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0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5)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0 미국 배우노조의 탄생(5)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4.0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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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쟁
사라 베르나르, 1906년 그림엽서(출처 : wiki commons)
사라 베르나르, 1906년 그림엽서(출처 : wiki commons)

신디케이트와 슈버트사 사이에는 크고 작은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크게는 세 차례의 큰 전쟁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05년 샘 슈버트의 죽음 직후의 전쟁이었고 두 번째는 1909년부터 1913년까지의 전쟁, 세 번째는 1917년 12월에 시작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들간의 전쟁은 슈버트 형제들이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샘 슈버트는 우선 극장을 확보하고 여기에 배우와 작품을 배치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샘은 1897년에 처음으로 시라큐스의 배스터블 극장의 경영자가 된다. 이어서 헤럴드 스퀘어극장, 카지노 극장, 리릭 극장들을 차례로 확보하지만 바로 신디케이트의 방해에 부딪히게 된다. 이미 극장예약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신디케이트의 허락이 없이는 자유롭게 흥행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신디케이트와의 혈투가 벌어진다. 샘은 에어랑거를 만나서 호이트의 <텍사스 스티어>에 대한 극장예약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뉴올리안스에 예약을 해주었으나 에어랑거는 곧 이 예약을 바꾸어버린다. 에어랑거에게 더 좋은 작품이 나타난 것이다. 샘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찰스 호이트의 또 다른 작품 <만족하는 여인>에 대한 예약을 다시 신청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었다. 예약매니저에게 뇌물을 주었고 이는 성공하였다. 신디케이트는 샘의 훼방꾼이었고 샘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는 뇌물, 거짓말, 회피 등의 전략을 썼다. 샘은 나중에 닉슨을 회유하여 만약 슈버트사가 공연을 제작하면 닉슨이 재정적 참여를 한다는 비밀협약을 에어랑거 몰래 맺는다. 몇 년후에 닉슨과 짐머만, 슈버트사는 공개적으로 <중국신혼여행>을 공동제작한다. 이 작품은 1902년 슈버트사가 카지노 극장을 인수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뮤지컬이라 이름이 붙었지만 보드빌에 가까운 쇼였다. 주인공이 중국에서 신혼여행중에 어떤 소녀에게 무심코 키스했는데, 이는 중국관습에 의하면 그 소녀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들 들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중국에 대한 호기심을 이용한 공연이었다. 슈버트사는 신디케이트 사무실의 건너편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브로드웨이에 극장을 확보해 나간다. 신디케이트로서는 처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슈버트사로서는 신디케이트에 대한 도발이었다.

슈버트사는 사업초기 신디케이트의 전략을 오히려 그들에게 사용했다. 에어랑거의 뒤에서 작은 극장체인들을 만들어가면서 행동은 교묘하게 위장했다. 그 사이에 샘은 몇 개의 작은 극장체인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는 2천여 개의 극장체인을 가지고 있던 에어랑거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초라한 숫자였다. 아마도 그 때 에어랑거가 더 강하게 압박했더라면 샘은 파산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에어랑거는 왜 그 때 샘을 완전히 파멸시키지 않았는지 질문을 받자, 샘이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하였다. 에어랑거와 슈버트사와의 싸움은 그 후 20여년이나 계속되었다.

뉴욕에 샘이 확보한 첫 번째 극장은 헤럴드 스퀘어 극장이었다. 샘은 첫 시준에 세 작품을 공연했고 여기에는 신디케이트 멤버인 찰스 프로만의 프로덕션도 있었다. 첫 시즌은 성공적이었는데, 신디케이트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샘은 두 번째 시즌에도 신디케이트에 지원을 요청했다. 신디케이트는 아직 이 분야의 애송이인 샘에게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샘에게 더 이상 극장과 작품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미 많은 극장을 장악하고 있던 신디케이트라는 산을 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샘은 신디케이트의 통제를 받지 않는 보드빌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키스-알비 보드빌 서킷이 방해자로 등장했다. 호랑이없는 곳을 찾아 나섰지만 이번에는 사자가 나타난 격이었다. 

