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9 뮤직홀(5)
[더프리뷰 칼럼] 재미있는 공연이야기 49 뮤직홀(5)
  • 조복행 공연칼럼니스트
  • 승인 2021.09.09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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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출처=vogue.fr)

라이온 코미크

뮤직 홀을 지배한 건 코메디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서 코메디란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그램이나 코메디 토크쇼와 같은 코믹한 이야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고 웃음을 자아내는 프로그램 즉 코믹한 노래, 춤, 이야기, 세리오 코믹(감성적 코메디), 민스트럴 쇼의 웃기는 장면들, 코메디 듀오, 코메디 트리오, 판토마임, 아일랜드 코믹, 기형쇼, 남장여배우, 여장남자배우 등을 총칭한다. 따라서 코믹 프로그램은 하나의 장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정극 극장에서도 코메디와 멜로드라마는 매우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누구나가 코메디 프로그램을 좋아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노동자들이나 하류층들이 더 코메디를 선호한다는 통계가 있다. 뮤직 홀에서 코메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던 건 당시 뮤직 홀의 주고객이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843년의 공연법 때문에 드라마를 마음대로 공연할 수 없었고, 이러한 제도적인 규제는 자연스럽게 코메디의 강세로 이어졌다. 그리고 뮤직 홀의 버라이어티한 성격 때문에 다양한 성격의 코메디 프로그램들이 프로그램 구성에 유리했을 것이다.

1899년에 발간된 <이어러 Era> 지의 통계를 보면 코믹 프로그램의 비중은 1868년에 전체 프로그램의 59%를 차지하고 있다가 1878년에는 64%까지 상승했다. 경영자들은 코메디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보다 다양한 레파토리로 바꾸고자 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1899년에는 54%까지 떨어졌지만 여전히 코메디는 뮤직 홀의 지배적 장르였고, 코메디 배우의 비중은 전체의 20%를 넘었다. 코메디언은 출연료도 많고 인기가 있었다. (『The Music Hall, Business of Pleasure』, p116).

뮤직 홀 코메디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1860년대 후반에 등장한 라이온 코미크로, 1880년대 중반까지 뮤직 홀의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라이온 코미크
라이온 코미크(Lion Comique)는 코믹한 노래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1860~80년대의 코메디 프로그램이다. 조지 레이본(George Leybourne)이라는 코메디언을 코믹의 사자(Lion of Comic)라고 부른 데에서 시작된 말로 코미크라는 불어가 사용된 것은 불어표기를 선호한 당시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사자는 우두머리나 최고라는 뜻을 지닌 것이었지만 곧 런던의 돈많은 젊은 한량들, 곧 게으르고 으스대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일은 안하면서 술을 좋아하고 여자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젊은이들을 마셔(masher)라고 했는데 라이온은 바로 그런 마셔나 댄디를 뜻하는 말이었다. 라이온 코미크는 젊은 댄디들을 풍자하는 코메디였던 것이다.

조지 레이본(출처 : en.wikipedia.org)

라이온 코미크의 원조는 조지 레이본이었다. 그는 폭이 좁은 바지, 모피코트, 장갑, 큰 손수건, 지팡이, 시거, 사자수염, 큰 다이어 반지와 같은 빛나는 악세서리를 달고 등장하여 코믹한 노래를 불렀다. 레이본은 원래 글래스고우의 엔지니어였는데 아서 로이드라는 스타의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되려는 꿈을 갖게 되고, 조우 샌더스라는 예명으로 1860년 뮤직 홀에 데뷔한다. 스타로 발돋움한 것은 1865년에 < 샴페인 찰리>라는 곡을 작곡한 알프레드 리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큰 키와 준수한 용모를 가졌고, 특별한 음악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사를 썼다. 1867년에는 <날으는 공중그네>라는 곡을 썼고 이 역시 히트한다. 이 노래는 1861년에 알함브라 뮤직 홀에서 네트도 없이 공중그네를 타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프랑스의 레오타르의 이야기를 곡으로 만든 것이었다.

