이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고 장르와 장르간의 새로운 결합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새로운 매체가 개발되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연극개량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게오르그 푹스는 ‘재연극화’( Retheatricalization)라고 불렀다. 에리카 피셔 리히테 (Erika Fisher –Lichte)는 재연극화의 사례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바그너는 그리스의 연극을 모델로 오페라 개혁을 시도했다.

2) 아방가르드 연극운동이 16-17세기의 민속극 전통과 연계되어 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이탈리아), 영국의 엘리자베스조의 연극, 스페인의 황금시대 연극(Siglo de Oro), 안톤 슈트라니츠키(오스트리아 Joseph Anton Stranitzky- 인형극 등을 공연하던 떠돌이 연극인으로 비엔나에 정착하여 케른트너토극장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의 민속연극을 대중화한 대중연극의 창시자) 지도하의 비엔나 폭스 오퍼등이 그것이다

3) 넓은 의미에서 축제나 관습등을 포함한 토착적 민속문화에서 추출해낸 것들. 가장 많이 쓰인 것이 꼭두각시쇼, 인형극, 마술사와 줄타기 곡예사, 서커스와 아크로바틱등이다.

4) 현대적인 참조점은 현대의 민속문화, 즉 다른 말로 하자면 대중문화속에서 추출해낸 것이다. 이 전통은 뮤직 홀이나 복싱, 레뷔, 캬바레, 영화등에서 따 온 것이다

5)동양의 전통에서 빌려 온 것들이 있다. 가부끼나 경극, 발리의 바롱같은 것들이다. 이들 외부요소들로부터 의상이나 의식(ritual) 적 요소, 건축이나 움직임,음악등을 차용하는 것이다(Erika Fisher- Lichte, 『The show and the gaze of Theatre』, p115~116)

사실이 재현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는 믿음 즉, 정상적으로 인지된 것과 그것의 예술적 재현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은 신고전주의 시대 이후로 예술이론과 관습을 지배해왔다.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사실로 축소시켰던 사실주의자/자연주의자의 시도는 인간의 가치관이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만 드러내려 하였다. 자연주의의 대표적 작가였던 에밀 졸라는 테레즈 라캥 서문에서 그의 소설쓰기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 이라고 하였다.

20세기초에 나타난 재연극화 현상은 이러한 자연주의 연극에 대한 반기로 나타났다. 자연주의 연극이란 대상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일종의 환각주의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대상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라는 이유로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브레히트는 표면에 드러난 허구보다는 숨겨진 실재를 파악하는 데는 자연주의가 방법론적으로 부족하다고 하였다. 문학으로 뒷받침되는 사실주의적. 심리학적 환각의 연극대신에 전유럽에서(1900-1935)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의 멤버들은 과거의 것과는 다른 연극을 제안하였다. 문학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자율적인 예술양식을 구성하는 연극, 관객과 객석사이를 갈라놓는 연극을 지양하고 그들 사이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연극, 그래서 과거 부르조아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던 예술과 생활의 간극을 메꾸는 연극이기를 바랐다 (Erika Fisher- Lichte, 『The Show and the Gaze of Theatre』, p115~116).

민중들 사이에 산재한 풍부한 공연문화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을 되살리려는 문화적 차원의 의미와, 기존의 공연에서 참고할 만한 것 또는 오락적이거나 상업적인 이익이 있다고 판단되는 재료들을 차용하는 것이다. 에리카 피셔 리히테가 정의하는 재연극화는 서민적인 하층민들의 놀이에서부터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연극개량운동을 포괄하고 있다. 연극속에 다양한 대중문화, 민속놀이 같은 것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커스는 반대로 연극을 서커스에 도입한다. 전통서커스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대중들의 변덕스런 취향과 문화환경의 변화에 맞게 바꾸어나가야 했다. 링글링 브러더스의 경영주였던 존 링글링 노스가 1940년대에 내건 슬로건은 ’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서커스(Nouveau Circus )‘의 도입이었다. 이미 1940년대부터 현대적 서커스의 맹아가 싹을 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서커스는 이미 1917년 이후 소비에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사회주의권의 서커스

