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팬데믹 시대의 공연예술(상)
[더프리뷰 칼럼] 팬데믹 시대의 공연예술(상)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0.05.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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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혁명, 공연혁명

최근 공연산업에는 놀라운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공연실황을 촬영하여 라이브나 녹화로 중계하는 영상공연이 늘어나고 있다. 2006년부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라이브 인 HD>라는 이름으로 공연실황을 실시간 영상으로 전송하기 시작한 이후 비엔나 필, 베를린 필, 영국 국립극장,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 세계적 예술단체들이 이를 따라 하고 있다.

대중음악 분야의 변화는 혁명적이다. 지난 4월에 미국의 게임 사이트 포트나이트에서 개최한 유명 래퍼 트래비스 스코트의 콘서트에는 무려 1,230만 명이 접속하였다. 포트나이트는 미국 10-17세 청소년의 40%가 매주 한 번 이상 접속하고 있는 인기 게임 사이트인데. 순수한 콘서트 사이트가 아닌 게임 플랫폼에 1,000만 명 이상의 유저가 접속한 것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건 트래비스 스코트의 아바타를 포함하여 전부가 VR이고 이를 온 라인으로 시청한 관객들만이 실재였다. 그가 부르는 노래와 함께 홀로그램, 그래픽, 고급 VR기술로 만든 각종 배경과 고품질의 영상 그리고 게임이라는 장르특성 등이 관객유인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최근 네이버와 SM이 제작하고 있는 <비욘드 라이브>는 VR을 이용한 탈극장의 콘서트로서 유료라는 점이 특별하다. 비욘드 라이브는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가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 흥행을 성공시킴으로서 공연의 흥행방식과 공연의 존재론을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온 라인 공연을 실시하지 않았던 많은 예술단체들이 녹화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있고, 유료로 영화관에만 전송하던 오페라 등도 무료로 유튜브에 전송하고 있다. 이는 코로나 19 사태가 불러온 변화다. 공연이 정지된 시대, 공연부재의 상황에서 공연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다. 그러나 온 라인 공연이 코로나 19 때문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영상을 사용한 온 라인 공연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코로나 19가 이를 더욱 촉진했을 뿐이다.

오늘날의 공연상황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세상은 바야흐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는 세상, 시뮬라크르의 세상이 되었다. 원본과 복제가 내파되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게 된 포스트 트루스의 세상. 디지털 영상기술의 발전은 공연의 존재론, 라이브의 개념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마치 사진의 원본을 특정하기 어려운 것처럼 트래비스 스코트 공연과 <비욘드 라이브>에서는 아예 원본이 사라진 느낌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라이브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관객이 라이브로 등장하여 가수와 상호작용을 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극장이 없는 탈극장의 콘서트다. 반면에 일반적 콘서트보다 훨씬 다양한 미장센이 등장한다. 마치 영화와 같다. 홀로그램이나 VR로 된 배경이 설치되고 VR 세트도 등장한다. 콘서트지만 영화적 형식과 라이브 공연을 혼합한 콘서트다. 그야말로 실재와 이미지, 원본과 복제본을 구별할 수 없는 내파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적 공연형식을 파괴한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 탄생한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공연은 극장에서 퍼포머가 관객과 직접 만나는 것이었지만 영상공연은 라이브 공연의 개념과 공연의 존재론적 성격을 바꾸고 있다. 라이브 공연의 “ 기술적, 미학적 오염( 패트리스 파비스)”은 이제 불가피한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영상공연’이 늘어나고 있는 것인가? 미학적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인가? 아니면 관객들의 미적 경험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인가?

(공연의 명칭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된 이름이 없는 것 같다. 필립 아우스랜더는 이런 형식의 공연을 매개된 공연 Mediatized Performance이라고 부른다. 미디어화된 공연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복제공연이라는 용어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튜브 스트리밍>, < 온라인 스테이지>, <HD 라이브>, <카톡 1열> , <랜선 공연> , <온 라인 공연>등 많은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 텔레워크telework 영화>라는 이름도 사용하고 있다. 최근 많은 언론에서 <온 라인 공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온라인 공연으로 통일되지도 않은 것 같다. 이들은 생방송이냐 녹화냐에 관계없이, 또한 매체의 차이에 관계없이 공연을 영상으로 촬영하여 전송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필자는 영상공연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영상이라는 매체를 다양한 플랫폼에 탑재하고 있고, 점점 영화적인 기법의 촬영과 영화적인 흥행방식 등 영화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된 이름이 필요할 것 같다).