레이본은 1868년에 윌리엄 홀란드를 만났고, 그는 레이본의 도약에 큰 기여를 한다. 홀란드는 찰스 모튼에 이어 캔터버리 홀의 경영을 맡았는데, 어떻게 하면 홀을 잘 운영할 수 있을지 고심하던 터였다. 그는 스타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찰스 모튼이 샘 코웰을 스타로 키워서 성공한 것처럼 그도 스타를 키워보고 싶었는데, 그 때 눈에 띤 배우가 조지 레이본이었다. 그는 레이본과 1년간 전속계약을 맺고 레이본을 스타로 만들어 나간다. 사륜마차를 보내서 매일 출연토록 하였고, 무대에서는 특수한 의상과 분장을 권유했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도 무대에서와 같은 삶을 살도록 요구하였다. 사륜마차를 타고 라이온 코미크의 복장을 하고 늘 샴페인만 마시라고 하였다. <샴페인 찰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조지 레이본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개런티도 1년만에 주당 25파운드에서 120파운드로 뛰었다.

샴페인 찰리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떠들썩한 삶속의 즐거운 나날들
큰 성공에도 난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샴페인 마시기
밤낮으로 샴페인 속에 빠져 사네

(코러스)

샴페인 찰리. 이것이 내 이름
샴페인 찰리. 이것이 내 이름
...............................

그런데 가사가 좀 이상하다. 술을 오히려 권장하는 노래다. 여기에는 연유가 있었다. 나중에 수상이 되는 글래드스톤은 매일 점심 때 와인을 마셨다. 그는 노동자들의 폭음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양보다 질을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와인이나 샴페인을 권장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의 주류를 수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는 샴페인 소비의 급증으로 이어진다. <샴페인 찰리>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노래였다. 이 노래가 인기를 얻자 <모에와 샹동, Moët & Chandon>이라는 와인회사가 그를 후원하였다. 샴페인을 보내 대중앞에서 마시도록 하였다. 뮤직 홀이 주류광고의 미디어로 기능했던 것이다.

레이본의 라이벌은 ‘ 위대한 반스 Great Vance’로 불린 알프레드 반스였다. 그는 조지 레이본보다 먼저 1864년에 런던에 데뷔했다. 런던 데뷔 이전에는 뉴캐슬 등지에서 민스트럴 쇼의 흑인분장을 하고 무대에 섰는데, 런던에서는 코믹한 노래로 전향한다. 그는 곧 큰 인기를 얻는다. 인기가 오르자 그의 노래가사가 담벼락에 낙서처럼 쓰이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조지 레이본이 <샴페인 찰리>로 성공하자 라이벌 와인업체들이 위대한 반스에게 와인 홍보노래를 부탁한다. 그의 노래 제목은 < 클리코 ! 클리코!, Cliquot! Cliquot!>였다. 이 와인은 뵈브 클리코라는 프랑스 와인회사의 브랜드였다. 와인 홍보는 가수 혼자서 하는 게 아니었다. 관객이 홍보를 도와주었다. 관객들이 앙코르를 외치면 출연자는 ‘건배’라는 우렁찬 함성을 지른다. 이 때 주류판매는 늘어난다. 뮤직 홀은 훌륭한 미디어이자 광고매체였다.

음주를 권하는 노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코스터 송 가수로 유명했던 거스 엘렌(Gus Ellen)이 부른 ‘ 영광스러운 맥주’(Glorious Beer)는 1900년대 초반에 뮤직 홀에서 많이 불린 노래였다. 한 쪽에서는 금주운동을 하고 한 쪽에서는 술을 권하는 노래들이 유행하는 아이러니였다.

라이온 코미크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1873년부터 불어닥친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레이본과 위대한 반스의 라이벌 대결과 라이온 코미크의 인기, 그리고 전쟁노래를 히트시킨 G.H 맥더모트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펍의 촌스런 배우들과 달리 모두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와 흰색 넥타이 등으로 치장하고 도시적 세련미를 갖춘 연기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라이온 코미크가 일탈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건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자신이 마치 마셔나 댄디라도 된 것처럼 판타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마셔의 행동에 분개하면서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보이거나 같이 코러스를 하면서 퍼포머가 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었다. 라이온 코미크는 그 때까지 없던 새로운 무대 캐릭터였다. 자체의 인기만이 아니라 뮤직 홀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린 새로운 장르였다.