슈버트는 신디케이트의 전략을 역이용했다. 신디케이트는 고갈의 경제(Economy of Shortage)전략으로 번창했다. 극장을 짓지 않았고 극장이 적을수록 예약도 많아지고 관객도 늘어난다고 믿었다. 극장을 줄이는 것은 작품선택의 부담이 감소함을 의미했다. 극장예약을 위한 출혈경쟁과 싸구려 공연유치를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미 많은 극장을 관리하고 있던 신디케이트로서는 극장관리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제 막 공연사업을 시작한 샘은 여러 극장을 임차하고 신축하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신디케이트는 스스로의 자금으로 운영했지만 슈버트는 외부 투자자의 투자를 받았다. 시라큐스, 신시내티, 켄터키 등의 부자들로부터. 나중에는 뉴욕의 투자자도 끌어들였다. 그는 스스로 싸울 수 없는 공연관계자들을 위해서라도 싸움에 나서야 했다. 

1903년 슈버트사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 때 프로듀서 모제 라이스를 통해 에어랑거와 접촉하여 작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적과의 동침이었다. 과거에 이미 한 차례 계약을 파기한 적이 있는데도 샘으로서는 극장체인에 좋은 작품을 채우는 것이 필요했다. 순수입의 50%를 주기로 하고 하였고 에어랑거는 최고의 공연을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903년 9월 시카고에서 새롭게 확보한 개릭 극장의 오프닝 공연에서 <프라임로즈>와 <닥스테이더>라는 민스트럴을 거부하면서 계약이 파기된다. 샘은 민스트럴같은 싸구려 공연이 아니라 일급 공연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이러한 싸구려 민스트럴을 계약위반으로 보고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에어랑거는 격분했다. 알 헤이만은 K&E를 대신하여 슈버트에게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항의편지를 보냈다. 샘으로서는 큰 위기의 순간이었다. 샘은 헤이만을 찾아갔고 거기서 에어랑거를 보았다. 헤이만은 악마와 같았다. 그는 15분 동안 격노해서 슈버트를 이 업계에서 퇴출시키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샘과 리는 더 이상 신디케이트로부터 작품을 받을 수 없었다. ‘ 시라큐스로 돌아가라. 여기는 당신들의 자리가 아니다. 여기는 우리들의 자리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사건 이후 슈버트는 거의 궤멸적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에어랑거는 신디케이트의 모든 멤버들에게 만약 슈버트와 어떤 형태로든 거래를 하면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신디케이트는 슈버트를 오판한 것이다. 신디케이트가 압박하면 할수록 슈버트는 더욱 결연한 항전의지를 다졌다. 샘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1903년 가을 신디케이트가 일으킨 전쟁이 더욱 노골화하자 샘은 한 전략을 생각해냈고 이는 20여년 이상 슈버트의 중요한 전략이 되었다. 극장체인을 확장하고 스타배우를 확보하면서 신디케이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배우, 프로듀서, 극장주 등을 우군화하는 것이었다. 이이제이의 수법이었다. 주요 도시에서 극장을 확보하여 프로듀서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고, 이들에게 샘은 영웅이었다. 폭군의 압제에 시달려온 샘의 목표는 신디케이트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그들을 완전히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극장과 콘텐츠의 확보에 나섰다. 1903년부터는 자신들의 제작을 늘려나갔다. 히트작품이 생기자 외부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이익도 상승했다.

 
스타영입 

- 리차드 맨스필드

리차드 맨스필드(britannica.com)
리차드 맨스필드(britannica.com)