그 동안의 영상공연은 자본력이 있고 예술적 지명도가 높은 세계적 예술단체들이 디지털 영화관에 위성을 통해 라이브로 전송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료공연은 무료로 바뀌었고 세계적 단체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작은 어린이 뮤지컬 단체나 연극단체도 유튜브로 전송하고 있으며 유튜브를 위한 공연을 별도로 기획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 공연은 공연 아카이브에서 꺼낸 작은 단편들이다.

비욘드 라이브(출처 : msn.com)
비욘드 라이브(출처 : SM엔터테인먼트)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비욘드 라이브>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나 베를린 필, 비엔나 필등의 <HD 라이브>등과 같은 유료공연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여 촬영한 고화질의 영상을 주로 영화관에서 상영하거나 <비욘드 라이브>처럼 인터넷 망을 이용한 온라인 포털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욘드 라이브>는 순수예술의 영상공연과 달리 처음부터 라이브 공연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라이브의 개념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공연형식의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공연의 개념과 흥행방식, 관객의 수용태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기저에는 기술과 미디어의 발전이 있다.

공연과 미디어

공연예술사에는 몇 차례의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첫째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된 실내극장의 출현이다. 이로써 공연은 상업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16세기 후반에 영국에는 상업극장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는데, 세익스피어와 같은 문호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어쩌면 상업화된 연극이 세익스피어의 탄생을 도왔는지도 모른다. 이후 공연은 상업화, 대중화의 길로 들어서고 극장은 커지고 무대는 스펙터클해졌다.

두 번째로는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소극장 운동이다. 이로써 연극은 예술화의 길로 들어선다(공연의 예술화는 18세기 중반에 등장한 일반적 의미의 예술보다 훨씬 늦게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줄곧 상업화의 길을 걸어온 연극은 의식있는 연극인들의 저항을 초래하였다. 앙드레 앙트완느나 오토 브람, 스타니슬라브스키 등이 주도한 소극장 운동은 상업주의, 스펙터클, 흥미위주의 연극에서 벗어나 예술적 연극을 지향하였다. 유럽에서 출발한 소극장 운동은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상륙한다. 그러나 소극장 운동은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 번째로는 전자 미디어의 발명과 영상매체의 등장이다. 영상은 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 다게르가 사진을 발명한 것이 1839년이었다. 그러자 화가, 특히 초상화가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50년 뒤인 1889년에 에디슨이 영화를 발명하였으며 1895년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기차의 도착>이라는 최초의 영화가 탄생했다. 이 신기한 활동사진은 정지된 이미지에만 익숙해 있던 당시의 대중들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텔레비전이 등장하였다. 텔레비전은 엔터테인먼트의 소비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는다. 안방에 앉아서 돈도 들이지 않고 오락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상은 움직임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이제 공연은 영화와 텔레비전에게 엔터테인먼트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연극극장은 영화관으로 바뀌고 연극무대는 빈사상태에 빠진다. 연극은 다른 엔터테인먼트와의 차별화를 위해 예술연극, 실험연극을 계속해야 했다. 연극이 상업적으로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등의 상업연극이 롱 런하기 시작하는데 세계화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국가의 일부 지역에 한한 일이다. 네 번째로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의한 영상공연의 등장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압축기술과 전송기술 등의 발전으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디지털 파일을 위성을 통해 전송함으로써 필름이 없는 디지털 영화로 전환하였다. 디지털 기술은 방송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많은 채널들이 가능해짐으로서 전통미디어의 경쟁력이 약화된다. 전통미디어는 수없이 늘어난 다양한 플랫폼을 가진 뉴 미디어의 강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은 세계인들을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 통합하고 있다. 디지털은 현대인의 삶의 모든 방면에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디지털로의 전환(Digital Turn)시대의 디지털 혁명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출처 :구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출처 :구글)

 