19세기의 댄디는 반드시 부유층이나 중류층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었다. 1830년경부터 하층의 중류계급에서 새로운 하위문화가 발생하고 있었고 라이온 코미크를 많은 곳에서 모방하기 시작했다. 여성 라이온 코미크 스타도 등장했는데, 그 주인공은 넬리 파워(Nelly Power)였다. 그녀는 조지 레이본을 모델로 삼아 가수가 되고 싶어했고 실제로 코믹한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노래보다 연기에 소질이 많은 걸 알게 되면서 판토마임이나 연극에 더 힘을 쏟는다. 당시 판토마임에서는 남자주인공을 여배우가 담당했는데, 넬리 파워는 주로 이 남장여배우로 활약했다. 생전에 마리 로이드의 그늘에 가려 2인자에 머물러 있었지만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은 라이온 코미크 가수였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망했고 두 명의 언니도 어릴 때 죽었고 본인도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뒤늦게 2017년 영미뮤직홀 길드에서는 그녀가 태어난 집에 푸른 명판을 달아주었다.

라이온 코미크는 불건전하고 조잡한 코메디, 외설스럽고 저속한 코메디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조지 레이본은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노랫말이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곤 하였다. 그가 쓴 <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이라는 곡에는 매춘부가 유혹한다는 의미의 ‘꼬리를 친다’는 가사가 나오는가 하면 <그들은 모두 사랑을 한다, They all do it>라는 곡에는 "연인들은 서너 시간동안 문에서 사랑을 한다. 훤한 달빛 아래서, For hours three or four, lovers spooning at the door. On any moonlight may be seen" 라는 노골적인 내용의 가사도 있었다.

레이본은 실생활에서도 무대에서의 삶을 그대로 살았다. 커다란 잔으로 샴페인을 마셨고, 늘 홀란드가 제공한 마차를 타고 다녔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를 좋아했고, 친구들에게는 자주 돈을 빌려주곤 했지만 그 친구들은 레이본의 출연기회가 줄어들고 생활이 곤궁해지자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도운 건 나중에 유명한 뮤직 홀 경영자로 성장하는 오스왈드 스톨이었다. 스톨은 레이본에게 리버풀의 파르테논 극장 출연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레이본은 공연도중 무대에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지독한 애주가로 간경변을 앓고 있었다. 위대한 반스도 49세에 무대에서 쓰러져 죽었다. 당시의 배우들은 숙명적으로 술을 마셔야 했다. 뮤직 홀의 지하에는 술을 마실 수 있는 작은 술집들이 있었고, 배우들은 관객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많은 배우들이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은 술과 관계가 있었다. 채플린의 아버지도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는 어린 채플린을 고난에 빠뜨린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배우들의 음주를 조장한 건 뮤직 홀 경영자들이었다.

리틀 티치(출처 : en.wikipedia.org)

조지 레이본이 사망하고 레이본의 뒤를 이어 세 명의 코믹 스타가 등장한다. 그들은 단 레노, 리틀 티치, 마리 로이드였다. 이들은 한동안 뮤직 홀무대를 지배한 스타중의 스타였고, 뮤직 홀 전성시대의 주역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코믹 연기로 유명했던 건 리틀 티치였다.

리틀 티치 Little Tich(1867-1928)

본명은 해리 렐프(Harry Relph)로 신장 137cm(4피트 6인치)에서 성장이 중단되었지만 이런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다. 뮤직 홀 배우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우중 하나였고 특히 파리에서의 인기는 절대적이었으며 미국에서도 매우 인기가 높았다.

리틀 티치의 장기는 자기 키의 절반이 넘는 71cm의 큰 부츠를 신고 춤을 추는 ‘큰 부츠 춤’(Big Boot Dance)이었다. 잘 손질한 상아색 머리, 어린이 복장과 독특한 웃음을 가진 리틀 티치는 가장 명랑한 배우였다. 티치가 등장하면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연기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등장만으로 분위기는 고조되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극장을 가득 채웠다.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분출하였다. 큰 부츠를 신고 춤을 주고 노래를 하면서 지팡이도 사용했다. 모자를 발로 차서 쓴다든가 몸을 반쯤 기울였다가 오뚜기처럼 일어선다든가 무릎을 꿇지 않고 몸을 45도 정도 기울여 모자를 집어드는 등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묘기들도 선보였다. 관객에게 인사할 때는 역시 몸을 기울여 마치 오케스트라 피트에 떨어질 것같은 긴장감을 주었다.