신디케이트는 극장과 콘텐츠를 무기로 슈버트사를 압박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샘은 유일한 해결책은 스타확보라고 생각하고 신디케이트에 분노하고 있던 리차드 맨스필드를 접촉했다. 맨스필드(1857-907)는 당시 최고의 세익스피어 배우이자 액터 매니저로서 미국 최후의 낭만주의 배우로 여겨지던 배우였다. 맨스필드는 이미 1896 -97 시즌에 클로와 에어랑거사와 계약하였다. 샘은 우선 전보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샘은 리와 함께 맨스필드의 요트에서 그를 만났다. 이 거장과의 담판이 실패로 끝난다면 샘의 사업도 파산할 상황에 있었다. 맨스필드는 누가 슈버트씨냐고 물었고, 샘이 저라고 대답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20대의 왜소한 젊은이가 슈버트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샘이 헤럴드 스퀘어 극장출연을 제안하자 맨스필드는 극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샘은 ‘그러나 선생님이 출연하면 이 극장은 중요해질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우쭐해진 맨스필드는 조건을 물어보았고 샘은 신디케이트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나중에 맨스필드의 매니저는 어떻게 샘이 이 대배우를 설득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 해답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샘의 직설적이고 설득력있는 화법, 상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어투 덕분이었을 것이다. 임프레사리오로서의 경력이 일천한 20대의 새파란 젊은이가 당대 최고 배우의 한 사람인 맨스필드를 영입한 것이다. 1901년 12월 헤럴드 극장에 맨스필드가 나타났다. 이어서 1902년에도 율리우스 시저의 부루투스역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1903년 10월에는 샘의 끈질긴 설득으로 새롭게 오픈한 리릭 극장에서 <옛 하이델베르그>라는 작품에 출연, 두 시즌을 공연했다.


- 릴리안 러셀

릴리안 러셀(출처 : britannica.com)
릴리안 러셀(출처 : britannica.com)

맨스필드와의 경험은 스타의 중요성을 절감케 하였다. 1903년 4월에는 정극과 보드빌의 스타이자, 샘과 친구였던 페이 템플턴(Fay Templeton)을 섭외하여 공연하였고, 1904년 12월에는 리릭극장에서 릴리안 러셀을 섭외하여 공연하였다. 그녀는 19세기 후반, 코믹 오페라의 주인공이었고 빼어난 미모와 가창력으로 큰 인기를 모았지만 약간 전성기가 지난 가수였다. 그러나 샘은 100여명의 배우와 60여명의 코러스 걸을 동원하는 스펙터클로 대중의 기호에 맞도록 연출하여 히트했다. 릴리안에게는 화려한 의상을 제공하여 대중들의 시각적 욕망을 자극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이 공연을 ‘ 릴리안이 오랫동안 해 온 어떤 공연보다 훌륭한 공연’이었다고 썼다


 

- 데이비드 벨라스코
신디케이트와 반목하고 있던 연출가 데이비드 벨라스코도 영입하였다. 클로와 에어랑거사는 1901년 벨라스코와 <옥셔니어Auctioneer>라는 작품을 순회공연하기로 약정하였고, 아직 무명이던 벨라스코는 많은 양보를 했다. 이익금의 50%를 주기로 했고 게다가 자신이 계약자가 아니고 조셉 브룩스(Joseph Brooks)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계약하는 걸 양해해 주었다. 그런데 1903년 부룩스는 벨라스코가 공동저작자로서 몰래 이익금을 공유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반면 벨라스코는 K&E가 다른 신디케이트 파트너를 속이고자 브룩스를 가짜 파트너로 참여시킨 것을 알고 <옥셔니어>에서 얻은 이익에 대한 정산을 요구하는 반소를 제기했다. 벨라스코는 신디케이트의 사술, 이중성을 폭로한 첫 프로듀서였다. 그의 경건한 태도와 언론의 지원에 힘입어 신디케이트의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법원은 계약은 유효한 것이라고 판시하였다. 벨라스코는 신디케이트의 이중성에 분노했고, 이 틈을 이용하여 슈버트사는 벨라스코를 영입했다. 신디케이트는 벨라스코가 신디케이트에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슈버트사에게 벨라스코와의 계약 파기를 요청했지만 거절하였다 .