영상제작기술의 발전 또한 괄목할 만하다. 기존의 HD보다 더 선명한 4K 영상이 가능해졌고 5.1 서라운드 음향, 무빙 라이트 등 새로운 음향장비와 조명기술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영화관에서 보는 메트로폴리탄의 영상은 영화와 같은 수준의 고화질을 자랑한다. 미디어 파사드나 포로젝션 매핑과 같은 새로운 영상기술은 그 자체가 새로운 공연장르가 되었다. 새로운 영상기술은 공연의 배경이나 세트를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무대세트를 영상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은 기존의 실물세트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답다. VR이나 AR과 같은 가상현실 역시 공연세트를 더욱 시각적으로 바꾸고 있고, 출연자들도 아예 VR로 만들 수 있다. 공연의 물질성이 비물질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공연제작비용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 디지털 경제’의 출현이다.

공연기획자들은 이를 공연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 첫 주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아니라 일본 쇼치쿠(松竹)의 시네마 가부키였다. 2003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2005년부터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전국의 극장체인에 가부키를 영상화하여 상영하고 있다. 이는 라이브가 아니라 녹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방식을 이용하여 전국의 자사 영화관에 가부키를 흥행한 것은 획기적인 흥행방식의 변화였다. 이어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2006년부터 HD 라이브를 시작하였다. 이는 라이브 공연을 그대로 실시간으로 전세계 제휴영화관에 전송한 것으로 본격적인 온 라인 공연의 출발이었다.

그림으로의 전환

사진으로부터 출발한 시각매체의 변화는 영화, 텔레비전, 인터넷, 유튜브, 모바일 등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미지는 가상현실과 증간현실 등에 이용되어 가공의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르른다. 정지 이미지에서 출발한 이미지는 점점 움직이는 이미지로 바뀌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던 세계는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문화는 점점 동적으로 변하고 있고 이는 인간의 사유방식의 변화까지 촉발하고 있다. 매체의 발달은 이미지의 증가를 동반하게 되고 이미지는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다니엘 부어스틴은 1950년대에 벌써 그래픽 혁명을 말하였다. 이어서 이미지 혁명, 이미지 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이미지는 예술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방면으로 확산되었다. 이미지와 영상은 의학, 과학 심지어 범죄수사에까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미지는 점점 언어중심적 사유를 대체하게 된다. 미첼은 이를 그림으로의 전환(Pictorial Turn, 1992)으로 불렀고 독일의 고트프리드 뵘은 거의 같은 시기에(1994) 도상적 전환(Iconic Turn)으로 불렀다. 이들을 통칭해서 시각적 전환( Visual Turn)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로써 이미지와 영상은 문화연구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미지의 시대다. W.J.T. 미첼은 그림으로의 전환을 이렇게 정의한다. “ 그림으로의 전환이 무엇이든지간에, 이는 순진한 미메시스로의 복귀나 재현이론의 복제, 또는 새로운 그림의 현전(presence)의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각성, 장치, 제도, 담론, 신체, 형상성 간의 복합적 상호작용으로서 그림을 포스트언어학적이고 포스트의미론적으로 재발견하려는 것이다.” ( 『Picture Theory』, 1992, p15)

우리는 지금까지 물리적 실체를 가진 그림(picture)이나 이미지는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첼은 이를 좀 더 넓은 차원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기능으로 확장하고 있다. 최근의 기술발전은 이미지를 매우 복합적이고도 복잡한 관계들의 체계로 유도하고 있다. 언어적 전환은 언어의 재현기능에 대한 관심의 폭발, 언어의 수행성 등에 대한 관심이고, 의미론적 전환이 문화의 해석 등에 있어서의 의미와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그림으로의 전환은 이미지가 초래하고 있는 사회전반에 걸친 변화를 의미한다. 플라톤 이래 서양에서는 이미지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음성중심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플라톤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이미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미지는 오히려 언어보다 선행하였다(데리다)거나 그림은 대상을 설명한다는 그림이론(비트겐슈타인)등이 대표적이다. 이미지는 인류와 함께 있었다.