- 모스크바 서커스

20세기 러시아의 엔테테인먼트 상황은 서커스와 동의어라고 할 정도로 서커스가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다. 러시아의 근대 서커스는 유럽으로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러시아는 서커스를 제도화하고 국영화하기 시작했다. 1919년 레닌은 서커스를 오페라나 발레에 못지 않은 러시아의 ‘인민의 예술형식’으로 발전시키라는 지시를 하였다. 소련은 그 동안의 서커스와는 매우 다른 서커스를 국가주도하에 체계화해나가기 시작했다. 서커스의 내용의 변화, 서커스 학교의 설립, 서커스 단원들의 육성 등, 그리고 서커스에 필요한 각종 제도들을 정비해나갔다. 1927년에 모스크바 서커스 학교를 설립하여 서커스 연기자들을 육성하였는데 여기서는 말이나 동물 위주의 서커스에서 체조의 테크닉을 사용한 서커스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 매일 20시간 정도의 고된 훈련으로 고난도의 기술을 익힌 퍼포머를 양성하였다. 이 학교에는 보통 70여 개의 자리가 있었는데 1,000명 이상이 지원하였다고 하니까 소련에서의 서커스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공무원보다도 더 봉급이 많았고 퇴직수당, 육아지원에 퇴직공무원에게만 지급된 사택도 제공되었다.

혁명후 러시아에는 ‘연극전염병’(Theatre Epidemic)이 돌았다. 극장으로 변하지 않은 창고가 없을 정도로 연극열기는 대단했다. 그 열기는 박테리아보다 더 빨리 퍼져나갔다. 모든 극장에는 관객들로 넘쳤다. 귀족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과거의 연극관객이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프로시니움에 가려진 연극적 스펙터클보다 서커스가 더욱 노동자의 생생한 혁명정신을 더 고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대형 스펙터클이 넘쳐났고 공연들은 서커스화되었다. 서커스는 공연자의 집중력과 힘, 관객들의 민주적 참여가 그 특징이다. 그리고 서커스 링은 행동을 위한 실질적 공간을 제공한다(Revolutionary Theatre, 38-42 ). 러시아에서 서커스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노동자의 혁명정신을 고취하고 대규모 군중들의 집단적 힘이 분출하는 공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서커스를 예술로 보고 있고 예술을 체제의 홍보를 위한 선전도구, 국민의 훈육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벤야민은 이를 「미학의 정치화」라는 말로 비판하고 있다. 당시 나치즘에서 대중선동수단으로 활용하던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대중을 세뇌하고 감격케 하던 전략이었다.

소련 서커스는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개인이나 동물들의 묘기위주의 퍼포먼스에 이야기를 담고 여기에 예술성을 가미하였다. 오늘날의 태양의 서커스를 포함한 현대 서커스는 소련 서커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소련 서커스는 차이코프스키의 클래식이나 발레 뤼스와 같은 예술로 인정받았다. 모든 아크로바틱 단원들은 발레를 공식적으로 배워야 했다. 1950년에 세계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서방의 팬들을 매료시켜 극찬을 받았다. <태양의 서커스>의 1300여 단원중 25% 가량이 러시아 출신이다. 러시아 출신 서커스 단원이나 엔터테인먼트 종사자는 라스 베가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역시 서커스의 수준이 매우 높다. 샹하이 등지에는 지금도 상시적으로 서커스 공연을 하는 극장이 있고 여러 지역에 서커스 학교도 운영되고 있다. 잡기단은 국가가 관리하는 서커스단으로 , 쿵푸와 경극 등의 기예를 접목하여 높은 수준의 적인 서커스를 공연하고 있다. 에는 한나라 시대부터 서커스가 있었다.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서커스의 나라로서, 당나라 때와 청나라 때에는 왕실에서 공연을 한 기록도 있다. 1949년 공산당 정부가 집권한 이래 서커스는 더욱 왕성해져, 현재는 전국적으로 120여개 서커스단과 12,000여명의 단원이 활약하고 있다.

 

북한교예단 '춘향전' (출처. AP)
북한교예단 '춘향전' (출처. AP)

- 북한서커스

북한은 서커스가 매우 강한 나라다. 2000년에 남북교류의 상징으로 평양교예단 서울공연이 열렸다. 63일부터 610일까지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렸고 당시 입장권 최고가는 15만 원이었는데 전석 매진되었다. 평양교예학교가 1972년에 설립되었고, 인민군 교예극장과 평양교예극장 등 서커스 전용극장이 두 군데 있다. 평양교예단에는 아이스 서커스와 수중서커스가 있다. 평양교예단은 몬테 카를로 세계 서커스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하였고 제8회 영국세계서커스 대회와 중국의 무한교예축제, 파리 국제서커스 대회 등에서도 우승하였다. 북한의 서커스는 입장권 가격도 상당히 비싸서 3만 원에 이르는데 이는 노동자 월급의 절반수준에 해당하는 고가다. 그래서 고위직에 있는 당간부들이 많이 관람한다. 북한의 서커스는 공중곡예등이 중심이 되는 체력교예, 우리의 마술에 해당하는 요술교예, 동물교예, 교예막간극 등 네가지로 분류된다.

