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켜켜이 배어든 몸짓의 역사 – 국립무용단 신작 ‘산조‘
[공연리뷰] 켜켜이 배어든 몸짓의 역사 – 국립무용단 신작 ‘산조‘
  • 정옥희 무용평론가
  • 승인 2021.06.29 2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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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 '산조' 1막 중에서

[더프리뷰=서울] 정옥희 무용평론가 = 한국 무용계에서 정구호는 하나의 장르이다. ‘전통의 현대화’라는 거대담론을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실현했다. 안무가가 아니면서 이처럼 강력하게 춤의 트렌드를 바꾼 이는 드물 것이다. 안성수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국립무용단과 인연을 맺게 된 그는 <단>(2013) <묵향>(2013) <향연>(2015)을 연이어 올리며 힙스터 관객들을 전통무용 공연장으로 불러 모은 바 있다. 새롭게 재정비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오랜만에 선보인 신작 <산조>(6월 24-26일)는 그의 두 글자 제목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예상한 바대로 강렬한 원색 의상과 압도적인 무대장치를 통해 세련된 미장센을 구축했다. 그 틀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발생했을까.

<산조>는 전통 기악 독주양식인 산조(散調)를 지칭한다. 전통이라 하면 왠지 깐깐한 규칙과 견고한 체계를 떠올리게 되지만, 산조는 다양한 장단을 모았다가 흩트리는 게 핵심이다. 오랜 수련을 통해 경지에 이른 연주자들이 구현하는 즉흥성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것이 아닌가, 라는 게 작품의 출발점이다.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이어지는 산조 형식은 전통춤에서 지극히 기본적인 토대이다. 하여 산조를 내세운 작품 <산조>는 전통춤의 미학을 되묻는다.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출신 최진욱이 안무를 맡고 컨템포러리 무용단인 고블린파티의 임진호가 협력안무가로 참여한 점에서 성찰적인 거리두기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국립무용단 '산조' 1막 중에서

막이 열리면 고수의 북 장단과 추임새가 정적으로 흐르고 한 여성 무용수가 고요히 앉아 있다. 음악도, 무대도, 춤도 여백에 압도된다. 1막 ‘중용’이다. 겨드랑이 아래로 극단적으로 부풀린 치마가 하체를 가둔 탓에 날렵한 팔사위와 표정이 두드러진다. 인위적이고 복잡한 규범을 내재화하여 더없이 자연스러운 듯 행동하는 서양 귀족처럼, 그녀 역시 몸에 밴 고고함을 무심히 드러낸다. 거대한 가채에 꽂은 긴 비녀를 빼어들어 연주하듯 휘두른다. 자신만만하고 노련하며 자기도취적인 움직임과 더없이 화려한 외양으로 인해 일개 무용수가 아닌 어느 지배층 여성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른 무용수들이 다소곳한 자세에 잔걸음으로 다가오니 계층적 대조는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녀 옆엔 지름 6M의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대자연의 거친 에너지와 우주의 섭리, 나아가 덧없음(vanitas)을 강조한다. 거대한 바위 곁에서 인간은 작고 초라하며, 영원한 바위를 남기고 인간은 스러진다. 공중에 떠서 빙글빙글 도는 바위의 초현실성은 이를 멋진 풍경으로 소비하지 않도록 자꾸 일깨운다.

이어지는 여성 군무와 남성 군무는 각각 여성성과 남성성을 드러낸다. 여성은 다소곳하고 나긋나긋하며, 남성은 당차고 과감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그저 무대 위 무용수가 아니라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축적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의 춤사위에선 과거의 여성들이 일상에서 수없이 반복했을 삶의 몸짓이 언뜻언뜻 나왔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절하고 물러난다. 치맛자락을 다리고 접고 펼치는 모습이 무대의상이 아니라 일거리 같다. 이처럼 지극히 양식화된 춤사위와 일상의 몸짓, 그리고 컨템포러리 댄스의 역동적인 동작이 결합되니 전통을 생경하게 바라보게 된다.

상반된 에너지를 보여주는 2막 ‘극단’은 평면성을 강조한다. 공중에 삼각형이 오르내리고 빙글빙글 돌면서 불안정성을 강조한다. 미니멀한 리듬이 반복되고 서양 현악기와 전자음악이 섞이는 와중에 무용수들은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총총거리며 납작하게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막대기로 연결된 인간 띠는 컴퓨터 커서가 되고, 장애물이 되고, 캐릭터를 등퇴장시키며, 헤쳐 모인다. 한 명과 다수가, 검정과 초록이, 그리고 서로서로가 대립한다. 의상, 무대, 조명은 검정과 흰색에서 초록색과 자주색, 그리고 다시 검정과 흰색으로 전환되었으며, 슬리브리스의 치렁치렁한 의상이 한복의 양감을 살리면서도 날렵한 팔사위를 강조해주었다.

국립무용단 '산조' 2막 중에서
국립무용단 '산조' 2막 중에서

3부 ‘중도’는 정과 동이 어우러지며 새로운 균형을 보여준다. 무대엔 검은 테두리를 두른 LED 스크린이 내려와 물결무늬나 수묵화를 보여준다. 자연 그 자체(1막)와 기하학적인 개념(2막)이 절충된 모습이다. 그런데 그저 먹의 농담으로 세상을 담는 수묵화처럼, <산조>의 무용수들은 지극히 추상적인 움직임으로 구체적인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를 효과적으로 구현한 장치가 막대이다.

막대는 <산조>를 관통하는 소품이다. 1막에선 화려하고 과시적인 비녀로, 2막에선 공격과 방어의 도구로, 그리고 3막에선 일상용품이자 무구(舞具)로 등장한다. 남녀 무용수들이 막대를 하나씩 들고 나와 구음을 주고받으며 몰려다니고 산만하게 흩어지길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에 켜켜이 배어든 몸짓의 역사가 드러난다. 그들은 땅을 두드리고, 노를 젓고, 망원경처럼 들여다보고, 피리를 불고, 가야금을 연주한다. 또한 장구를 치고, 북을 치고, 소고를 치며 춤춘다. 남자 무용수들이 일렬로 늘어서면 여성 무용수들이 그 사이에 들어가 5고무를 추기도 하고, 세 겹의 원을 겹친 부채춤 대형을 만들어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런데 신나게 노는 와중에 언뜻언뜻 보여주는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모두 무용수들 몸에 깊이 밴 테크닉이요 풍부한 레퍼런스들이다. 오랜 수련을 쌓은 무용수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중에 드러나는 노련한 북놀림과 매서운 발걸음이야말로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이요 미학이다.

국립무용단 '산조' 3막 중에서
국립무용단 '산조' 3막 중에서

마지막 장면에선 스무 명의 무용수들이 대열로 늘어서서 두 팔을 양옆으로 펼치고 제자리에서 돈다. 질서정연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작곡을 담당한 안무가 김재덕과 연주자들이 즉흥으로 완성한 불규칙한 리듬 위에서 무용수들은 물결치듯 아주 미세하게 엇갈리며 조화를 이룬다. 이것이 <산조>가 그려낸 세계이다.

정옥희는 무용연구가 겸 평론가로, 춤과 춤이 아닌 것, 무용수와 무용수가 아닌 이 사이의 경계에 관심이 많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엘도라도, 2021),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열화당, 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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