이미지가 중요해진건 기계적 이미지의 증가와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변화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미지를 특정자본이 독점하였다. 영상은 전통미디어가 독점했고 권력은 이미지에서 나왔다. 그러나 영상을 독점하던 전통적 미디어는 그 힘을 상실하고 있고 새로운 미디어들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 미디어는 점점 개인화되는데, 여기에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이미지의 증가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인터넷 포탈 등에서 쏟아져나오는 이미지와 영상들은 현대인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여 언제든 전송할 수 있다. 문자보다 이모티콘으로 소통하는 편이 감정을 잘 전달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순식간에 지구 반대편으로 전달할 수도 있다. ENG 등의 방송용 카메라가 독점하던 이미지 시장은 이제 모든 개인들이 제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 이미지 제작의 민주화’ 가 달성되었다. 유튜브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지의 범람, 과잉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오히려 넘치는 이미지, 빛과 색의 과잉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미지는 매체환경을 급격하게 바꾸고 있고 권력관계의 지형까지 바꾸어 나간다. 도시의 밤은 휘황찬란한 빛의 세례속에서 갖가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도시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바뀌고 있다. 미디어 파사드는 도시전체를 잠들지 않는 거대한 이미지로, 역동적 생명체로 바꾸고 있다. 도시는 이제 하나의 극장이 되었고 뮤지엄이 되었다.

새로운 미디어는 이미지, 언어, 문자 등의 온갖 기초적 매체들을 종합할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커뮤니케이션, 홍보, 매스 미디어, 예술, 오락 등의 모든 사회적 기능들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우리는 미첼의 정의에 경제를 추가해야 한다. 이미지 경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지가 창출하는 부는 거대하다. 텔레비전과 영화는 대표적인 영상비지니스다. 유튜브는 거대한 영상저장고를 통해 광고비지니스를 하고 있고 , 넷플릭스는 영상을 통해 드라마 비즈니스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그림으로의 전환, 영상적 전환은 현대사회의 모든 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전면적 변화다. 이미지의 이와 같은 구성적 힘을 이미지의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미지는 세상을 창조한다. 이미지에 대한 연구는 예술사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제는 이미지 경제, 이미지 과학(Image Science)으로 확장되고 있다 .

맥루언은 매체가 변하면 인간의 지각방식이 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매체의 변화는 개별적인 인간의 지각방식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술이나 매체의 발전이 곧 문명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영상은 문화변용의 핵심적 매체가 되었다.

포트나이트 트래비스 스코트 공연(출처 :구글)
포트나이트 트래비스 스코트 공연(출처 :구글)

 

주도매체, 주도예술

시대별로 가장 영향력있는 예술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주도예술, 주도매체라고 부르기로 하자. 마치 한 집안에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이나 집단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있어서 이들이 집단의 나아갈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매체나 예술환경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바흐친은 각각 17세기에는 음악이 19세기에는 소설이 당시의 지배예술이었다고 하였다. 18세기는 철학의 시대라고 말한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고전주의에서는 문학이, 낭만주의에서는 회화가, 후기 낭만주의에서는 음악이 지배적인 예술이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영화의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오늘날 예술의 지배적 장르가 영화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심적 매체(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질료)는 영상이다. 20세기 이후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배적 예술은 한 시대의 예술을 주도한다. 다른 예술들은 이 지배적인 장르를 닮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 지배적 예술을 결정하는 건 매체다. 인쇄술 발명 이후 전자 미디어가 발명되기 전까지 문자가 가장 주도적인 매체였기 때문에 문학이나 소설이 지배적 예술이 되었던 것이고 20세기 초반부터 전자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영상이 지배적 위치에 오른 것이다. 오늘날의 지배적 매체인 영화는 연극을 점점 영화화하고 있다. 영상공연은 연극이 영화를 닮으려 하는 시도다. 영상공연이나 <비욘드 라이브>와 같은 영상콘서트는 여기에 가상현실을 사용함으로써 영상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연극뿐만 아니라 콘서트까지도 점점 영화를 닮아가고 있다.

온라인 공연의 등장은 공연예술의 미학적 성격, 경제. 사회. 문화적 성격 등에 대해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과연 공연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영상공연의 미학적 성격은 ? 공연을 영상으로 전환하면 어떤 차이들이 나타나는가? 소위 상호매체성이나 상호예술성의 입장에서는 어떤 변화들이 생성되는가? 대중들은 영상공연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그리고 영상공연은 산업으로서의 공연의 경제적 가능성을 높일 것인가? 등등.