북한에서 서커스를 교예라고 부르는 것은 서커스를 예술로 보기 때무이다. 교예가 주는 효과는 육체의 성장과 기능의 발달, 용감성, 인내심, 의지, 명랑성과 낙천성을 배양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교예를 문화예술로 여기고 중요한 무대예술로 대접하고 있다(허정주, 호모 서커스,32).

19세기 유럽에는 신체문화운동(Physical Culture Movement)이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삶이 풍요로워졌지만 운동이 부족하여 비만환자가 늘어나는 등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운동이 장려되었고 체조가 보급되었다. 여성의 신체활동도 활발해져서 1880-90년대에는 여성의 자전가 타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신경쇠약을 야외활동으로 치유했다고 하면서 사냥, 복싱, 경쟁스포츠를 권유하였다. 신체문화운동은 서커스에도 침투하였다. 서커스는 인간의 신체를 튼튼하게 하고 이는 정신의 고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체조도 이와 유사한 이념이 개입된 것 같다. 러시아를 비롯한 사회주의권에서 비롯된 서커스의 변신은 현대서커스의 태동에 큰 영향을 준다.

 

 

현대서커스

 

현대서커스는 1970년대에 호주, 미국 서부,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시작되어 캐나다, 폴란드 스웨덴 등으로 확산된다. 서커스는 단순히 스펙터클만을 선보이는 오락이 아니라 사회적 이념을 도입한 연극적 형식으로 탈바꿈한다.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한다. 현대서커스는 공연예술이나 다양한 연극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정치연극(agitprop)이나 포스트드라마 연극, 포스트모던 댄스, 거리연극, 장소특정적 연극등의 형식을 도입하였다. 여기에는 이야기가 필수적으로 삽입되고 연극적인 형식을 갖추게 된다.

1978년 멜버른에서 <서커스 오즈>가 창단된다. 이들은 난민이나 호주 원주민들의 인권개선 등을 위한 서커스를 기획하였다. 멜버른에서는 또한 1991년에 <여성 서커스>단이 탄생하여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서커스 운동도 시작되었다.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의 권익신장을 목표로 여성들만의 서커스를 시작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픽클 가족 서커스>는 공동체의 형성과 민주적이고 평등한 운영을 모토로 하였다. 이들은 때로는 폭력이나 현대사회의 비인간화 등의 문제를 비판하였다. 프랑스의 <아르카오스 서커스>1986년 프랑스에서 설립되었는데 폭력이나 비인간화등을 고발하는 서커스를 목표로 하였다. 이처럼 사회적 의제들을 다루는 서커스를 사회 서커스(social circuses)’라고 부른다.

전통서커스는 가족중심적 운영이 주를 이루었다.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오던 특별한 재주를 아들과 손자들에게 물려주는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했다. 그러나 현대서커스는 공연자의 육성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 1970년대부터 많은 서커스 워크숍과 서커스 학교가 생겨서 체계적인 방식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공연장도 과거에는 이동형 또는 유목형 공연이 주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야외경기장이나 실내극장, 아레나 같은 고정형 극장이 늘어나고 있다. 부이작은 서커스의 가장 큰 특징으로 유목생활을 든다. 서커스단이 동가숙서가식하면서 공연을 했던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한 현상이었다. 부이작이 말하는 노마드적 생활은 공간적 지리적인 이동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동식 공연으로는 작품의 내용이나 흥행면에서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영국은 1860년대부터 3분의 1 이상의 서커스단이 지역에 뿌리를 둔 고정 공연장 체제로 운영되었다( The Circus and Victorian Society, 26). 오히려 유랑 서커스단의 소멸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당시의 서커스 단원은 이렇게 한탄했다. ‘유랑 서커스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 서커스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 원인은 해변도시의 발달 때문이었다. 서커스 매니저는 이 곳을 적당한 공연장소로 보았다.( 26) 아마도 선원들의 왕래가 활발하고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인구의 이동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에는 19세기에 오락시설의 건립붐이 일었다. 1850년까지 뮤직 홀 , 극장, 서커스 공연장이 23개 건립되었고 10년 후에는 59개로 늘어났다. 1867년에는 21개의 서커스 단이 있었는데 공연장은 59개였다. 이는 서커스단이 복수의 공연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야외극장은 서커스 횟수를 늘려주고 보다 정교한 표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맨체스터에서는 1847-48년에 120회를 공연하였고 10년후에는 248회로 대폭 증가하였다. 그렇다고 전통적 방식의 빅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순회공연은 빅톱을 사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동물 서커스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일부 서커스단에서는 동물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동물보호단체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동물서커스의 쇠퇴는 서커스 관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어린이 중심의 공연이 성인이 중심이 되는 공연으로 바뀌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이야기와 연극적 형식의 도입이다. 전통서커스의 형식은 링마스터의 지시와 설명에 따라 스펙터클한 공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면 현대서커스는 캐릭터 지향적 행위와 서사를 연결한 연극적 서커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음악도 과거에는 행진곡이나 왈츠 등의 경쾌하고 스펙터클한 음악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현대서커스에서는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의 음악이 사용되고 있도 연극적 서커스에 기여할 수 있는 음악이 중심이 되고 있다 .