스커트 댄스(출처= en.wikipedia.org)

미국 보드빌의 아버지 토니 패스터는 1886년 런던을 방문하여 리틀 티치와 계약한다. 미국 데뷔는 1887년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큰 성공을 거두고 패스터에게 커다란 부를 안겨준다. 패스터는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하고 그와 다음 시즌을 계약한다. 시카고에서도 출연요청이 왔고, 이 역시 성공했다. 1893년에는 스스로 안무한 <미스 터펀타인 Miss Turpentine>이라는 춤으로 헝가리,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스페인 등에서 공연한다. 이 춤은 당시 유행하던 서펀타인 댄스(Serpentine Dance)를 모방한 스커트 댄스의 일종이었다.

그가 파리에 데뷔한 것은 1897년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그의 등장에 열광했다. 이 때는 드루리 레인극장과의 계약기간이 끝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던 시기여서,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배우생활이 시작된다. 그의 파리 데뷔는 1897년 폴리 베르제르(Folies Bergères)에서 이루어진다. 폴리 베르제르는 1869년에 처음으로 프랑스에 등장한 영국식 뮤직 홀로 화려한 장식과 특히 판토마임- 발레로 유명했다. 폴리 베르제르의 인기로 인해 파리에는 몇 개의 뮤직 홀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도 폴리 베르제르는 1890년대까지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뮤직 홀이었다. 리틀 티치는 큰 부츠춤으로 파리 관객을 사로잡는다. 파리의 유명한 배우 루시엥 길트리와 아들 사차는 그의 공연을 극찬한다. 1920년 리틀 티치의 파리 공연시에 아들 사차는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리틀 티치이다. 그는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고 하였고 아버지 루시엥은 티치가 등장하자 뛰어나가 관객들에게 모자를 흔들면서, “ 모두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세요” 라고 말했다. 공연이 끝나자 기트리는 티치의 양볼에 키스하였는데, 이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했다. 리틀 티치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렉과 교유했다. 거의 같은 키의 유사한 신체적 조건을 가졌던 두 사람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로트렉은 리틀 티치를 자신의 그림에 담기도 했다. 리틀 티치는 그림과 사진에 취미가 있었고 종교. 철학. 문학 서적을 탐독하였으며 첼로를 연주한 팔방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세 번의 결혼에서 두 아이를 가졌지만 끝까지 그와 해로한 부인은 없었다. 그는 늘 신체적 약점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늘 정상적인 신체를 갈망하고 있었다.

툴루즈 로트렉, '무랑 루즈의 무도회'(출처 : en.wikipedia.org)

찰리 채플린과 뮤직 홀

찰리 채플린이 헐리우드를 지배했던 건 뮤직 홀의 전통과 코메디 연기, 그리고 판토마임 연기 덕분이었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그가 어떻게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할 수 있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와 형과 함께 간신히 목숨만 부지할 정도의 극단적인 가난속에서 헐리우드를 주름잡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코믹 연기였다. 채플린은 <축구시합>이라는 연극에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자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살려 즉흥적인 코믹연기를 하였다. ‘ 나는 관객을 등지고 무대에 올랐다.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다. 뒤에서 보면 프록코트를 입고 실크해트를 쓰고, 지팡이에 각반을 한 모습이 전형적인 에드워드 시대의 순진한 시골뜨기같았다. 이렇게 뒤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붉은 코를 보여주었다. 웃음이 일었다. 일단 관객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나는 멜로물에 나올법한 자태로 어깨를 으쓱이다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면서 무대를 돌다 아령에 걸려 넘어졌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지팡이가 공중에 매달려 있던 권투연습용 샌드백과 얽혔다가 튕겨 나오면서 내 얼굴을 철썩 때렸다. 나는 해롱거리면서 왔다갔다 하다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내 지팡이로 머리를 때렸다. 관객들이 와 하고 웃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5분동안 무대를 종횡무진하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관객들을 웃길 수 있었다.’ (찰리 채플린, 『자서전』)