공연예술의 존재론

공연예술은 크게 연극계(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와 콘서트계, 그리고 서커스와 같은 기타계로 나눈다. 이들은 모두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생산방식과 관객의 수용방식이 사뭇 다르다. 그래서 예술이나 사회를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공연예술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 가족간에는 동일성은 없지만 유사성을 찾아 가족을 규정할 수 있는 것처럼, 공연예술에는 어떤 가족유사성이 있을까? 그것은 관객과 배우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공간에서 함께 대면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현전(presence) 또는 공동현전(co presence)이라고 부른다. 이를 라이브 공연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현전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전자적인 방식의 복제공연도 공연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필립 아우스랜더(Philip Auslander)는 그의 논쟁적인 저서 『라이브니스』에서 텔레비전등 기술적 미디어를 사용하여 복제하는 공연도 공연이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라이브의 개념에 대한 여러 논쟁들이 이어지고 있고 아우스랜더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필립 아우스랜더와 페기 펠란은 공연의 성격에 대해 대립하고 있다. 페기 펠란은 “ 공연의 유일한 생명은 현재에 있다. 공연은 보존되거나 녹화되거나 문서화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공연은 재현의 재현의 순환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공연이 아닌 다른 것이 된다. 공연이 재생산의 경계에 진입하려는 시도는 공연의 존재론의 전망을 약화시키고 배반하는 것이다.” 페기 펠란은 공연은 '재생산이 없는 재현’ (representation without reproduction)이라고 주장한다. 즉 공연은 실연(라이브니스)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재상산이 일어날 수 없으며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공연이라도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 Peggy Phelan, 『 Unmarked : the Politics of Performance』, p146 )

반면에 필립 아우스랜더는 매개된 공연(mediatized performance), 즉 TV를 통해서 방송되는 공연이나 라이브 공연이 큰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몇 가지 이유에서 펠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라이브 공연과 매개된 공연간의 차이가 줄어드는 상황, 라이브 공연이 점점 매개공연을 닮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둘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Philip Auslander, 『Liveness』,p7)

원래 매개공연은 라이브 공연을 모델로 하였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금은 라이브 공연이 매개공연을 모델로 하는 경우가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라이브와 매개가 경쟁관계에 있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본원적이거나 내재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초기 영화는 연극을 모델로 한 것이다. 영화가 새로운 매체의 언어가 되기 전까지는 무대위의 서사구조나 시각적 장치들( 클로즈 업이나 페이드인 페이드 아웃 포함해서)을 모델로 한 것이다. 영화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연극적 언어를 개량하고 빠르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지배적 위치를 점령하게 된다. 텔레비전과 연극도 영화와 연극의 관계와 유사한 과정을 겪는다. 영화의 발전이 연극에 문화.경제적 충격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1920년대에 영화가 연극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극은 그야말로 고사직전이었는데도 영화가 초기에 연극을 껴안았던 것처럼 왜 TV는 연극을 “ 재현의 모델” 로서 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해답은 텔레비전의 영상미학의 본질이 영화보다도 연극의 라이브 공연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TV의 본질은 영화처럼 녹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는대로 바로 전송하는 데 있다. 원래 모든 TV방송은 라이브 전송이었다.

영화는 기억, 반복, 그리고 시간적 차이의 영역에서 재현된다. 반면에 TV는 연극처럼 현재성의 공연으로 특징지워진다. 이는 초창기 TV가 전부 라이브로 방송될 때의 경우인데, 지금도 라이브는 TV의 중요한 영역이다. TV의 친숙성은 즉각성- 사건에 대한 관객의 근접성- 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외부의 사건이 가정에 전송되는 사실로 나타난다. TV가 가정에 영상을 직접 전송하는 것은 마치 연극을 극장에서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 그리고 많은 카메라를 설치하여 연극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지각적 연속성(perceptual continuity)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카메라에서 다른 카메라로 커트를 이동하는 것은 관객의 눈을 복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볼터와 그루신은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를 모방하거나 장점을 흡수하는 현상을 재매개라고 하였다. 재매개의 개념을 빌려서 아우스랜더는 라이브 공연도 TV나 비디오,영화등을 복제하려고 한다고 본다. 라이브 공연은 이제 미디어 기술의 생산물이 될 정도로 매개화를 도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기적 증폭(앰플리케이션), 마이크를 사용한 화자의 음성의 증폭등이 이에 해당한다. 스포츠 경기 관람도중 경기장에 설치된 리플레이, 클로즈 업, 방송국의 시간에 맞춘 경기스케쥴 등을 든다. 클래식에서도 나타나는데 뉴욕필이 2004년에 청소년들을 위해 라이브 피드를 제공하여 뮤지션의 클로즈업등을 보여준 것이 그런 예다 .