 

- 이야기의 도입

말이 없는 공연장르들이 있다. 무용, 서커스 등인데 이들 장르들은 언어장벽을 넘어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지루하고 시각적 효과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도입한다. < 백조의 호수><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발레에 이야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스토리 발레 또는 내러티브 발레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는 넌버벌 퍼포먼스(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용어같다)에서도 이야기를 도입하는 것은 공연의 다양성과 재미를 높이려는 현대적 오락의 경향과도 일치한다.

서커스에 이야기가 도입된 것은 서커스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였다. 경마극(Hippodrama)이라고 불리운 연극적 서커스를 개발한 사람은 앤드류 더크로우였다. 더크로우도 기수였는데 1814년 애슬리가 죽자 애슬리 왕국을 이어받고자 하였다. 더크로우는 말 위에서의 옷바꿔입기 기술로 유명했다. 옷을 계속 벗어 승마복으로 바꾸는 기마술이었다. 그의 서커스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코벤트가든 같은 정극극장에서도 이를 공연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장 유명한 경마극은 마제파(Mazeppa)였다. 이는 바이런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이었다. 줄거리는 아주 낭만적이어서 포로가 된 타타르의 왕자 마테타가 폴란드 공주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이다. 1831년에 시작된 이 서커스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말 위에서의 연기는 매우 위험했지만 이를 연기한 여자기수 아다 멩켄은 미국에서도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861년 뉴욕에서 공연되었고 뉴올리안스, 샌프란시스코 , 파리, 비엔나 등으로 확산되었다. 멩켄의 타이트한 승마복은 성적인 매력을 더해서 남성 관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멩켄은 하루 저녁 출연료로 당시 500 달러를 받았다(당시 잡부들의 일당은 7-8불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서커스에는 이야기가 없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서커스가 대세였다. 이야기가 도입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1970년대 이후 활발해진 다양한 사회극(social drama)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서커스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의 효과는 매우 크다. 나는 그녀를 사랑해서 결혼했다 라는 단순한 표현보다는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 담긴 갈등과 위기,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낸 사랑의 결말을 이야기로 표현하는 것이 관객에게 주는 차이는 매우 크다.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주인공과 동일시의 경험을 하게 된다. 관객은 곧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고 현실을 잊게 된다. 내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위기를 겪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단순한 사실보다는 이야기로 표현하면 이를 기억하는데 7배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대할 때 우리는 이야기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불신을 유보하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동일시는 약한 자보다는 영웅에 대해 더욱 강해진다고 하는데 서커스에서는 영웅이 등장하는 경향이 강하다. 동일시는 이야기에 대한 주의를 집중시키고 몰입을 강화하여 공연과 관객간의 상호작용이 강화되고 공연분위기도 높아진다. 반면 서커스의 이야기에는 언어가 없어 그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은 늘 존재하고 있다. 서커스의 매체성의 한계다.

 

- 테크놀로지

서커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신체라는 매체를 이용하는 엔터테인먼트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매체와 테크놀로지를 도입하고 현대화해 왔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말 대신 오토바이나 차가 사용되었다. 자전거의 도입도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한 사례다. 매체가 달라진 것이다. 강철로 만든 빅톱과 기차의 등장은 서커스의 이동성을 높여서 서커스 산업을 확장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전기 모터의 도입은 공연의 역동성을 높이게 되었고 마이크와 레이저 조명등은 공연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최근 독일의 론칼리 서커스단은 동물 서커스를 홀로그램으로 대체하여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고 동물학대의 오명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홀로그램 서커스가 과연 동물서커스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공연으로 간주될 수 있을 지에 대한 논란이 생길 수 있을 것이고, 또한 홀로그램 제작비의 문제도 제기될 지 모른다.

모든 엔터테인먼트는 매체를 사용하고 매체는 엔터테인먼트의 특성을 규정한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공연이나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호모 루덴스에서 하위징가는 놀이는 문화의 기본적 조건이고 전()문화적 현상이라고 하였다. 문화는 놀이정신에 기초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놀이는 매체에 의존한다. 매체를 사용하지 않는 놀이는 없다. 사람의 신체건 신체에서 나오는 말이나 동작이건, 물질이나 오브제이건 모든 놀이는 매체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그건 예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하위징가가 주장한 것처럼 예술은 곧 놀이고 예술은 놀이와 매우 가까운 엔터테인먼트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의 변화는 매체와 기술의 발전과 관계가 있다.

