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2022 CPH STAGE, 그 네 번째 날
[축제리뷰] 2022 CPH STAGE, 그 네 번째 날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8.1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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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삶, 그 지속가능성에 관한 다양한 장면들 혹은 입장들
CPH STAGE banner © Danish performing arts
CPH STAGE banner © Danish performing arts

[더프리뷰=코펜하겐] 하영신 무용평론가 = <CPH STAGE>는 수도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덴마크의 공연예술축제다. 2013년에 개시, 9회에 당도한 올 해의 행사는 6월 2일부터 11일까지 열렸고 필자는 8일부터 10일까지의 국제 방문자 프로그램(International Days)을 참관했다. 모든 현장은 저마다의 현장, 세계 공연예술의 판도가 ‘contemporary’라는 슬로건 아래 통합되는 듯해도 그래도 현장들은 각자가 걸어온 역사의 끄트머리, 결코 나란하지 않다. 다른 현장에는 다른 감도의 장면들이 있다. 이를 소개한다.

 

CANADA © Søren Meisner
CANADA © Søren Meisner

CANADA

company: Livingstones Kabinet

<At the Intersection, They Get a New Sofa>에 이어 덴마크적 서사와 예술의 속도와 강도, 그리고 ‘동시대성’을 기획하는 몇몇 키워드에 내재된 약간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

‘융복합’과 ‘학제간’에 이어 공연예술계의 최신 경향어로 등장한 ‘이머시브(immersive)’. 창작의 향방을 강제하는 것은 아닌가, 지배적인 경향을 선도하는 키워드들이 언제나 불편했지만 이 단어엔 더욱이 어깃장이 난다. ‘몰입’은 공연예술의 전제조건이 아니었던가?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로 등장했던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낯설게하기’(Verfremdungseffekt, distancing effect: 이화효과(異化效果), 소외효과(疏外效果), 소격효과(疏隔效果), 생소화효과 등으로 번역)에의 추종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몰입은 공연예술에 있어서는 더욱이, 행위와 관람 양측 모두에 선제적 요소다.

그런데 ‘이머시브’란 특정어로 강조되는 이 최신 ‘몰입형’은 이제까지의 목격에 의하면 감각의 인플레이션이었다. 정작 몸들이 흐려지는, 일종의 형용모순. 연극이든 춤이든 몸을 지우고서는 그 존재론을 세울 수 있는가? ‘스펙터클’, 대상적 구경거리로는 전락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현란한 감각적 무장으로서의 이머시브가 못마땅했다. 그런들, ‘예술계’, 장(field)에는 집단의 지성과 그에 따른 운명적 흐름이 있기 마련이고 원류에 매몰되거나 지류의 물꼬를 틀게 되거나, 소신껏 의견을 첨부할 밖에.

 

CANADA © Søren Meisner
CANADA © HunchbackMedia

이 공연에 관한 사전정보는 컨템퍼러리형 어휘집과도 같았다. ‘국제 라이브 예술 앙상블’의 ‘몰입형 무대’. 비하면 평이한 제목이 수상쩍었지만 아무튼 과도한 미래지향적 스펙터클이거나 정교히 조합되어야 하는 어떤 유닛의 개념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허세거나 혹은 정말로 동시대적 미학이나 담론에 기입될만한 어떤 성취물일 수도. 그 모든 예측 밖에 <Canada>가 있었다.

우선 나는 극장을 찾는 일부터 헤맸다. <Canada>의 극장 Bådteatret의 주소지는 코펜하겐의 얼굴과도 같은 운하 뉘하운(Nyhavn). 수많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관광객을 맞이하는 그 블록에서 극장을 찾는 일이 어려울쏘냐 싶었건만, 그 번지수에 극장 건물은 흔적도 없었다. 그럴밖에, 극장은 부두에 정박한 선상극장이었으니(덴마크어를 알았다면 헤맬 일도 아니었다. 번역하면 문자 그대로 ‘보트극장’인 것을). 1898년에 건조된 바지선을 70여 석 규모의 극장으로 개조하여 개관한 것이 1973년의 일, 운치는 있을지 몰라도 사실 첨단적 환경은 못 된다. 그러니까 애시당초 첨단의 기술로 점철된 이머시브형 공연을 겨냥한 작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CANADA © Søren Meisner
CANADA © HunchbackMedia

리빙스톤스 캐비넷(Livingstones Kabinet)은 덴마크 출신의 예술감독 니나 카레이스(Nina Kareis)와 스코틀랜드의 작곡가 페트 리빙스톤(Pete Livingstone)이 설립한 단체로 라이브 연주를 동반하는 연극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소개 글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형식, 연주 스타일 및 무대구성 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명백하게 직선적이고 가식 없는 인간미(There is always a demonstrably straightforward and unpretentious humanity which clearly reveals itself in form, playing style and staging)”라는 문장은 정확히 이 작품의 인상과 일치하는 단체적 시그니처다.