전쟁은 이미 1903년부터 격화되고 있었다. 만약 신디케이트가 더 관용적이고 약자에 대해 동정적이었다면 신디케이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디케이트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였지만 멤버들의 인간성이 문제였다. 슈버트사가 문제삼은 건 신디케이트 자체가 아니라 그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이런 횡포들은 반유대주의적 감정까지 낳았다. 평론가 윌리엄 윈터는 ‘6명의 유대인 투기꾼으로 구성된 신디케이트는 뱀같이 차갑고, 흡혈귀같은 촉수를 가진 악마’와 같다고 비판하였다. 배우 매던 피스크는 신디케이트는 예술을 죽이고 도전정신을 꺾으며 예의를 말살한다고 하였다. 그녀의 남편 해리슨 그레이 피스크는 신디케이트와 언론전쟁을 벌였다. 그러자 신디케이트는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1897년 피스크는 65명의 극장 경영자들에게 신디케이트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을 발송했으나 6명만이 답변했다. 피스크가 신디케이트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1897년 헤이만이 피스크의 사무실에 난입하여 더 이상 신디케이트를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였다. 헤이만은 만약 더 이상 나쁜 기사가 나간다면 신문사와 피스크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고 부인 매던 피스크가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뉴욕 월드라는 신문도 신디케이트 비판에 가세하였다.
 
1차 전쟁

샘이 사망한 뒤 리와 제이제이가 이어받은 슈버트사의 앞날은 불투명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슈버트사가 곧 K&E와의 전쟁을 중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샘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갔다. 1905년 6월 리와 제이제이는 에어랑거를 만났다. 여기서 벨라스코와 샘이 생전에 맺은 계약을 에어랑거가 존중할 것인지 물었지만 에어랑거는 거절하였고, 리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신디케이트와 사생결단의 전쟁을 계속하기로 다짐한다. 1차 공연전쟁이 시작되었다. 에어랑거는 키가 작은 땅딸보같은 인상에 불독의 머리를 가진 냉혈한으로 소문나 있었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은 조금도 없었고 돈이 그의 신이었다. 리는 에어랑거를 만나 싸움을 계속하지 않고, 더 이상 극장제국 건설을 추진하지 않겠다. 일부 극장은 에어랑거에게 팔겠다고 제안했다. 다만 샘이 생전에 벨라스코의 작품은 슈버트 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계약을 체결하였으니 이를 존중해 달라고 했지만, 에어랑거는 죽은 사람이 체결한 계약은 존중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것이다. 에어랑거는 슈버트사가 벨라스코와의 계약을 파기해주면 형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제안하였지만 형제는 이를 거절했다.

리는 분노에 차서 반드시 K&E를 파멸시키겠다고 맹세한다. 그는 유일한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더 많은 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의 54번가와 55번가 사이의 땅을 사서 부스(Booth) 극장과 샘 슈버트 기념극장(나중에 기념은 삭제, 묘지를 연상케 하기 때문)을 지었다. 리는 공격적인 극장신축을 계속했다. 첫 해에 18개의 극장을 확보했다. 곧 뉴욕의 투자자도 참여했다.

벨라스코와의 계약은 샘이 형제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를 통해 슈버트사는 다른 중요한 인물들과도 계약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큰 선물은 4월에 맺은 사라 베르나르와의 계약이었다.

- 사라 베르나르

샘은 신디케이트의 횡포에 분노하고 있던 사라 베르나르에게 접근했다. 샘은 사라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베르나르는 일일 개런티 1,800달러와 75,000프랑의 사전지급을 요구했고 샘은 동의했다. 계약은 1905년 4월 18일 체결되었다. 그러나 마땅한 극장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스케이트장, 서커스 텐트, 야외극장, 타운 홀 등을 생각했고 오히려 이런 공간이 더 화제가 되었고, 엄청난 홍보효과와 거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탄압받는 이미지가 대중의 동정심을 자극하였고 텐트라는 이색적 공간이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만들었다. 바넘의 제니 린드 공연이후 이와 같은 흥행은 없었다. 관객과 수입은 거대했고 공연장 크기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규모였다. 1906년 4월 7일까지 62살의 스타는 14,441(23,000킬로미터)마일을 순회하면서 공연하였고, 때로는 하루에 두 번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루 수입은 평균 4,400달러(오늘날의 9만달러 정도)였고, 캔사스에서는 9,984달러를 벌었다. 신문과 잡지는 온통 사라의 기사로 가득했다. 기록적인 수입이었고 최종공연은 슈버트의 본거지인 리릭극장에서 있었다. 투어중 가장 중요한 일은 그녀의 애완견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그녀는 일생동안 12개의 보험에 가입하였는데, 이는 다른 어떤 배우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많은 사람들은 사라가 텍사스에서 텐트에서만 공연을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러나 한 번이면 족했다. 홍보책임자는 달라스에서 텐트바깥에 서 있는 사라를 촬영하여 이를 전파했다. 신디케이트가 극장을 대관해 주지 않아서 부득이 여기서 공연할 수밖에 없음을 알리는 가장 믿음직한 이미지였다.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었다.

