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김치앤칩스, 메르시, 시몬 비뢰드 ‘COLLECTIVE BEHAVIOR’
[공연리뷰] 김치앤칩스, 메르시, 시몬 비뢰드 ‘COLLECTIVE BEHAVIOR’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9.0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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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앤 칩스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지난 8월 12일부터 사흘 간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는 덴마크에서 온 안무가 시몬 비뢰드(Simone Wierød)와 테크노뮤직 듀오 메르시(M€RCY), 그리고 한-영 미디어아트 스튜디오 김치앤칩스(Kimchi and Chips)의 협업작 <콜렉티브 비해비어 Collective Behavior>가 펼쳐졌다. 동시대 예술창작 동향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인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의 정석과도 같은 작품이 마침내 발견되었다.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나니” 구약성서에서 인용된 이 문구는 1960년대 이후 사회 전반의 자력(磁力)이 되어온 문화예술적 이념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이기도 하다. 이는 장구히 누적된 인류의 역사로부터 더 이상은 그 어떤 혁신적인 ‘발명’이 불가능해졌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원본과 복제, 이데아와 시뮐라크르(simulacre) 간 위계의 파기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차이나는 것들을 긍정하고 수용하려는 태도인데, 이는 비단 동시대 예술이 새로움을 창출하는 방식(소위 패러디(parody), 패스티시(pastiche) 등 원전(原典)을 참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을 옹호하기 위해 고안해낸 표어인 것만은 아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이동수단과 미디어 망의 발달. 실로 세계는 공시성(共時性, synchronism)이라는 판에 놓였으니 이제 실시간으로 교통하는 이 세계에서 ‘새로움’ 혹은 ‘차이’는 예전과는 다른 방식, 보다 미시적(微視的)인 관점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는 아주 실질적인 이유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다.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협업(協業), 유기체적 시간으로의 차이나는 복귀

어쨌든 그 같은 전환도 반세기를 훌쩍 지나섰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우발적 행보에도 갈래가 형성되었다. 포스트모더니티를 담지한, 동시대성 담론에 부합하는 당대의 예술 ‘컨템퍼러리아트’의 특성은 융복합(融複合), 학제간(學際間, interdisciplinary, cross-disciplinary), 다원(多元), 혹은 협업(collaboration) 등의 수식으로부터 규정된다. 정밀하자면 각각의 개념들은 저마다 다른 지향이지만 공통적으론 요소들의 결합적 구성의지를 갖는다. 이 의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시간을 역전시킨다. 매체에의 천착, 장르적 구획,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였던 총체적 예술, 한 덩어리였던 철학과 예술과 과학. 그러나 이 유기체적 시간으로의 복귀는 분명 ‘차이나는 반복’이다.

‘차이나는 반복’은 들뢰즈의 용어다. ‘차이’와 ‘생성’의 개념을 정치(精緻)하게 사유해냄으로써 현대성을 담지한 새로운 갈피의 존재론을 개진함은 물론 동시대 예술현상과 작품에의 이해에 바탕적 사유방식을 제공한 들뢰즈에 의하면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납작하게 설명하자면, A-A로의 진행(엄밀히 스피노자-베르그손-들뢰즈로 계열화되는 생성존재론에 의하면 동일자同一者의 출현은 애초 불가능하지만)으로써는 반복의 식별이 불가능하다. A, A′ A″…로 확인될 때, 반복은 차이에 의해 비로소 그 지각과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동시대 예술 현장의 관찰자로서 ‘′’ ‘″’만큼이나 ‘A’의 중요함도 덧대어 강조하고 싶다. 고대의 총체적 예술과 동시대의 총체적 예술 간의 ‘차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구사해야 하는 그 차이는 무엇으로부터 비롯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역사, A들의 누적된 운동, 그 서사의 결론으로부터 출발하는 혹은 재해석의 지점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 아니겠는가. 현대예술이 주장하는 ‘우연’과 ‘즉흥’은 필연과 시간의 누층을 견디고 피어나는 것이지, 절대적 우발성인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결단코 ‘아무거나’가 아니고 ‘아무렇게나 행한 것’이 아니다. 예술과 사유가 지나온 길 끝, 예술의 각 장르가 당도한 현재적 정체성, 그 축적된 차이들의 팽팽한 결합, 그 대등한 협업의 결과일 때 컨템퍼러리아트는 당대적 의미를 지닌다.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화합하는 장르들 그리고 협동의 어려움