‘캐나다’는 일종의 유토피아다. <Canada>는 1970년대 생으로 덴마크의 제2도시 오르후스(Aarhus)에서 자란 니나 카레이스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그녀의 유년시절 덴마크에는 반이민 정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유대계-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대전의 질곡을 지나 타국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신경증과 결합하여 그녀에게 유전적 트라우마를 기입한다. 그래서 그녀는 ‘여기 아닌 그곳’으로서의 캐나다를 동경하며 살아가게 된다.

 

CANADA © Søren Meisner
CANADA © HunchbackMedia

비극의 절대성, 불행한 자들은 불행할 따름이지 불행엔 대소강약(大小强弱)이 없다. 그런데 나는 이 덴마크적 비극으로의 몰입에 실패한다. 이 비극은 잠재적인데다가 스타일리쉬해서 정서적으로 완충적 공간이 확보된다. 일단 비극의 원천인 어머니의 경험들은 주인공에 의해 전언(傳言)된다. 비극의 당사자들, 어머니와 어머니를 둘러싼 사건의 인물들은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뒤집어쓴 형광빛 가발로 표식되는 어머니, 주인공이 조작하는 얼굴 그래픽 패널(자체 설명에 의하면 ‘개체-애니메이션(objet-animation)’)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국 ‘얼굴 없는 자’들일 뿐이다. 그리스 비극에서의 코러스처럼 무대 한켠에서 신디사이저 건반을 연주하며 비극의 정황을 노래하는 페트 리빙스톤이 방출하는 정조(情操)도 정색한 비극의 텍스처는 아니다.

 

CANADA © Søren Meisner
CANADA © Søren Meisner

정극(正劇)이 아니어서 뮤지컬도 아니어서 그 사이 어디쯤에서의 고유한 작품이어서 눈길은 사로잡지만 나의 정서를 단박에 지배하지는 못한다. 나는 작품의 세부사항들을 흥미롭게 관찰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내 <오징어게임> <지옥> 등 최근 전 세계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그린 그 지독한 비극의 강도와 속도를 환기한다. 그 작품들을 좋아하거나 그 작품들의 시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극의 재인(再認, recognition), 그 강화하는 역기능을 우려하는 바이지만 아무튼 감정이입은 그 편이 쉽다. 그 편이 더 쉽다니!

아직도 ‘캐나다 드림’을 꿈꿀 수 있는 덴마크의 삶은 확실히 우리나라나 혹은 과거 대한민국이 꿈꿔왔던 아메리카의 삶과는 나란한 판에 위치하지 않는 듯하다. 이질적인 것들은 단박에 간파되거나 첫눈에 매혹적이진 않다. 하지만 관람 당시엔 그저 장식적 감각물로 여겨졌던 요소들이나 다소 복고적으로 느껴졌던 가창이 회고를 거듭하며 ‘비극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식’을 선언하니 “명백하게 직선적이고 가식 없는 인간미”를 자부할 수 있는 그 삶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레트로(retro)’, 재현되는 이유를 가진 복고랄까.

 

BENCHED © Raphael Solholm
BENCHED © Raphael Solholm

BENCHED

company: Uppercut Danseteater

choreographer: Stephanie Thomasen

dancers: Adam Tocuyo, Alexander Skjold, Jens Schyth Brøndum, Kristián Mensa, Mark Philip

<Benched>는 <<Plejer Er Død>> 3부작의 안무가 스테파니 토마슨(Stephanie Thomasen)의 테스토스테론이 충천하는 45분간의 순전한 춤이다. 카포에이라(Capoeira, 아프리카계 브라질인들의 전통춤과 무술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브라질 전통 예술문화), 브레이크 댄스, 아크로바틱 등 다양한 이력이 기입된 다섯 남성 무용수의 신체와 의식을 쟁투와 화해와 유머 등 벤치 위로 흘러가는 삶의 모든 장면으로 추출해내는 스테파니 토마슨의 연출력도 탁월했지만 시종일관 항진된 에너지로 상황을 펼쳐내는 무용수들의 연행도 더할 나위 없이 충족적인 작품이었다.