연극에서 박수부대를 동원하는 것과 TV에서 관객들의 박수사인을 보내는 것도 유사하다. 대부분의 라이브 공연은 재생산의 테크놀로지를 도입한다, 전기적 확성등이 그것이다. 원래 매개공연이 라이브를 모방하다가 지금은 오히려 라이브가 매개공연을 모방한다. 이런 패턴은 연극과 TV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초창기 TV제작은 관객의 시각적 경험을 복사하였다. 1940년대부터 연극은 TV와 다른 미디어를 모방하려고 하였다. 라이브에 TV가 모방되는 것은 영상미디어의 근접성(proximity)과 친숙성(intimacy)을 도입하기 위해서다

( 『Liveness』, 184)

아우스랜더는 TV와 연극이 그 기원에서부터 같은 근원에서 출발했고 발전과정에서 유사한 과정을 거쳤으며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고 지금도 서로 닮아가고 있어 닮은 점이 많다고 본다. 그래서 TV나 연극은 상호간에 유사성이 있는 매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복제본이 있기 때문에 라이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대적 개념을 주장한다. 그래서 아우스랜더는 그리스 연극은 복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복제와 원본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본다. 원본과 복제본, 근원과 파생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현전의 형이상학 비판

아우스랜더의 주장은 데리다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그는 『Liveness』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중심개념인 기억 또는 흔적과 차연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Just be Yourself」 라는 논문에서는 로고스 중심주의 개념을 이용하여 스타니슬라브스키, 브레히트, 그로토프스키의 연기론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 연극인들은 연기자(현전)가 연기의 중심요소라고 주장하는데, 아우스랜더가 보기에 진정한 연기란 연기자적 자아(actorly self)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배우보다 배우가 재현해내는 연기자적 자아가 보다 진정한 연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아우스랜더는 오히려 드러나는(현전) 것보다 현전한 것을 잘 재현해내는 것이 근원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데리다는 서양철학이 현전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Presence)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현전의 형이상학이란 로고스 중심주의 또는 음성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인데, 서양인들은 언어에 있어 음성은 문자보다 선행하고 겉으로 드러나기 (현전) 때문에 음성이 문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전의 형이상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또는 로고스의 현전이 우선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이라는 사상이다. 플라톤이나 루소 등은 말보다 문자를 열등한 언어로 보았는데 이런 것이 현전의 형이상학이라는 비판이었다. 서양 철학에서 문자언어가 음성언어의 옷이라는 사실이 한 번이라도 의심스럽게 생각된 적이 없었다(데리다, 『그라마톨로지 』69).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의 자의성이라는 개념을 들어 음성과 문자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산에 있는 나무와 우리가 문자나 음성언어로 말하는 나무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다. 따라서 문자가 음성을 재현한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데리다는 오히려 문자의 일차성을 주장한다. 음성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흔적’ 들, 기억속에 저장된 기록을 끄집어내서 음성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적이나 기억이 음성보다 선행한다. 이런 흔적들의 관계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흔적은 의미일반의 절대적 기원이다. 이는 곧 의미일반의 절대적 기원은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흔적들을 ‘원문자’라고 부른다. 원문자는 문자나 음성이 아니라 그런 언어 이전에 기록된 흔적들이다. 원문자는 문자나 음성에 우선한다. 문자는 언어의 이미지가 아니고( 『그라마톨로지』, 87), 음성언어는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의 문자언어다(89). 음성이 문자에 우선한다는 주장, 즉 현전의 형이상학은 틀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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