과거의 엔터테인먼트의 매체는 물질적이었다. 제기차기, 자치기, 고무줄 놀이, 팽이치기 등등. 우리는 이런 매체들을 또 다른 매체인 신체로 만지고 차고 던지면서 놀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놀이는 탈물질적이다. 디지털 시대인 것이다. 과거의 벽돌이나 물질이 컴퓨터나 모바일의 클릭으로 변한 것이다. From bricks to clicks. 그러나 서커스는 모바일이나 디지털 매체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가 없다. 서커스는 사람의 신체적 기술과 테크놀로지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나갔다.

 

홀로그램 코끼리(출처 구글)
홀로그램 코끼리(출처. 구글)

 

공연예술은 무대기술의 발전과 함께 변화해 왔다. 되도록 무대를 리얼하게 장식한다든가 스펙터클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무대디자인에서 점점 기술은 인간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 과거의 무대 디자인은 숙련된 화가들의 전문분야였다. 그들은 나무를 자르고 맞추어서 세트를 만들었고 배경막을 페인트칠하고 그렸다. 그러나 무대디자인은 점점 컴퓨터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3D 프린팅은 목수를, 컴퓨터 인쇄는 화가들을 대체하고 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풀을 칠하던 모습은 3D 프린팅으로 단순화되었고 컴퓨터화된 인쇄물은 보다 빠르고 정교하게 세트를 인쇄한다. 무대세트를 만들던 화가들은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게 되었다. 마치 사진기가 나와서 초상화가들이 일자리를 잃었던 것처럼. 세트 디자이너들은 그림을 그리고 자르는 일이 아니라 컴퓨터를 조작하고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서커스에서는 공연자들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공연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과학지식과 기술의 도입이 필요했다. 홀로그램, 프로젝션 매핑, 가상현실(VR), LED조명 등의 새로운 영상기술과 조명기술, 모션 캡처와 영상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방식의 공연도 등장하고 있다. 현대서커스는 빅톱에서 벗어나 고정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 첨단기술을 이용한 기술적 장치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의 <오 쇼>150만 갤런의 물에서 이루어지는 쇼다. 물이라는 특수한 매체에서 하는 공연은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물의 성질에 어울리는 조명, 음향, 수압 등을 고려해야 한다. 태양의 서커스 기술진들은 이를 위해 오랜 동안 수압, 물속에서의 빛의 반사와 조명, 음향을 면밀히 연구해 왔다. 과학적 지식이 동원된 것이다. <오 쇼>는 물 위에 무대를 자유자재로 설치하고 이를 다시 없애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은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구현하기 어렵다. 중앙통제실에 있는 컴퓨터 자동제어장치가 각종 서커스 장비의 작동을 통제한다. 이는 MGM호텔 공연장에서 열리는 <카 쇼>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가부키 데크를 움직이는데 첨단기술이 사용되고 배우들이 거대한 데크에서 상승하고 하강하는 동작 역시 컴퓨터로 조종한다. 또한 객석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스피커들과 첨단음향 시스템이 사용된다

 

가부키 분장법 ‘쿠마도리’, 경극의 검보 (출처. 구글)
가부키 분장법 ‘쿠마도리’, 경극의 검보 (출처. 구글)

 

- 혼종적 문화

현대서커스는 타장르와의 활발한 상호작용을 통해 변신해왔다. 연극이나 시각예술, 춤 등의 새로운 장르와 협업을 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참신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이는 서커스를 예술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현대서커스는 매우 혼종적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태양의 서커스다. 구성원들은 세계 50여개국에서 모인 다국적자이며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체조 등의 세계선수권 우승자, 전통서커스 단원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홍연진도 태양의 서커스 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그녀 역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국가대표 출신이다. 단원 선발과정은 매우 까다롭다. 최고 기량의 퍼포머를 스카웃하는 전문적인 부서가 있고 여기에는 프리랜서를 포함해서 20여명 이상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단원을 스카웃한다. 입단을 희망하는 일반 아티스트는 동영상을 보내는데, 세계 각국으로부터 매일 50~100여개의 동영상이 우송된다. 이어서 오디션이 실시된다. 오디션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항목은 인성이다. 공연은 오랫동안 같이 호흡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협동정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자들은 오디션이 생략된다. 오디션에서 선발된 단원은 스튜디오에서 6개월 가량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 훈련후에도 바로 공연에 투입되는 게 아니고 결원이 생긴 쇼나 새로운 작품이 제작될 때 투입된다( 西本 まり, アート サーカス, サーカスを えた 魔力,92-104 ) .