 

BENCHED © Raphael Solholm
BENCHED © Raphael Solholm

예술성과 대중성의 양단 사이 컨템퍼러리댄스의 섬세한 주름을 펼치는 이 작품은 2001년 코펜하겐 여름무용축제(Copenhagen Summer Dance Festival)의 야외무대를 위해 안무되었고 평단과 관객 양측으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어 단체의 레퍼토리로 고정되었다. 올해 CPH STAGE에서는 Dansekapellet(2012년 오래된 교회를 개축하여 2개의 공연 홀과 5개의 스튜디오, 그리고 1개의 야외무대로 조성한 무용 전용극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워낙 작품이 지닌 에너지의 강도와 밀도가 짙고 높아 해변, 공원 등 벤치가 놓일 만한 야외 어느 장소에서도 작품의 순도(純度)를 유지해낼 듯, 장소특정형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으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해보였다.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M.I.S.ALL NIGHT LONG

concept: DON GNU

choreographer: Jannik Elkær, Kristoffer Louise Andrup Pedersen

<Stormen>에서의 사담에 이어, 그리고 <Canada>에 이어 발견하는 덴마크식 몰입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예상보다 훨씬 더 이방인이었다. ‘스칸디나비아’나 ‘노르딕’으로 눙쳐진 북유럽의 몇몇 이름들, 예를 들면 폰투스 리드베리(Pontus Lidberg)나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이나 마리 토프(Marie Topp) 등으로부터 타장르로의 전격적인 겸임과 학제간 작업과 학술적 태도 등 다방면으로의 개방성을 확인한 줄 알고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 역시 이미 메트로폴리스로의 진입이 가능했던 어떤 규격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CPH STAGE의 프로그램들이 왕립극장 등 유서를 지닌 극장에 등장하는 세계적으로 통용 가능한 양식 내 작품들보다는 확연히 로컬적이기 때문이겠지만, CPH STAGE 작품들에 담긴 이야기와 미감은 예상보다 한결 이질적이다.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훨씬 소박한 이야기들이 소위 세계 대도시들의 ‘세련됨’과는 다른 저마다의 울퉁불퉁한 꼴로 선을 보인다. 세계대전으로부터 기인하는 트라우마와 ‘아메리칸 드림’을 여직 이야기할 수 있는 나라. 차가운 익명성과 내재된 위험과 잠재된 폭력을 분절과 과속의 편집으로 옮겨 재인하고 강화하는 대도시 생태계의 예술문화 콘텐츠와는 확연히 다른 주제의식과 스타일. 그 고유한 그 지형 중에서도 <M.I.S.All Night Long>은 유난하다. 고백하자면, 줄무늬 모직양말에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신은 나체 마초들의 사진을 두고 꽤 망설였었다. 관람을 결정한 이유는 작품에의 관심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한 작품이라도 더 봐야 한다는 강박, ‘안무’라는 단어, 그리고 설마 진짜 ‘슬랩스틱’과 ‘라이브 클럽 뮤직’이겠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

<M.I.S.All Night Long>의 극장 Teater VI는 도시와 교외를 연결하는 철도(S-tog)를 타고 가야 하는 코펜하겐 외곽의 작은 동네 발뷔(Valby)에 위치한다. 3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지만 사뭇 다른 풍경이다. 담장도 울타리도 없는 주택가, 쇼핑몰 건물 안에 소재한 극장에는 중장년 커플들, 청소년 자녀를 동반한 가족 등 지역의 ‘진짜’ 관객들이 웅성대고 있다. 작품도 요새의 경향과는 사뭇 다르다. 정말로 라이브 클럽 뮤직에 맞춘 세 남자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춤.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과거의 남성상을 좋아하는 올드한 취향의 세 남자, 유쾌하고 엉성하고 약간의 허세가 있고 춤과 노래와 엉뚱한 게임을 즐기는 오래된 친구들의 시간이 작품의 내용이다. 뭐 미학적으로 간파해야 할 배면의 어떤 것들, 예를 들면 채플린식 페이소스 혹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의 고찰거리 등등등 그런 건 없다. 그냥 관객들과 신나게 놀고 싶은 세 남자가 ‘솔직하게’ ‘있다’. 어떤 왜상(歪像)을 우려할 필요도, 간파하고 채굴해야 할 저의를 놓칠까 긴장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청하는 대로 80분간 신나게 땀내며 같이 놀면 된다.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M.I.S.ALL NIGHT LONG © Christoffer Brekne

입장하는 관객과 스킨십하는 로비의 장면으로부터 흥을 돋우고 폭소를 터뜨리게 할 고안들은 정성스레 설계되어 있었고 오차 없이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관객과 퍼포머들은 서로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헤어질 수 있었다. 오전의 세션들과 막간의 미팅들과 이 극장 저 극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세 작품씩의 관람 스케줄, 적응되지 못한 시차와 백야,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가 날아갔다. 정말 오랜만에 관찰자의 입장을 덜고 잘 놀았다.

취향 밖에서의 최초의 경험이었다. 미학적으로 성취가 있는 작품, 낯선 감각을 벼려주는 작품, 사유의 계기로 작동하는 작품 혹은 그 모든 것으로 연동하는 작품. ‘좋은’ 작품들은 이러저런 수위에 도달하는 이렇게 저렇게 좋은 작품들이다. ‘의미화’의 범주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놀이’ ‘여흥’ ‘entertainment’ 참여형(participatory) 예술의 진짜 국면 혹은 단초는 이런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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