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7) - 영화 ‘신의 손’을 보며 느껴지는 노스탈직에 관하여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17) - 영화 ‘신의 손’을 보며 느껴지는 노스탈직에 관하여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2.02.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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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
'더 그레이트 뷰티' 영화속 한 장 (c)구글 이미지
'더 그레이트 뷰티' 한 장면 (c)구글 이미지

[더프리뷰=뒤셀도르프] 나는 2013년 파올로 소렌티노(Paolo Sorrentino, 1970-) 감독의 <더 그레이트 뷰티>라는 영화를 보고 그 황홀한 영상미에 매료된 이후 그의 영화를 빼지 않고 보고 있다. <더 그레이트 뷰티>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상류사회 사람들, 종교 지도자들, 예술가들의 위선과 가식을 다소 과장되지만 영화로서는 드물게 현학적이고 철학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화려한 삶 뒤의 공허함들이 처연하고 아름답게 표현된다. 그리고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감들로 스타일리쉬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본 후로 나는 소렌티노 감독의 팬이 되었지만 어떤 영화들은 너무 다른 문화적 차이로 공감하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신의 손(The Hand of God)'  한 장면 (c)구글 이미지

그럼에도 최근에 나온 그의 신작 <신의 손>은 나에게 특별했다. 이 영화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성장영화이면서 또 소렌티노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다. 그의 소년 시절의 고향, 뜨거운 여름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폴리를 배경으로 감독의 기억 속 가족들의 이야기가 서정적으로 그려진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 사회상도 그려지는데, 가난하고 범죄가 난무하던 나폴리에 당시 신적인 존재였던 축구선수 마라도나가 이적해 오고 이태리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1993) 감독의 영화 오디션도 열린다. 목가적인 풍경 속에 유머가 넘치는 엄마,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 강렬한 캐릭터의 육감적인 이모, 펠리니 감독의 영화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 지망생 형, 치매 걸린 할머니, 그리고 그다지 큰 극적인 사건이나 갈등 없이 가족들과 친척들,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러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고아가 된 주인공이 상실감을 안은 채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고향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주인공 소년은 고향을 떠난 후 더 이상 영화 속에 나오지는 않지만 지금은 이태리 영화계의 거장이 된 것이다.

그 시절 이태리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광적인 팬이었을 마라도나의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느라 부모님과의 여행을 따라가지 않아 목숨을 건지게 되는 주인공, 부모님은 여행지에서 벽난로를 피우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소렌티노 감독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마라도나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기도 했었다. 실제 역사적인 인물이 그 시절 평범한 소년의 개인사와 연결되는 이야기와 거장 펠리니 감독의 오디션에 참가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삽화처럼 그려진다.

나폴리 여행 중 필자 (사진제공=)
나폴리 여행 중 필자 (사진제공=김윤정)

나는 몇 년 전 그저 피자와 마피아로 유명하다는 정도로 알고 나폴리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여전히 가난해 보이지만 아름다웠던 풍광들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니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 고향의 개성 강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소렌티노 감독의 영화 속에 나오는 강렬하고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신기한 건 우리나라 정서와는 분명히 다른데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나의 어린 시절 내 고향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감독의 나이가 나하고 비슷하므로 우리는 지구 먼 곳에서 자랐지만 어떤 공통적인 동시대를 살았고 청소년기를 보냈으므로 분명히 다른 문화권이지만 같은 시대에 처해진 동시대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있는 듯했다.

나폴리 풍경 (사진제공=김윤정)

나의 고향 사람들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고향 사람들의 기억은 그러니까 소렌티노 영화 속에서는 그가 열 여섯 살이 되어가는 십대 소년시절이므로 80년대 배경이라면 나에게는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까지 다녔던 그냥 평범한 작은 마을, 작은 세계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니까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70년대 배경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군부대가 바로 우리가 뛰어놀던 마당 코앞에 있었으므로 아마도 한국 안에서도 좀더 특이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말투, 옷차림, 다양한 군상들이 어린 나의 눈에도 각인되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시절은 가난한 사람들은 진짜 가난했고 그럼에도 어찌어찌 서로 어울려 살았던 시절이었다.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집세를 밀리다가 야반도주하는 일도 있었다.