공연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역시 매우 혼종적이다. 2005년부터 MGM에서 공연되고 있는 <카쇼>는 약 2000억 원( 1.8억 달러)의 제작비가 든 대작이다. KA는 젊은 남녀가 사랑과 갈등을 겪다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그 주제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에서 차용했다. 의상은 우리나라, 일본, 인디아의 의상들이 사용되었고, 분장법에는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전통분장과 가부키의 쿠마도리라는 독특한 분장법이 사용되었다.

 

태양의 서커스 '퀴담'(출처. 구글)
태양의 서커스 '퀴담'(출처. 구글)

 

태양의 서커스

 

태양의 서커스(이하 CDS)는 현대서커스의 대명사가 되었다. 1970년대에 태동한 현대서커스의 맥을 유지하면서 서커스를 대형화하고 상업화한다. CDS의 탁월성은 혁신에 있었고 혁신의 근저에는 예술과 테크놀로지가 자리잡고 있다.

 

- 창단

태양의 서커스의 역사는 준비기(1979-83), 창립기(1984-89), 도약기(1990-99), 침체기(2010-2015), 쇄신기(2015- 2019), 위기(2020~) 등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다. CDS는 컨템퍼러리 서커스의 대명사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그 출발은 아주 미약하였다. CDS는 거리에서 불쇼( Fire Breathing)를 하던 기 랄리베르테(Guy Laliberte)에 의해 시작되었다. 1979년 대학을 졸업하고 불쇼를 배운 그는 다니엘 고티에, 질 스트 크르와(Gilles Ste- Croix)와 함께 여름 축제를 기획하였다. 이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크르와는 베 상 폴에서 퀘벡까지 90 km를 걸어 퀘벡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관객들로부터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하였다. 랄리베르테와 크르와는 경제적 곤경에 빠졌고, 거리축제와 서커스 교육을 위한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들은 거리축제를 2년 동안 계속했고 이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83년에 퀘벡 정부는 그들에게 160만 달러를 지원하여 < 태양의 서커스의 그랜드 투어>라는 첫 작품을 낳도록 하였다.

CDS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84년이다. 랄리베르테는 퀘벡에서 13주간 <그랜드 투어>를 하여 성공하였고, 이어서 국립서커스 학교 교장이던 기 카론(Guy Caron)을 예술감독으로 영입하였다. 이들은 전통 서커스의 혁신을 목표로 하였고 그들이 모델로 삼은 서커스는 모스크바 서커스였다. 중국이나 유럽의 서커스도 참고하였다. CDS 성장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1897년에 < 재창조된 서커스>라는 작품이 LA예술축제에 초청을 받아 성공을 거두고 이어서 캐나다와 미국순회공연으로 이어진 일, 또 하나는 프랑크 드라고네(Frank Dragone)의 영입이었다.

드라고네는 1985년부터 1998년까지 CDS의 대부분의 작품에 관여하였고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서커스 팬들에게 익숙한 살팀방크(1992), 미스테르(Mystere, 1993) 알레그리아(1994), 퀴담(1996), 라 누바와 오쇼( 1998) 등이 그의 작품이다.

 

- 도약

CDS1990년대에 크게 도약한다. 작품이 20 개까지 늘어났고 세계 40여개국의 300여개 도시에서 공연을 한다. 50여개국에서 선발된 5000여명의 직원과 단원들이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연간수입이 10억 달러를 넘었다.

 

- 침체기

2010년 투어프로그램인 <토템>을 시작하였고 2011년에는 세 개의 작품이 이어졌다. <마이클 잭슨>, <자르카나> 그리고 LA에서 공연한 <아이리스>였다. 그러나 <자르카나><마이클 잭슨>은 혹평을 받았다. 2010년에 엘비스 프레슬리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배경으로 <비바 엘비스>를 시작하였는데 2013년에 종료하고 말았다. 이를 대체할 작품으로 <자르카나>를 제작한 것이었는데 이 역시 실패하고 만 것이다.

<바나나 슈필>(Banana shpeel)200911월 시카고 극장에서 시작된 보드빌 기반의 쇼로서, 20104월부터는 뉴욕으로 옮겨 공연을 하였으나 평가가 극히 저조하여 6월말경 종료하였다. 이어 9월에는 토론토에 진출하였지만 이 역시 악평을 받아서 종료하였는에 이미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공연까지 포기한 것이었다. 2천만달러 정도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보여진다. 2011년에 후쿠시마의 원전사고 때문에 도쿄의 <제드>가 티켓 판매부진으로 중단되었고 2012년에는 <자이아>가 흥행부진으로 공연을 중단하였으며 11월에는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공연하던 <아이리스>를 중단하였다.

