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숭고한 자기단련에서 품어나오는 기품 있는 춤
[공연리뷰] 숭고한 자기단련에서 품어나오는 기품 있는 춤
  • 김혜라 공연평론가
  • 승인 2022.08.04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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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오페라 발레 2022 에투알 갈라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파드되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파드되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더프리뷰=서울] 김혜라 춤비평가 = 박세은이 파리오페라 발레단에 동양인 최초 에투알(Étoile, 수석무용수)로 임명된 낭보 이후 마련된 <파리오페라 발레 2022 에투알 갈라>(7월 28-29일, 롯데콘서트홀)는 팬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했다. 파리오페라 발레학교 출신도 아닌 먼 나라에서 온 박세은이 유서 깊은 전통의 이 발레단에서 최고 무용수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단체의 내한 공연(1977년 세종문화회관 <현대발레 갈라>, 1993년 세종문화회관 <지젤>)도 드물었기에 프랑스풍의 스타일과 박세은의 유려한 춤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운 박세은의 성취와 352년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유수의 레퍼토리를 관람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료될 만한 일이었다. 빈 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롯데 콘서트홀에 모인 발레 팬들의 열성도 뜨거웠다.

인 더 나이트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인 더 나이트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에투알 갈라 공연은 고전에서부터 컨템퍼러리를 아우르는 10개의 작품으로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과 작곡자(멘델스존, 파르트, 쇼팽, 차이코프스키, 생상스, 코스마, 드뷔시, 오베르, 글라스, 프로코피예프)와 안무가들(조지 발란신, 크리스토퍼 윌든, 제롬 로빈스,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포킨, 롤랑 쁘띠, 알라스테어 매리어트, 빅토르 그소프스키, 뱅자맹 밀피에)의 성향과 의도까지 경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갈라를 이끈 발레 마스터 리오넬 들라노에(Lionel Delanoé)는 파리 가르니에 극장과 바스티유 극장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는 시즌 레퍼토리 중에서 주요 작품을 선정했다고 한다. 1부에서는 <한여름 밤의 꿈> 중 디베르티스망 파드되, <애프터 더 레인> <인 더 나이트>가, 2부에서는 <달빛> <빈사의 백조>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3막 파드되, <랑데부> <그랑 파 클라시크> <아모베오> 파드되, 그리고 박세은이 에투알로 승급했던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 중 발코니 파드되로 구성되었다. 음악공연을 주로 하는 롯데 콘서트홀에 거의 무대장치도 없이 MR로 실연되는 작품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무용수들의 열연으로 이내 집중할 수 있었다.

애프터 더 레인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애프터 더 레인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1부에서는 신고전주의 발레를 완성한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한여름 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 중 디베르티스망 파드되가 포문을 열었고, 2005년 크리스토퍼 윌든(Christopher Wheeldon)이 안무한 <애프터 더 레인After the rain>과 제롬 로빈스(Jerome Robbins) 안무의 <인 더 나이트 In the Night>는 무용수의 역량에만 집중할 수 있어 갈라에 적합하였다. 록산 스토야노프(Roxane Stojanov)와 플로랑 멜락(Florent Melac)이 춘 <애프터 더 레인>은 아르보 파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이란 정적인 곡의 행간을 무용수들이 춤으로 파고들어 채운다는 인상이었다.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곡에 맞춰 서로의 감정을 지지하며 마침내 비상하듯 절제된 내적 환희가 느껴지는 시적인 춤이었다.

최근 국립발레단에서 제롬 로빈스의 <주얼스 Jewels>가 소개되었으나 뉴욕시티발레단의 상주 안무가였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비롯한 미국 뮤지컬계에서 대활약을 했던 로빈스의 1970년대 안무작인 모던한 성격의 <애프터 더 레인>으로 그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 쌍마다 확연하게 다른 내면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작품은 쇼팽의 ‘녹턴’ 곡을 엘레나 보네이(Elena Bonnay)의 무대 연주로 남녀의 관계와 사랑이 펼쳐졌다. 콘서트홀 합창석 뒤 배경에 희미하게 별빛 조명이 들어오고 작품의 의도대로 파티장에서 급하게 빠져나온 커플들의 관계가 직설적으로 조명되었다.

인 더 나이트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인 더 나이트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첫 번째 커플인 박세은과 폴 마르크(Paul Marque)는 마주르카 리듬의 왈츠에 사랑을 막 시작한 커플의 설렘을 표현하였다. 반가운 박세은의 등장만으로도 무대는 활기찼고 여러 작품에서 파트너를 한 폴 마르크와 듀엣도 유연한 호흡으로 빈틈이 없었다. 두 번째 커플 발랑틴 콜라장트(Valentine Colasante)와 제르맹 루베(Germain Louvet)는 <녹턴 15번 f단조>에서 풍기는 감상적인 분위기에서 적정한 거리를 둔 관계 속 신뢰와 격조가 느껴지는 춤이었다. 마지막 커플 도로테 질 베르(Dorothée Gilbert)와 제레미-루 케르(Jérémy-Loup Quer)의 춤은 무대의 등퇴장 입구를 가로지르며 가장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었다.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며 남녀관계의 미묘한 감정이 특히 애원하는 여자의 심정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냈다. 쇼팽이 ‘녹턴(야상곡)은 피아노로 부르는 노래’라 했듯, 녹턴을 발레로 해석해낸 <인 더 나이트 In the Night>는 한밤중에 서로 다른 사랑의 감성을 몸으로 노래하였고 듀엣의 상황마다 감정이 이입되는 흡입력 있는 춤이었다.