그들은 홍보에서 이겼다. 스스로를 ‘전제와 압박에 저항하는 자유의 챔피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약자를 위해 강자와 싸우고 예술을 위해 상업주의와 싸우는 사람으로 각인시켰다. 전쟁의 무기는 공연이나 작품이나 아니라 프로파간다였다.

벨라스코와 사라 베르나르를 필두로 1905-6년 시즌에도 많은 세익스피어 전문배우를 확보했다. 시즌초에는 30개 정도의 극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종료 즈음에는 50개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신디케이트에서 넘어오는 배우들과 극장도 있었다. 1905년 뉴욕에 확보한 체인 이외에 보스턴, 필라델피아, 시카고, 클리블랜드 등 주요도시에 좋은 극장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신디케이트는 이를 방해했다. 슈버트사와 공연하면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고 협박했고, 샘은 소송으로 맞섰다.

슈버트사는 소송의 왕이었다. 다른 사람이 슈버트를 고소한 것보다 슈버트가 다른 사람을 고소한 일이 더 많았다. 소송은 슈버트사의 큰 무기이자 성공공식이었다. 만약 타인이 슈버트를 고소하면 슈버트는 10명, 20명의 변호사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이들은 공연전쟁에서 익힌 실전경험이 많아서 대부분의 소송에서 승리하였다.

큰 소송은 18개월에 한 번씩 있었고, 많은 비용이 들었다. 주로 음악출판사를 상대로 슈버트 쇼의 노래도용, 작가길드에 대한 표절소송, 배우들의 계약만료 전 헐리우드로의 이적등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신디케이트와 배우 등과의 소송도 많았다.  


- 개방정책과 전국 극장주연합회

슈버트사는 신디케이트와 달리 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표방하였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작품을 극장의 제한없이 공연해야 한다는 것이 개방정책의 요체였다.  ‘독점이여 사라져라’가 그들의 슬로건이었다. 독점의 피해자는 대중들이며 이를 혁파하기 위해 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1905년에 <스노우>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여기에 자신들의 독립운동 섹션을 만들었다. 스노우의 도움으로 독립극장을 위한 싸움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마치 악마로부터 탄압을 받는 천사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실제로 초반에는 그런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일차적 목적이 타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독립극장을 위한 싸움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스노우의 구독자수는 75,000부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1906년에 스노우를 매각했다. 그러나 1년간 스노우를 이용한 홍보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슈버트사는 약자를 위하여 강자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사로 ,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예술을 숭상하는 예술애호가로 자처하였다. 그들이 벌인 전쟁은 극장, 작품, 돈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운 것이 아니라 프로파간다를 사용한 싸움이었다.

슈버트사는 소도시의 극장들을 신디케이트로부터 빼앗아오려는 시도를 계속해 왔지만, 신디케이트만큼 지속적으로 공연작품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나 신디케이트와의 보드빌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 1907년부터 슈버트는 신디케이트보다 더 좋은 조건을 내걸고 이번에는 스타와 프로듀서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신디케이트는 점점 콘텐츠와 스타의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지역 극장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개방 네트워크로 이탈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체가 1910년에 결성된 <전국극장주 연합회>다. 그러자 신디케이트에서 이탈하는 프로듀서들이 생긴다.

예를 들면 그 동안 신디케이트에 소속되어 있던 유명 프로듀서 H.W.새비지는 앞으로는 연합회의 독립극장도 사용할 것임을 언론에 발표하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연작품에 맞는 선택을 할 권리가 있고, 이는 또한 대중의 권리임을 천명하였다. 신디케이트 산하에 있으면서 텐트나 헛간, 대학 등 예외적인 공연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극장은 자신이 선택할 것이다. 그동안 신디케이트가 예약해준 개별극장들과 접촉하여 계약을 맺으려면 매우 어려웠고 그렇다고 신디케이트가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새비지는 슈버트사의 개방정책에 호응한 것이었다. 
      
