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윤리학: 춤을 통해 몸, 에로스, 타자를 회화적으로 형상화하기
사랑의 윤리학: 춤을 통해 몸, 에로스, 타자를 회화적으로 형상화하기
  • 박상윤 기자
  • 승인 2022.08.19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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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예술가 김상표 제10회 개인전
한벽원미술관 8월 22일(월) - 9월 1일(목)
김상표 작가 / 사진=더프리뷰 서봉섭 기자
김상표 작가 / 사진=더프리뷰 서봉섭 기자

[더프리뷰=서울] 박상윤 기자 = 이기적인 나르시시즘이 만연한 이 시대에 사랑에 바탕한 연인들의 공동체가 가능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차이 나는 둘의 관점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기에 새롭게 생겨난 사랑의 공간 만큼 자아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연인들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사회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해체하는 양 측면에서의 모험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사랑의 윤리적 주체들이 탄생하기란 불가능하다. 사랑은 위대하지만 힘겨운 모험이다. 랭보의 말처럼 사랑을 재발명하려면 바로 삶의 재발명을 끊임없이 재발명하려는 사랑의 주체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역량이 요구된다.

김상표_Eros-Two Dancers(1-1)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Eros-Two Dancers(1-1)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Eros-Two Dancers(1-4)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Eros-Two Dancers(1-4)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사랑의 재발명이 연인들 둘만의 무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세계로의 열림이 시작되는 지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랑의 주체가 연인에게서 느끼는 존재의 무한은 다수의 타자들, 즉 우리 밖의 무한한 세계로 그(그녀)를 열리게 한다. 그동안 감각되지 않았던 것들, 심지어는 생멸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악으로 규정하고 미웠던 것들 마저도 녹아내리며 사랑으로 뒤덮인다. 신비의 몸, 무한을 담은 사유체로서의 몸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환희 속에서 흐르는 눈물이 세계의 지속을 온전히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며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결정적 순간을 선물한다.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연인들의 공동체를 구성한 윤리적 주체들은 사랑이 동반하는 이러한 신비에 매혹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랑의 모험을 가능케 하는 에로티즘이 다수의 차이가 공존하는 공동체의 창출을 위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할 가능성이 이렇게 생겨난다. 21세기는 우리에게 공동체주의와 에로티즘, 이 둘을 함께 사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김상표_통일은 비즈니스다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0
김상표_통일은 비즈니스다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0

에로스적 사랑이 춤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번 10회 개인전에 대한 비평글을 쓴 김영진 교수가 이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고 있다. “김상표 작품 속의 몸은 신화나 종교의 위상학에서 구원을 찾지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세속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구멍을 여는 방식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춤을 통해서’ 다른 문을 여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봉인된 유토피아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춤추는 몸은 안과 밖이 뫼비우스 띠처럼 얽혀 있는 몸이다. 춤은 중력의 무게 속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현재의 방식이다. 춤은 혼자 추기도 하고 함께 추기도 한다. 함께 추는 행위는 곧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는 그 몸을 기쁨의 위상학으로 변주하는 것이다. 사랑의 위상학은 연결 방식이 바뀌면서, 그 온도를 높여서 전혀 다른 강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되기가 창조하기의 행위가 되는 이유이다. 김상표는 연인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 여러 작품을 통해 최고의 창조적 행위의 하나는 바로 사랑-되기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 김상표는 장애자의 고통의 춤의 위상학을 기쁨의 춤의 위상학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는 소수자인 장애인-되기를 통해 진정한 생명이 모두에게 있음을 표현한다.”

김상표_전쟁과사랑_캔버스에 유채_193.9×651.5cm_2022
김상표_전쟁과사랑_캔버스에 유채_193.9×651.5cm_2022

이번 출품작 40점 가운데 에로스적 사랑과 연인들의 공동체를 다룬 작품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먼저 사랑의 주체로서 나는 지금까지 사랑의 윤리를 붙잡고 어떠한 실존적 몸짓을 해왔는지를 물었다. 사랑예찬-나와 너, 사랑예찬-우리, Eros, Eros-Two dancers 등 100호 이상 20여 점의 작품에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나의 그동안의 경험과 실존적 고민들을 담아냈다. 충돌과 뒤섞임 속에서 환희와 고통를 번갈아 가며 (혹은 동시에) 체험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모순적 구조들, 함께 생명의 숨결을 나누면서 아토포스적 연인의 무한에 다가가고자 하는 안타까운 열망들, 고독하고 이기적인 자아를 벗어나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수많은 바람들. ‘사랑의 공동체-되기’를 향한, 나와 너, 우리의 무한한 수행적 움직임들을 춤을 빌어 표현했다.

김상표_사랑예찬-우리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1
김상표_사랑예찬-우리_캔버스에 유채_162.2×390.9cm_2021
김상표_Eros_캔버스에 유채_193.9×390.9cm_2020
김상표_Eros_캔버스에 유채_193.9×390.9cm_2020

이번 개인전에서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다수 출품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박사과정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부전공이 사회학이었다. 그래서 화가가 된 뒤에도 우리 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둘의 무대를 넘어 다수를 향한 세계로의 열림 속에서 사랑의 주체들인 나와 너, 우리는 어떠한 정치적 몸짓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연대하는 신체들인 장애인들의 시위 장면을 <we exist>라는 제목의 5점 연작으로 다루었다. 여기에 농아임에도 무용수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카산드라 베델의 초상화도 4점 출품했다. 우리 사회에서 배제된 소수자들의 삶에 대해 함께 얘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싶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호 존재(inter-being)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차별적 구분은 동일성의 폭력 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적인, 심지어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

통일과 전쟁을 다룬 작품도 100호 이상 8점을 출품한다. 남북은 물론이고 전세계를 언제든 파국으로 몰고갈 국지전이 발발할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생명, 사랑, 평화’의 가치를 묻는 것으로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장되었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평화는 보편적 사랑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나키즘을 표현한 작품들도 출품했다. 저항과 불복종의 아나키즘 정신이야말로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실존적 몸짓과 정치적 몸짓의 바탕이라고 믿기에 이를 100호 3점의 작품에 담아냈다.

김상표_We Exist(1-3)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1-3)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1-4)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1-4)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1-2)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김상표_We Exist(1-2)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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