달빛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달빛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2부에서는 알라스테어 매리어트(Alastair Marriott)가 안무한 <달빛 Clair de Lune>으로 드뷔시의 동명의 곡이 인상주의 프랑스풍의 그림으로 살아난 것 같은 제르맹 루베의 그윽한 정취에 빠져들었다. <빈사의 백조> 남성 버전으로 발레리노가 죽음에 맞서는 태도를 표현하고자 했던 안무가의 의도보다는 루베의 절제되고 의연하게 호흡이 소진되어 가는 과정이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루베의 수려한 외모와 신화적인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빈사의 백조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빈사의 백조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만든 미하일 포킨(Michel Fokine)의 <빈사의 백조 La mort du cygne>는 문태국의 온화한 첼로 곡조에 도로테 질베르의 우아하지만 처연한 백조의 형상으로 표현했다. 순전한 백색의 튀튀를 입고 죽어가는 질베르의 마지막 포즈만으로도 영화 <안나 파블로바>에서 포킨이 1905년 안무 당시 러시아 황제 군대에 저항했던 민중들의 현실적 고통을 투영시킨 장면과 오버랩되었다. 발레의 테크닉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표현의 수단임을 피력한 러시아의 개혁적인 안무가 포킨의 철학이 담긴 작품세계를 생각하며 여느 호숫가에서 유유자적 노는 생상스의 <백조> 곡을 넘어선 캐릭터를 보여준 파블로바 춤과는 다른 결로 질베르의 <빈사의 백조>는 정제된 떨림의 미학에 가까운 춤이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파리오페라 발레단의 안무가이자 감독(1983-89)이었던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The Sleeping Beauty> 중 파드되는 엘로이즈 부르동과 제레미-루 케르의 말끔한 기교로, 2년간 예술감독(2014-16)을 역임한 뱅자맹 밀피에의 <아모베오> 파드되는 도로테 질베르와 플로랑 멜락이 현대무용이라 봐도 무방할 공간사용과 표현적인 춤으로 선보였다. 공연은 역대 감독들의 고전과 컨템퍼러리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보는 즐거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세 작품에 출현한 질베르는 토슈즈를 벗고 정통 발레의 기법과는 다른 과단성 있는 표현 능력으로 <아모베오>를 추었고, <빈사의 백조> 같은 클래식이나 <인 더 나이트>에서 심오한 내면 연기까지 완성도 있게 소화해 내며 ‘에투알다움’을 증명해 내었다.

그랑 파 클라시크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그랑 파 클라시크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연극성이 뛰어난 롤랑 쁘띠(Roland Petit)의 <랑데부 Rendez-vous>는 파리의 음침한 거리가 연상되는 배경에서 검정 단발머리를 한 록산 스토야노프의 관능적이고 애증에 찬 욕망의 춤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빅토르 그소프스키(Victor Gsovsky)의 <그랑 파 클라시크 Grand Pas Classique>는 발랑틴 콜라장트와 토마 도 키르(Thomas Docquir)의 가벼운 도약부터 밸런스의 강약 조절로 정점을 과시한 테크닉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로미오와 줄리엣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마지막을 장식한 박세은과 폴 마르크는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 중 발코니 파드되에서 섬세한 포르 드 브라(port de bras)의 여유를 보이는 박세은의 연기와 함께 시원한 주떼(jeté)와 솜털 같은 리프트를 비롯하여 쉴 새 없이 진행되는 테크닉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안무가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 <로미오와 줄리엣> 버전은 각기 다른 묘미가 있는데 이 작품은 발코니 파드되가 가장 사랑을 확인하는 하이라이트 중 한 장면이다. 파트너 폴 마르크와 호흡도 완벽에 가까워 이들이 구사하는 누레예프 전막의 화려한 버전이 보고 싶을 만큼 기대감을 주는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전체 커튼콜 (사진제공=파리오페라 갈라)
전체 커튼콜 (사진제공=롯데문화재단)

전막 공연과 달리 주요 작품에서 핵심적인 부분만을 발췌해 보이는 갈라는 오롯이 무용수들의 기량과 연기의 집중력에 따라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 하여 배경과 해석이 다른 에투알들이 추는 춤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레퍼토리 재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파리오페라 발레단의 실제 일상을 들여다본 영화 <라 당스 La Danse>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자리에 서기까지 보이지 않는 장벽과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낸 별(Étoile)들의 춤은 지난하지만 아름다운 노동을 자처하며 흘린 땀방울이 서린 선과 근육이 품어내는 숭고한 자기단련의 결과물인 것이다. 기품 있는 공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콘서트홀을 나오며 스타일이 다른 역사적인 레퍼토리를 보유한 발레단이 부러웠고 한 세기도 안 된 현재 한국발레의 놀라운 성장을 돌아보며 352년(파리오페라 발레단의 역사) 후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계기가 된 갈라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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