사고도 잦았다. 2009년에는 훈련도중 사차 추로프(Sacha Zhurov)가 사망하였고 2013<카쇼> 도중 사라 사순(Sarah Sasoun)이 추락사하였다. 2016년에는 공중곡예 장비가 머리에 떨어져 올리비에 로체트가 사망하였는데 그는 기 랄리베르테와 함께 CDS를 창단한 질 스트 크르와의 아들이었다. 2018년에도 <볼타>공연도중 얀 아르노가 사망하였다.

CDS흥행부진이 지속되면서 경비절감과 감원 등의 경영합리화 조치를 취하였다. 2012년에 몬트리올 본사직원 50명을 해고하였고 2013년에는 5000 명 중 400여 명을 감원하였다. 201590%의 지분을 TPG캐피털과 포선 그룹에 15억 달러에 양도하였고 기 랄리베르테는 10%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 쇄신

소유주가 바뀌고 경영진을 교체한 후 2015년 이후부터 프로그램을 조정하고 신작제작을 늘렸다. 2015년에 한 편, 2016년에는 2, 2017년에는 3, 2018년에 1, 2019년에 6편의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였고 2020년에는 3편이 예정되어 있다. 또한 공격적인 투자로 새로운 회사를 사들였다. 2017년에는 블루 맨 그룹을 65백만 달러에 구입하여 자회사로 편입시켰고 2018년에는 어린이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브이스타 엔터테인먼트와 그 자회사를 구입하였다.

 

코로나 19와 관련된 CDS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CDS319일 전체 5천여 명의 직원중 무려 95%에 해당하는 4,679명을 해고하였다. 남은 직원은 259명인데 그나마 무급으로 일한다고 한다( 더 프리뷰, 2020.3.22.). 코로나 19는 모든 공연장의 폐쇄를 불러왔고 전혀 수입이 발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CDS를 인수한 새로운 경영진은 신작제작을 늘리고 새로운 회사를 인수하는 등 매우 공격적인 경영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자금운용에서 어려움을 겪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직원들은 경영진의 무리한 투자를 비판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에 발생한 어려움이 5년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공연이 재개되면 재고용할 것이라고 한다. 반면 브로드웨이에서는 브로드웨이 리그와 14개의 노조사이에 긴급 구호협약(Emergency Relief Agreement)를 맺어 배우와 뮤지션, 무대스탭, 어셔, 미용스탭 등에게 적어도 1개월분의 급료와 건강보험료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NYtimes.com. 3/20). CDS와 브로드웨이 리그 사이의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CDS의 이번 사태는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공연산업은 때로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에 직면할 위험을 안고 있다.

 

- 이야기 서커스

CDS는 대표적인 상업서커스 단체다. 1970년대 이후에 나타난 현대서커스들이 사회 변혁이나 여성운동 등 사회적 의제를 주로 다루었다면 CDS는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도입한 가장 큰 혁신은 이야기의 도입이다. 그리고 CDS의 이야기의 주제는 탐색 quest’이다. CDS의 이야기는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기업의 이야기다. 탐색은 이념의 탐색이라기보다는 상업적 성공을 위한 방법의 탐색이다. CDS는 늘 회사의 브랜딩 이야기를 강조한다. 최고라는 말보다는 경이나 여행과 같은 브랜딩을 중시한다. CDS라는 브랜드, 혁신적 대중문화의 대명사로서의 회사의 이미지를 브랜딩한다. 예술적 비전을 갖추고 대중과 함께 하는 서커스단을 표방한다.

두 번째로는 창단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창단 이야기는 위험을 돌파하려는 각오와 담대한 행동,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하려는 모험정신이다. 창업자 기 랄리베르테는 용기 자체가 회사의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었고 편안함에 안주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 하였다. 안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회사는 늘 혁신의 여정을 계속해왔다. 새로운 예술적 통로를 탐색하는 일, 그것은 CDS가 지향해 온 가장 핵심적 가치였다. 늘 조직의 혁신을 생각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대담한 여정을 계속해 왔고, 이로써 회사는 늘 전진할 수 있었다.

창업자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기 랄리베르테는 퀘벡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보잘 것 없는 버스커였다. 그런 그가 세계적 공연예술의 거장이 된 것은 그의 대담한 탐색의 덕분이었다. 탐색은 CDS의 메타이야기의 본질이다. CEO자리에서 물러난 기 랄리베르테의 현재의 직함은 가이드다. 그러나 CDS의 직원들은 기 랄리베르테를 태양왕(roi soleiu)’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서커스에 도입한 이야기다. 전통서커스는 대개 10-12개의 쇼를 한 쇼당 6~7분 정도씩 공연하였다. 여기에 사회자 역할을 하는 링마스터가 등장하여 쇼의 순서를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현대 서커스는 여기에 이야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통일된 주제하에 모든 쇼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스토리로 이어나가는 것이다. 서커스가 연극적인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는 이야기가 필수적으로 삽입되어 연극적인 형식을 갖추게 된다. CDS 쇼의 특징은 캐릭터 신체(character body)’의 도입이다. 관객은 공연자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캐릭터 신체는 허구세계의 허구인물을 제스처나 자세, 표현등을 통해 나타낸다. CDS는 개별적 공연자가 아니라 쇼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쇼 자체가 스타다. 서커스는 전체적인 서사와 은유의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Narrative in Performance, 113).