- 언론과의 전쟁

신문홍보와 비평은 당시로서는 흥행성공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슈버트사는 초기에 신디케이트와 싸울 때 신문의 지원을 많이 받았지만 스스로가 또 다른 신디케이트가 되기 시작하면서 언론의 비판을 받는다. 슈버트는 1915년 3월  외국작품인 <기회잡기>라는 코미디극을 공연하였는데 유일하게 슈버트 사가 운영하던 뉴욕 리뷰만 칭찬기사를 썼을 뿐 나머지 신문들은 비판기사를 쏟아냈다. 특히 뉴욕 타임즈의 신출내기 기자가 비판적으로 기사를 썼다. 격분한 리는 해당기자의 극장출입을 금지하고 광고도 중단했다. 이는 슈버트와 NYT간의 소송전으로 비화하였고, 전국적 이슈로 발전했다. 그러자 시카고 보드빌 브리즈라는 신문에서 왜 슈버트는 신출내기 코러스 걸을 쓰느냐고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리는 결국 휴전을 선언하고  광고와 기자출입을 다시 허용했다. 

- 보드빌 진출

1907년 신디케이트는 작품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드빌을 생각하고 에어랑거는 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같이 보드빌 시장에 진입하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보드빌 서킷은 신디케이트 못지 않게 강력한 힘을 가진 독점적 체인이었고, 에어랑거는 혼자의 힘으로는 이를 돌파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둘은 아메리칸 어뮤즈컨트 캄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예약은 에어랑거가 담당하고 수익의 51%는 에어랑거가 가져가는 내용에 합의했다. 전쟁은 일단 보류되고 적과의 동침이 시작된 것이다.

아베 에어랑거(출처 : en.wikipedia.org)
아베 에어랑거(출처 : en.wikipedia.org)

그러나 보드빌 사업은 매우 어려웠다. 오랫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 이루어낸 사업에 신참자들이 참여하여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보드빌 서킷을 주도한 키스는 일하기가 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알비는 강도남작으로 매우 거친 성격을 가진 관리자로, 미국공연계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서킷은 1894년 보스턴에서 시작된다. 화려한 극장을 건설하고 좋은 작품들을 확보하면서 보드빌 서킷은 보드빌 시장을 장악해 나간다. 이들은 신디케이트와 유사한 조직인 통합예약사무소(UBO)를 운영하고 있었고, 신디케이트처럼 보드빌의 극장과 콘텐츠를 장악하고 있었다. 

UBO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돈과 권력이 결합한 가장 강력한 조직으로 통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여기에 슈버트와 에어랑거가 도전한 것이다. 알비는 이 새로운 경쟁자를 ‘벼룩이 무는’ 대수롭지 않은 싸움으로 여겼다. 에어랑거는 ‘7백만 달러를 받아내고 보드빌을 떠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키스와 알비는 ‘에어랑거는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잘 모른다. 내가 한 수 가르쳐주겠다 ’고 하였다. 아메리칸 어뮤즈먼트 캄퍼니는 7백만 달러가 아니라 25만 달러에 키스- 알비에게 팔렸고 모든 계약은 UBO가 승계했으며 앞으로 15년간 에어랑거는 보드빌계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약정했다. 슈버트사는 1921년에 <슈버트 고급보드빌Shubert Advanced Vaudeville>사를 설립하여 다시 도전했지만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민스트럴 쇼(출처:today.com)
민스트럴 쇼(출처:today.com)

2차 전쟁

아메리칸 어뮤즈먼트 캄퍼니가 해산하면서 신디케이트와 슈버트의 화해무드는 다시 전쟁상태로 바뀌었다. 이 2차 전쟁은 1909년 시작되어 1913년까지 계속되는데, 과거와는 달리 대등한 싸움이 되었다. 1910년 경에는 슈버트사도 이미 제2의 신디케이트로 인식되고 있었다. 2차 전쟁이 달아오르면서 공연지형도 바뀌었다. 벨라스코와 해리슨 그레이 피스크는 신디케이트로 돌아갔다. 절대로 신디케이트로 회귀하지 않겠다고 했던 벨라스코는 에어랑거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미련없이 신디케이트로 돌아갔다. 그는 배신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피스크의 경우는 , 이미 신디케이트처럼 비대해지고 비도덕적인 슈버트사와 기존의 신디케이트 사이에서의 선택이었다. 이미 슈버트사도 두 개의 큰 악의 축중 하나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냉혹한 기획자로 평판을 받고 있었다. 슈버트사는 신디케이트보다 더 잔인한 정복자였다.