그 시절 달마시안 개를 열 마리 이상 키우며 살던 루시라고 불리던 아줌마, 집이 없어 마을 꼭대기 천막에서 살던 가족, 세탁소를 하던 총각은 늘 특유의 여성스런 제스처와 걸음걸이, 말투를 가졌는데 어린 나는 왜 저 사람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던 기억도 난다. 어린 나의 눈에는 그냥 신기했었다. 그리고 당시 나보다 더 어린 두 딸을 키우던 아줌마가 있었는데 밤이면 진하게 화장을 하고 나가서 집을 비우면 나는 그 아이들하고 놀아 주기도 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들이 사라지고 들리는 말이 그 자매를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이 수근대는 소리를 들으니 그렇게 가기 싫다고 울면서 보채는 아이들을 겨우 보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도 어린데 나보다 더 어린 그 아이들 생각에 가슴 한켠이 아릿해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매가 기왕이면 같은 집에 입양이 되었기를 바라본다.

마을 어귀에서 담배 가게를 하시던 할머니는 꽤나 키가 크고 걸걸한 중성적 저음의 목소리를 갖고 계셨는데 어찌나 보는 것만으로도 무섭던지 멀리서 그 할머니만 보이면 최대한 빨리 뛰어서 집으로 오거나 엄마 치마폭으로 숨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함께 인형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금발의 혼혈 친구도 생각이 난다. 주말이면 이웃 마을에서 아빠의 친구 분들이 나름 옷을 갖춰 입으시고는 모여서 마작을 두시는 날은 엄마는 술상을 옆에 차리곤 하셨다. 그리고 마작이 끝나면 방안 가득한 담배 연기와 오후 햇살이 뒤 섞인 방안에서 느껴지던 몽롱한 냄새와 빛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겨울마다 어느 가족은 연탄가스로 온 가족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그냥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여름날 미니스커트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굽 높은 구두를 신은 화려한 모습의 양공주라 불리던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수자라 불리던 언니는 가끔 어린 나를 군부대 파티나 클럽에 데려가기도 했었다. 또 어떤 집에서는 미군부대 피엑스(PX)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쌓아 놓고 팔기도 했었다. 아무튼 우리 집에도 늘 미제 커피, 초콜릿 ,아이스크림, 우유, 치즈, 소시지들이 넘쳐났었다. 그리고 분명히 나이도 꽤나 들었지만 학교도 못갈 정도로 미숙해서 바보라 불리던 순자, 누런 코를 달고 다니던 덩치만 무지 컸던 땡수도 있었다. 어른인 것 같은데 아이 같은 그들은 늘 우리가 노는 언저리에서 끼고 싶어 얼쩡거리곤 했다. 우리는 모자라는 그들 이름을 누구나 마치 동갑내기 부르듯이 부르면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빨랫감들을 몰아다 빨래를 하시며 돈을 벌던 소식통, 옆집 아주머니는 신기하게도 누구네 집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늘 소상히 떠들고 다니셨다.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동네 인터넷 뉴스였던 것이다. 심지어 누가 부부싸움을 하면서 어떻게 말하는지 그 톤까지 달라지면서 이야기를 하시던 그 아주머니는 늘 웃음과 슬픔을 전달하는 메신저이기도 했다.

뒷동산에 올라가면 늘 같은 자리에서 서성거리던 정신이 이상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우연히 볼 때마다 정신이 이상하다는 건 무엇이고 대체 저렇게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곤 했었다. 인형놀이, 공기놀이, 고무줄 놀이, 그리고 마당에 그려놓고 노는 오징어 게임, 사방치기 같은 놀이로 한창 즐겁게 놀고 있을 때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는 하루의 종말처럼 들리곤 했었다. 우리 집은 유난히 독재자(?) 같으시던 아버지가 세운 규칙을 따라야 했었는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했었다.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불만이었지만 그냥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절 밥을 얻으러 가끔 집안을 기웃거리며 들르던 거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장을 보고 돌아오신 엄마가 집안에 쌀독이 텅 비었다고 놀라시는데 동생이 김 거지가 와서 쌀을 다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김 거지가 누구야? 하고 물으니 우리가 김 씨이고 늘 우리 집에 오는 거지니까 김 거지라는 것이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늘 인정 많고 착했던 동생은 만화 영화를 보다가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소리로 목 놓아 울었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내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하필이면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착했던 동생이 지금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필자와 동생 (사진제공=김윤정)

