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이용숙의 ‘바그너의 죽음과 부활’
[북리뷰] 이용숙의 ‘바그너의 죽음과 부활’
  • 이종호 기자
  • 승인 2020.09.21 1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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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바그너’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다섯 연출가
이용숙 저, '바그너의 죽음과 부활'(사진=도서출판 모노폴리)
이용숙 저, '바그너의 죽음과 부활'(사진=도서출판 모노폴리)

[더프리뷰=서울] 이종호 기자 = 클래식 음악사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만큼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논란의 중심에 섰던 작곡가는 다시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페라 종주국인 이탈리아의 국민작곡가 베르디. 그가 지배하던 19세기 오페라계를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 같은 대규모 독일어 음악극으로 평정했고, 압도적인 다이내믹과 극단적인 서정미를 오가는 그의 치밀하게 계산된 음악 덕분에 ‘20세기 영화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클래식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유럽의 오페라 예술을 이끈 마스네, 생상스, 푸치니 모두가 그의 추종자들이었을 만큼 바그너는 당대 최고의 인기 작곡가였다.

그러나 철학자 니체는 바그너가 관객에게 최면을 걸고 관객을 도취로 이끄는 ‘대단히 위험한 마술사이자 사기꾼’이라고 말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의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계승하고 그의 예술을 신격화하자, 이런 니체의 평가는 현실적인 악몽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기 홀로코스트의 충격은 바그너 음악에 대한 혐오를 낳았고 독일의 지식인들은 바그너 음악을 감상하면서 죄책감까지 느껴야 했다. 슬라보예 지젝과 알랭 바디우 같은 현대철학자들 역시 <바그너는 위험한가>라는 책을 통해 여전히 이런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음악평론가 이용숙의 <바그너의 죽음과 부활: 음악극 연출을 통한 작품의 재탄생>은 이처럼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된 천재 작곡가의 음악극을 살려낼 방도를 논의한다. 이 책은 저자의 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 박사학위논문 ⌜바그너 <파르지팔>의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구: <파르지팔>은 레지테아터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했는가⌟를 일반 독자들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도록 손질한 것으로, 책 제목의 ‘죽음’은 물론 바그너 개인의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바그너 작품의 죽음’을 의미한다.

2008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스테판 헤르하임 연출. 집사 복장에 검은 날개를 단 구르네만츠(연광철)가 암포르타스(데틀레프 로트) 왕에게 치료제를 건네주는 장면(c)Bildarchiv Bayreuther Festspiele(사진=Enrico Nawrath)
2008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스테판 헤르하임 연출. 집사 복장에 검은 날개를 단 구르네만츠(연광철)가 암포르타스(데틀레프 로트) 왕에게 치료제를 건네주는 장면(c)Enrico Nawrath(사진=Bildarchiv Bayreuther Festspiele)

‘68 학생운동’이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 서구에서 시작된 사회적 반권위주의 운동은 저자 및 텍스트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는 수용자 중심의 문화이론을 발전시켰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책이 저자의 손을 떠나면 그 다음부터 텍스트의 해석은 독자의 자유에 맡겨진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과 함께 가능해진 텍스트 해석의 다양성은 연극작품을 새롭게 해석해 무대에 올리는 연출의 다양성으로 이어졌다. 연출가의 해석에 따라 극의 시대적 배경이나 결말까지 달라질 수 있는 ‘레지테아터’는 이런 토대 위에서 70년대 들어 자연스럽게 오페라 분야로도 퍼져나갔다. 연극연출가가 오페라연출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연극 분야에서는 레지테아터라는 개념이 점차 사라지면서 최근에는 더욱 자유로워진 ‘포스트드라마’가 부상했지만, ‘음악이 붙은 가사는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규칙이 지배적인 오페라 분야에서는 여전히 레지테아터가 대세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음악 텍스트(대본)는 보존하면서 연출을 해체하는’ 오페라 특유의 레지테아터 전략, 그리고 이에 따라 역사성과 현재성 사이를 오가는 연출방식을 고찰한다.