예술은 행위적 측면에서 충분한 의의를 지닌다. 여흥과 소통과 치유의 역할로 일상에 관여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기도 하다. 예술가 역시 예술에의 탐구와 행위로 생을 영위하는 것 외에 증명해야 할 어떠한 자격요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정황은 다르다. 생산되는 무엇이든지를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에, 예술의 파격(破格)은 격(格)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A들의 역사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현대에 등장한 열린 개념의 예술작품을 껴안은 미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예술로 공인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범주적, 이론적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다.

절반쯤 수긍한다. 예술사(특정 장르사), 그 역사 속에서 발명 혹은 발견된 개념들 그리고 그 개념을 설명한 혹은 설득한 미학적 또는 사회학적 입장들은 확실히 해석과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예술의 보다 구체적인 행위, 수용(감별, 감상 이상의)과 창작. 그 적극적인 실천을 도출하는 예술적 앎은 인식적 앎을 포함하여 보다 전적인 차원의 일이다. 예술적 앎은 최종적으로는 몸적 앎이다. 감각적으로 몸에 기입된 앎이거나 혹은 지식적 습득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체화된, 숙련되고 숙성되어 실행되는 앎이다. 예술의 파악과 관련하는 어휘들 ‘지각’ ‘직관’은 확실히 몸과 관련하고, 그 일각(一刻)에 완성되는 온전한 소통의 사태는 그저 대상으로부터 불현듯 하사되는 외부적 각성은 아닌 것이다. 주관과 대상의 전(全)시간적 작용, 직관은 몸에 배인 누적분의 경험으로부터 가능해지는 것이다.

동시대에 만연한 예술의 작업방식, 일견 일회성으로 여기기 쉬운 프로젝트나 컬래버레이션은 그 기민해 보이는 과정 배후에 예상 밖의 공력(功力), 직관적 성찰과 즉결적 소통의 능력을 요한다. 내공이 부족하거나 여타의 원인으로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을 때 작품에서는 어떤 결락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컬래버레이션의 작업에서는 상보(相補)하고 상승(相乘)하는 배가(倍加)적 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에 작업자들이 서로의 역능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때, 장르와 매체 간 운용이 절묘하지 못하였을 때 필연적으로 무엇인가가 무엇들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장으로 확인된다. 그 미숙함이 발견되면 예술성은 한갓 유행으로 휘발되어 버린다. 혹은 예술에서 기술로 존재론적 토대가 바뀌어버리기도 한다.

신종 미디어인 영상 이미지에 몸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춤들이 흔히 그렇다. 예술이 사람의 일이라 믿어 ‘더욱이’ 몸의 일인 춤을 편애하는 일인으로서는 사유가 그 방점을 이성으로부터 몸으로, 예술의 경향이 시각적 경험에서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 더 나아가 촉각적 체험으로 옮겨가는 이 시대에 역행하는 춤작품이 목격되면 실로 섭섭해진다. 특히나 장르적 지위에 입각(入閣)하기가 지난했던 춤의 역사를 알고 있는 입장에선 막간의 춤, 도구화되는 몸에 각별히 애가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은 시도와 실패의 총합이기도 하다. 좋은 작품은 원래 둔덕에 우뚝 선 깃발처럼 희소한 법. 범람하는 협업의 환경에서 <Collective Behavior>는 오랜만에 발견한 깃발 같은 작품이었다.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집체적 창작, 세계의 양상, 콜렉티브적 의미심장함의 다각도

<Collective Behavior>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덴마크예술청의 공조로 제작되었다. 2019년 덴마크의 코펜하겐 볼륨(KPH Volume)에서 초연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1월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선을 보였었는데, 이번 공연은 세종문화회관의 컨템퍼러리 시즌 기획 <<싱크 넥스트 22>>에 선정됨으로써 성사되었다. 미디어아티스트 스튜디오 김치앤칩스와 듀오 뮤지션 메르시(에스벤 발뢰에(Esben Valløe)와 팀 판두로(Tim Panduro), 이 작품의 사운드 디자인은 판두로가 맡았다) 그리고 춤작가 시몬 비뢰드의 협업작이다.