손튼 와일더(Thornton Wilder, 1897-1975)의 <우리 읍내>에서처럼 인생에서 과거로 하루 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 마을의 어느 여름날 동생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는 그렇게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았다. 크고 작은 이야깃거리들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매일매일 그냥 마을 사람들은 네 집 내 집 없이 지나다 들러 떠들고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서로 도와가면서 살았다. 또 모이면 누군가의 흉을 보면서 큰 소리로 웃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마을 아저씨들은 가끔 술에 취해 시비도 붙고는 했는데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또 만나서 술판을 벌이기도 했다. 어딘가 법도 질서도 없는 듯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사람들은 잘나면 잘난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조금 살면 사는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서로 어울리며 나누며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다. 서로에게 경계나 담이 없었던 듯하다. 때로는 사람들이 정말 문제에 부딪히면 나름 마을에 리더 역할을 하던 아버지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고, 집안에서는 엄하고 또 성질 급하신 다혈질 아버지조차 성격과는 다르게 늘 어려운 사람들의 문제를 들어주시고 해결사가 되시기도 했었다.

만화책, 어린이 명작, 그리고 문학을 만나다

어느 겨울날 옆집으로 이사를 온 기독교인 가족은 집 한쪽에 만화방을 했었는데 형제가 일곱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다. 그 시절 그 집에서 빌려다 보거나 놀러 갔다가 한쪽 구석에서 읽던 만화책 <캔디캔디>와 <베르사이유의 장미> 그리고 <유리가면>은 얼마나 어린 가슴을 파고들었던가? 만화책 뿐 아니라 늘 집안에 명작 시리즈를 문고판으로 사주시던 어머니 덕분에 수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그 후로 중학교에서 만난 짝궁의 독서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 조금 더 눈을 뜨기 시작 했었다. 그 친구가 읽던 헤르만 헤세와 앙드레 지드, 톨스토이, 제인 오스틴까지 내 수준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책들을 읽는 그 친구가 너무나 신기했었다. 종이와 활자 안에 그렇게 무궁무진한 세상이 펼쳐진다는 게 너무나 경이로웠었다. 그리고 나도 따라 읽기 시작한 <데미안>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던 강렬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부조리라는 단어를 알기 전에 느꼈던 인생의 부조리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기억이 다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자상함과는 거리가 먼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언제나 단란하고 즐거워 보이는 한 가족을 부럽게 바라보곤 했었다. 미군부대를 다니시는 그 아버지는 늘 퇴근 후 막내아들을 목마를 태우고 다니셨다. 내 눈에는 적어도 그 마을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던 가족이었다. 어느 날 그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어머니는 아이들 네 명을 버리고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갔다고 어른들이 혀를 차며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들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고 그렇게 귀염 받던 아이들은 과일을 들고 다니며 팔았고 맏아들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가 동생들을 위해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그 공장에 불이 나서 그 형도 죽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먼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그 후로 그들은 보이질 않았다. 사실 아무에게도 나의 분노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슬픔과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내가 아련하게 느끼던 세상의 따뜻함과 안전함과 아름다움은 점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부조리라는 개념 또는 단어를 인지하기 이전에 나는 이미 부조리한 세상의 단면을 보게 되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그렇게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당해 보였다. 사실 나는 아무리 관찰자 입장이었다 해도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슬픈 실화였던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

어느 날 우리는 그 시절 ‘양옥집’이라 불리던 형태의 이층짜리 붉은 벽돌집을 지어 그 동네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이사를 가게 되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뉴스가 나오던 때에 우리는 그 마을을 떠나면서 더 이상 그런 캐릭터의 이웃들과 오가며 지내는 삶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자전거를 타고 가끔 그 마을을 들렀지만 나도 점점 커가고 내 세계도 조금씩 달라지면서 그 시끌벅적하던 마을은 점점 추억으로 사라지고,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는 더욱 멀어져갔다. 이제는 재개발 아파트촌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그 마을은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들은 ‘다른 곳’을 의미한다.

나폴리 풍경 (사진제공=김윤정)

지금은 사라졌지만 어딘가에서 삶을 이어나갈 그 모든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야말로 다양한 인간군상이 섞여서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우연치 않게 소렌티노의 영화를 보면서 새록새록 살아났다. 아마도 요즘은 아이들이 이렇게 다양한 계층,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아 언제고 떠올리게 되는 따뜻한 힘이었다. 그래서인지 흰 눈이 펑펑 내리거나 노을이 지는 저녁, 노스탈직한 감상에 젖어들 때면 시시껄렁할 수도 있는 그 마을이 더욱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리워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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