슈버트가 벨라스코와 피스크를 잃고 나서 가장 큰 제작사 리블러사와 윌리엄 브래디(Brady)를 확보했다. 그리고 신디케이트에서 탈퇴한 중서부의 200여 극장도 확보했다. 이는 태평양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이를 통해 LA, 시애틀에 이르는 서부벨트를 구성할 수 있었고 이는 공연전쟁에서 확실한 교두보가 되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지역의 150여개 극장도 추가로 확보하였다

슈버트는 비로소 일회공연의 루트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요도시의 네트워크가 없이는 공연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건너뛰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소도시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했었는데, 이는 신디케이트는 지속적인 예약을 요구했지만 슈버트는 이를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슈버트가 신디케이트로부터 프로듀서와 스타들을 더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자 이번에는 신디케이트가 일회공연의 루트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점점 지역의 극장들은 스스로 공연경로를 확보하거나 슈버트로 갔다. 1909년 봄에는 슈버트사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었다. 
 
- 휴전

제이제이가 운영하던 윈터가든이 안정되자 리는 에어랑거와 다시 휴전에 들어갔다. 뉴욕 미러는 이 두 라이벌 사이의 화해는 공연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휴전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1913년경에 순회공연은 크게 감소하는데 경쟁으로 인해 두 회사가 모두 손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라이벌은 시카고, 필라델리파, 보스턴, 세인트 루이스에서의 예약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 동안의 비윤리적인 사업방식을 지양하고 각자의 정체성을 지키기로 하였다. 에어랑거와 리는 가장 인기있는 극장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보드빌과 영화에 양보하였다. 합의는 간헐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유지되었다.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1915년에 양측은 모두 최고의 극장을 선택할 수 있었다.
 
3차 전쟁

1917년, 3차 전쟁이 벌어진다. K&E에 따르면 슈버트사는 1913년에 체결한 계약을 위반하였다. 필라델피아의 체스넛 오페라 하우스에 일급 작품을 예약했는데, 이는 일급 극장을 포레스트, 개릭, 아델피, 리릭으로 한정한 계약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슈버트사는 필라델피아에 슈버트 극장 신축계획을 발표했고, 보스턴에서는 윌버극장과 플리머스 극장을, 시카고에서는 스튜드베이커(Studebaker)극장을 인수했다는 이유였다. 두 트러스트간의 협약은 파기되고 세인트루이스와 볼티모어에서도 파기되었다. 리가 이런 도발을 감행한 것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마지막 전쟁은 1921년말 슈버트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두 트러스트는 1920-22년 사이에 불어닥친 불황으로 슬럼프를 겪는다. 영화와 보드빌만이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1921년말에 에어랑거는 마지막으로 슈버트와 평화교섭을 시도한다. 오리지널 신디케이트는 <아브라함 에어랑거 오락 주식회사>로 바뀐다. 프로만은 1915년 루지타니아 호 침몰 사건으로 사망했고 닉슨과 짐머만은 1913년 결별하고 은퇴했으며 마크 클로는 1919년에 에어랑거와 결별하였다. 그들은 예약 사무소를 해산하였고 에어랑거는 서서히 클로의 몫을 인수해 나갔다. 1920-22년 둘은 소송전에 돌입한다.

에어랑거는 1930년에 사망했는데, 그에게는 310만 달러의 부채가 있었지만  7천5백만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이 남겨져 있었다. 1932년에 슈버트사는 우정의 표시로 브로드웨이에 있던 에어랑거 극장을 인수하고 세인트 제임스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 사이에는 존경과 증오가 늘 교차하였다. 정글에서의 싸움과 같은 살벌한 전쟁을 20여년간 계속하면서도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동지로 공연계에 군림하면서 20세기 초반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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