찰리 채플린의 성공에는 뮤직 홀의 전통이 있었다. 그는 1899년부터 1914년까지 15년 동안 뮤직 홀 배우로 활약했고 여기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헐리우드로 이어진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뮤직 홀의 스타와 전통을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 그의 영화에는 뮤직 홀의 노래, 춤, 아크로바틱, 의상과 분장, 세트, 연기기술 등이 차용되었다. 뮤직 홀을 무대로 한 <라임라이트>에는 뮤직 홀의 발레, 스펙터클, 세트와 분장 등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라임라이트>는 채플린의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담은 뮤직 홀 헌정 영화였다. 1914년 그가 영국을 떠나던 해의 런던을 배경으로 뮤직 홀에서의 좌절과 성공을 그리고 있다.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로 뮤직 홀의 황금시대가 저물고 소위 유럽의 번영을 의미하는 ‘벨 에포크’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해였다. 이 영화에는 채플린의 경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자신을 키워준 뮤직 홀과 고국에 대한 향수가 담겨져 있다. 칼베로가 사망하는 장면은 자신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술로 죽은 사실을 무대에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는 작은 방랑자(Little Tramp)라고 불렸는데, 이는 리틀 티치(Little Tich)를 연상케 한다. 채플린에게 리틀 티치의 연기와 분장은 그를 스타로 만든 큰 힘이었다. 그의 저작권을 위반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리틀 티치의 콧수염, 지팡이, 중산모, 헐렁한 옷, 뒤뚱뒤뚱한 걸음걸이 등 하나하나가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채플린은 1909년 폴리 베르제르에서 파리에 데뷔하였다. 자신의 몸보다 큰 헐렁한 옷을 입고 비틀거리면서 연기를 하자 파리시민들은 열광했다. 채플린이 이 때 파리에서 만난 두 사람이 막스 린더와 리틀 티치였다. 막스 린더는 당시 가장 인기있던 프랑스 코메디언이었고 채플린은 그의 개그, 유머, 감성을 배웠다. 2년 후 헐리우드에 진출할 때 그는 막스 린더를 닮고 싶다고 하였다. 채플린이 큰 영감을 얻은 것은 리틀 티치에게서였다. 리틀 티치는 그의 연기의 원형이 되었다. 만약 채플린이 파리 폴리 베르제르에서 데뷔하지 못했다면 세계적 스타 채플린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채플린은 리틀 티치만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짙은 눈썹분장은 리틀 티치만이 아니라 단 레노의 전매특허였다. 영국 뮤직 홀의 희극이 헐리우드로 옮겨간 것이다. 물론 세부적인 묘사나 표현은 채플린의 독창적 아이디어에 의해 구체화된 것이긴 하지만 뮤직 홀의 많은 형식적 특성들, 분장술, 코믹한 연기 등은 채플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채플린은 매우 창의적인 예술가였다.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샘물처럼 샘솟았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연기력이 있었다. 이런 배우로서의 능력은 영국의 연극과 판토마임 등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찰리 채플린이 10대에 입단한 카노 극단의 극단주 프레드 카노는 당대 최고의 뮤직 홀 임프레사리오였다. 그리고 카노 극단의 주레파토리는 짧은 판토마임 형태의 코메디였다. 채플린은 여기서 코믹 연기를 익혔고, 이미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1913년 카노극단의 미국순회공연에서 술주정뱅이 역할을 하였는데, 이 연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마크 세네트라는 영화제작자가 그의 연기를 보고 카노극단의 매니저에게 채핀(Chaffin)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우가 있는지 물었다. 채플린의 이름을 잘못 안 것이다. 채플린은 미국영화에 스카우트되고 나중에는 스스로 영화제작자가 되어 헐리우드를 지배하게 된다. 채플린은 영화만이 아니라 브로드웨이에도 영향을 준다. 1900년대 초반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레뷔였던 지그펠드 폴리스의 여배우들도 채플린을 본떠 콧수염을 붙이고 중절모를 쓰고 커다란 구두를 신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채 무대에 올라 <찰리 채플린의 다리>라는 노래를 불렀다. 1960년대 비틀즈가 미국에 일으킨 선풍적인 인기를 ‘영국침공’이라고 불렀는데, 사실 영국침공은 찰리 채플린이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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