<Collective Behavior>는 ‘컬렉티브 비해비어’다. ‘집단의/집단적’ ‘단체의/단체적’ ‘공동체의/공동체적’ 그리고 ‘행동’ ‘태도’ ‘행동양식’ 그 어떤 번역어의 조합으로도 완역되지 않는다. 어떤 결정으로도 근접이 안 되는 이유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의미 누락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작품이 펼친 사태가 세계의 총체적 양상이기 때문에. 작용과 반작용의 무한한 운동, 생성과 소멸 사이의 변화일 뿐 어떠한 국면으로도 결정지어지지 않는 세계의 진면모를 <Collective Behavior>의 시공간으로 함축해내었으니, 제목자로의 한정은 원어로서도 부족분이다. 작품의 품위에 대하여 언어 자체, 기표적 한계에 맞닥뜨렸달까(리뷰도 그렇다. 매번의 작업에서 질성(質性)의 누수를 경험하지만 이번은 특히 그 소묘가 어렵다. 동세(動勢)를 건진 크로키(croquis)라도 될 수 있으려나. 아무튼).

세계에 내속하는 한 개인은 누구라도 주체 본연으로 살아낼 수 없다. 의식되는 한 사회의 실질적 체계에 협응해야 하고, 전의식(前意識, preconsciousness: 풍속·관습 등 사회의 집단적 의식은 잠재적이나 쉽게 현행화된다는 측면에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지대다)적으로는 집단의 의식으로 간주되는 관념체계들에 영향을 받는다. 문명에 기대 사회적 존재로 사는 한 인간은 그 자연적 본성에 균열을 겪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라캉이 ‘빗금 처진 주체’ ‘$’로 기호화해낸 이유다. 그 균열의 간극 사이로 꿈과 충동, 무의식의 출몰도 겪어내야 한다.

‘正體性’이라 표기되지만 정체성은 실체와 허위(虛位) 사이에 있다. 물리적으로 성장과 노화를 겪고 심리적으론 타자와 사회에 반응하는, 인간의 존재양식은 변동이다. 정체의 실질적 사태는 ‘停滯’, 상당 기간 유지되는 그러나 결국 가변적인 상태이고 ‘正體’는 안정성에의 욕망, 그 지향에 관한 지표다. 사회적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와 관념의 변천을 집요히 추적한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처럼 에피스테메(episteme, 특정 시대를 관장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역시 변화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때는 맞았던들 지금은 틀리다.

집단의 의식과 무의식이 통시적 운동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 단체, 공동체는 항구적 결속 상태가 아니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인다. 세계는 통시적으로도 공시적으로도 작용과 반작용을 한다. 그에 환속하는 인간의 처지와 입장도 투사하고 상충하고, 기억은 편집적이고 편의적이기까지 하니 삶은 이중 삼중의 변동운동, 인간은 변형하는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세계는 변형하는 존재자들의 전체로 수렴하는 세계. 김치앤칩스와 판두로와 시몬은 그 복잡계를 형상화해내고 구동시키고 그에 처한 삶의 양상을 현상해낸다.