2015년 베를린국립오페라 공연, 드미트리 체르냐코프 연출. 마법사 클링조르(토마스 토마손)와 꽃처녀들(c)Ruth Walz
201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우베 에릭 라우펜베르크 연출. 파르지팔(클라우스 플로리안 포크트)을 에워싸고 유혹하는 꽃처녀들(c)Enrico Nawrath(사진=Bildarchiv Bayreuther Festspiele)

 

‘최초의 본격적인 오페라 연출가’로 불렸던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 내부구조를 바꿔가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최후의 역작 <파르지팔 Parsifal>은 중세 기사문학의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인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 Parzival>을 토대로 새롭게 쓴 작품이다. 기사 가흐무레트의 유복자로 태어난 파르지팔이 말 탄 기사들의 모습에 반해 자신도 기사가 되려고 어머니를 뒤로한 채 집을 떠나 기사 수업을 받으며 온갖 모험을 겪는다. 파르치팔은 처음엔 천방지축이고 배려 없는 인간으로 묘사되지만, 많은 모험과 자기성찰 끝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배워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고 성배기사단의 왕으로 부름 받는다.

저자 이용숙은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이 중세 문학작품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 본다. 바그너의 전작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바그너 <파르지팔>의 근간은 신화와 상징인데, 1970년대 이후의 바그너 음악극 연출가들은 이 작품을 꾸준히 탈신화화하고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레지테아터 연출을 통해 원작의 배경을 현대로 옮겨놓고, 하이퍼텍스트를 이용하여 변화된 의미를 채워 넣거나 원작과는 다른 방향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파르지팔>을 무대화했을 때 이 작품의 비현실적인 텍스트에서 오는 지루함과 부조리함, 그리고 히틀러를 매혹했던 바그너의 독일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그너의 의도와는 다른 이야기를 연출가가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파르지팔>의 대본 내용과 관련한 비판들을 분석하고, 이 비판의 논점을 지우면서 새로운 의미로 <파르지팔>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든 참신한 지평의 연출 다섯 편을 조명한다. 한스 위르겐 쥐버베르크는 바그너의 인간적 본질과 이데올로기를 연출에 담았고, 페터 콘비츠니는 에로스의 긍정과 양성의 화합을 통해 에로스에 대한 바그너의 왜곡된 집착을 지웠다. 스테판 헤르하임은 바그너의 저택 반프리트와 함께 독일 근현대사를 무대 위에 옮겨 독일의 과거를 청산하고 바그너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극복했으며, 드미트리 체르냐코프는 현대의 사이비종교집단으로 성배기사단을 대체해 이 신화적인 이야기를 리얼리즘 비극으로 재창조했다. 마지막으로 우베 에릭 라우펜베르크는 난민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세상 모든 종교의 보수성과 교조주의가 일으키는 전쟁과 불행을 비판하면서, 바그너 <파르지팔>의 민족주의 및 기독교적 색채를 지웠다.

저자는 위와 같은 현대 레지테아터 연출가들의 설득력 있는 연출 덕분에 바그너 작품이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레지테아터 연출을 통해 원작에 대한 비판을 없앨 수 있다면 바그너의 음악적, 극적 성과가 훨씬 효과적으로 보전될 것으로 저자는 믿기 때문이다.

201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우베 에릭 라우펜베르크 연출. 파르지팔(클라우스 플로리안 포크트)을 에워싸고 유혹하는 꽃처녀들(c)Enrico Nawrath(사진=Bildarchiv Bayreuther Festspiele)
2015년 베를린국립오페라 공연, 드미트리 체르냐코프 연출. 마법사 클링조르(토마스 토마손)와 꽃처녀들(c)Ruth Walz

<바그너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히 책과 논문 등 참고문헌들만 뒤져가며 쓴 책이 아니다. 유럽 각지의 공연 현장을 쫓아다니며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사진까지 직접 찍은 ‘발로 뛴’ 글들이다. 친절하면서도 깔끔한 문체가 딱딱한 논문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간단히 불식시킨다. 평소 바그너를 둘러싼 논란에 흥미 있던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모노폴리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총서 제8권. 210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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