공연의 내용도 매우 탐색적이다. CDS의 많은 이야기들이 과거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본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들이 많다. 예를 들어 <카쇼>는 영웅이 새로운 탐구의 여행을 떠나 그의 환경으로부터의 분리를 경험한 뒤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리자면 원래의 모습을 탈영토화하고 새로운 형식의 세계를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곡예가 있었다. 가무백희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노래와 춤, 곡예 등이 혼합된 종합예능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양수척, 재인, 사당, 창우, 광대 등 곡예사를 의미하는 많은 호칭들이 사용되었다. 재인은 조선후기에 땅재주, 줄타기, 탈춤, 꼭두각시놀음 등의 민간예능을 전문직업으로 삼아온 사람들이었고 광대와 창우는 민속극과 줄타기 솟대타기 등의 곡예를 전문으로 하던 예능인이었으며 솟대쟁이패와 초라니패는 솟대타기를 장기로 하던 곡예집단이었다(호모 서커스, 235-244).

근대적 서커스가 도입된 것은 일본을 통해서였는데 일본의 서커스는 유럽의 서커스를 도입한 것이다. 일본에도 오래전부터 산가쿠(散樂)라 불리우는 잡희와 산가쿠의 일종인 기가쿠(伎樂)라 불리우는 전통연극이 있었다. 그런데 기가쿠는 5세기 중엽 백제의 미마지(咪摩之)가 전한 것이다(服部行雄 , 藝能史, 10-11). 우리나라의 첫 서커스단은 1926년에 창단한 동춘 서커스단이다. 1950- 60년대에는 전국에 100여 개의 서커스단이 있었고 당시 젊은이들의 가장 큰 꿈은 곡예사가 되는 것이었다. 마치 오늘날 젊은이들의 꿈이 연예인인 것처럼 당시의 서커스는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 가장 인기있는 예능이었다. 서커스단이 들어오면 3-4천명의 관객이 끈에 매달려 오듯 달려왔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서커스단원들은 방송으로 흡수되었고 서커스단에서 공연했던 프로그램들이 마치 오늘날 지상파 방송의 종합편성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서커스를 체계적으로 훈련하고 이를 조직화하는 학교나 기관, 이 없다 . 그러나 서커스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거리축제나 거리연극, 버스킹등은 기본적으로 서커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넌 버벌 퍼포먼스라고 일컫는 많은 퍼포먼스들 역시 서커스 기반이다. 서커스의 기본적인 기능은 오락이지만 오락은 중요한 관광자원의 하나가 된다.

 

눈의 오페라

19세기에 프랑스의 테오필 고티에는 서커스를 눈의 오페라라고 불렀다(Semiotics at the Circus, 7). 그가 말한 눈의 오페라는 근대서커스의 화려한 기교와 스펙터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현대 서커스에 적용되어야 한다.

전통서커스는 오랫동안 어린이들이나 좋아하는 고리타분한 오락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극단, 청명한 날씨와 대중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는 수준낮은 하급문화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전통서커스는 스펙터클의 한계에 부딪혔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변신을 해야 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다. 부활의 비결은 예술이었다. 그러나 그 예술은 난해한 고급예술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예술이었고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스펙터클이었다. 서커스는 인간신체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고난도의 기술, 아크로바틱이 등장하는 비일상적 세계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나 즐거움만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서커스는 미학적 아름다움이 풍부하다. 균형잡힌 신체, 오랫동안의 각고의 훈련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동작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화려한 스펙터클은 서커스를 아름다운 신체예술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 19세기에 프랑스의 화가들이 서커스에 열광한 것은 시각적 스펙터클때문이었다. 현대 서커스는 통일된 주제하에 조명과 음향, 음악 등 공연예술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종합하고 여기에 이야기를 도입하여 연극적인 쇼를 만들어내고 있다. 단원들은 예술성을 갖춘 세계적인 기량의 퍼포머들이고 이를 조직하고 창작하는 감독들은 세계 최고의 연출능력을 갖춘 연출가들이다 . 이들은 첨단기술과 인간의 신체능력을 결합하여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세상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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