우선 세계의 표상을 보자. 빛과 어둠은 세계의 원형질이다. 그것들이 맺고 푸는 상(像), 그 일시적 사실의 일부가 현상(現象, phenomenon)이다. 사람은 세계에 대하여 부분적 현상, 그 절단면을 보고 알고 산다. 김치앤칩스는 프로시니엄 무대의 암흑과 조명기의 빛 그리고 거울로 세계를 제시한다. 시각예술을 전공한 손미미와 물리학을 전공한 엘리엇 우즈(Elliot Woods, 영국)가 결속한 김치앤칩스는 물질과 비물질, 질료와 현상을 다뤄 비가시성 지대의 대상과 양상을 현전(現前, presence)시키는 공감각적 설치작업으로 기술을 첨부한 예술, 예술이 된 기술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디어아트 그룹이다(이들은 작년 여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마당에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태양 <헤일로(Halo)>(2018)를 출현시켰다). 이번 작품에서는 프로시니엄 무대의 진공(眞空)을 거울과 빛으로 운용하여 가변(可變)하는 세계 혹은 심리적 시공간을 실상(實像)으로 구축해내고 작동시킨다.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COLLECTIVE BEHAVIOR’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김치앤칩스는 업스테이지에 대형 거울을 고정하고 무대 중간 중간 비정형으로 다섯 개의 거울을 배치했다. 인간적 시간, 현재를 중심축으로 세우면 세계는 그들의 설정처럼 절연(絶緣)면들의 집합이다. 그에 각도와 조도를 달리한 빛을 부과하여 투과(작용)와 반사(반작용)로 인해 확장하고 축소하고 분열하고 중첩하는 세계의 물리력을 시연해내면 메르시는 그들의 사운드로 그 세계의 공기, 뉘앙스를 채운다. 가끔 그 세계에 내속(內束)하는 층위들(거울)과 존재들(무용수들: 송윤주·전보람·전우상)의 마찰을 구체성의 사운드(예를 들면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 등)로 출현시키기도 하지만 그 빈도와 강도는 약소하고(세계와 개인의 관계처럼), 사운드 대부분의 내역은 정황, 대체로 미스터리한 미정(未定)적 세계의 분위기를 출력한다. 판두로의 사운드는 공기처럼 순환, 생성한다. 공기(사운드)는 인간존재(무용수)를 살리고(행위, 춤을 유발하고) 그들의 행위와 심리는 다시 세계의 분위기로 수렴된다.

인간의 일들은 역시 몸, 춤으로 현상된다. 변천하는 세계 속에 변동하는 인간. 시몬의 세 무용수는 세계를 압축해낸 무대 속에서 철저히 변형함으로써 존재한다. 빛에 의한 부분적 투영과 거울의 복사와 반사로 무용수들의 이미지는 자신의 몸으로부터는 일부분으로 발췌되고 반사되고 복제됨으로써 가상적 군중으로 산화(散化)된다. 존재의 운동, 춤 역시 연쇄하는 암전을 포함함으로써 본연의 지속성으로 드러나지 못한다. 춤을 편애하는 입장이라면 운동과 변화 그 자체인 생명성을 전개하는, 몸이라는 춤의 그 특유한 매체성(각종의 매체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의 누락과 상실이 각별한 불만 혹은 불안으로 들이닥쳤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 결락을 드러내 보이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의혹과 불안을 공유하는 작업인 것이다. 보지 못해도 우리는 암흑 속에 잠긴 춤이 지속하고 있음을 안다. 김치앤칩스는 불가시(不可視) 지대를 감지할 수 있도록 작품의 세계를 설계하였고 그 세계 속에서 실행중이나 감춰진 춤은 금지된 것이거나 불가능성이거나 비밀과 무의식,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우리의 은폐된 나머지 내부의 운동을 환기한다. 표면 아래 깊숙한 것들의 45분, 명(明)과 암(暗)의 교합으로써 세계의 총체성에, 정지를 포함한 운동으로써 삶의 총체성에 근접했다.

의미론적 공력 외에 말해두어야 할 것은 협업적 측면에서의 솜씨와 태도다. 신종 미디어들과의 조력에서 몸, 춤이 흐려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역으로 몸, 춤이 주도적일 때 이젠 나머지 장르들이 과거의 자리에 매인 것처럼 여겨진다. 동시대 감수성의 지대에서 컬래버레이션이 이상적일 때, 앞서 말했듯 참여하는 장르와 매체는 각각의 역사를 등에 지고 ‘지금, 여기의 주체’로 와 작품 내 세계 속으로 새로이, 다르게 조직되어 거듭나야 한다. <Collective Behavior>에서 김치앤칩스는 색(色)을 사용하지 않았다. 시몬은 보편적인 춤에서보다 훨씬 많은 분절적 정지를 허용했다. 변형함으로써 새로이, 덜어내고 결속함으로써 강화되어, 그들은 세계의 심층적 운동을 가시권의 영역으로 불러들이고 생생히 구동해내었다. 컬래버레이션의 작업에의 기대치, 소위 시너지 효과를 이렇게 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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