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프리뷰]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신작 '유령들'
[공연프리뷰]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신작 '유령들'
  • 김명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0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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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유령들을 만나는 시간
유령들 리허설 현장 (사진제공=아트프로젝트보라)
'유령들' 리허설 모습 (사진=김보라)

[더프리뷰=서울] 김명현 무용평론가 = 파도가 거세게 출렁이는 코엑스의 명물 삼성전자 디지털 사이니지에서 춤추는 인간들을 본 적이 있는가? 아트프로젝트보라 김보라 예술감독의 작업이다. 그는 이제 막 40줄에 접어든 젊은 안무가지만 그가 성취해온 예술적 역량은 매운 맛이다. 몸을 안무의 중심에 두고 그 물성과 감각을 기묘하게 조합하여 관객을 낯선 세계로 안내하는 그의 작업은 비평적으로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데뷔작 <혼잣말>을 비롯하여, <각시> <소무> <100% 나의 구멍> <꼬리언어학> 등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몸’과 ‘언어’다. 모리스 블랑쇼는 몸과 언어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말하면서부터, 내가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의 말은 나에게서 존재를 앗아간다. 만약 내가 생각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김보라의 작업에 등장하는 몸들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침을 흘리고, 오줌을 흘린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자체로서 몸에서 흘러내린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꼬리를 높이 쳐들고 타자의 몸을 훑고, 냄새를 맡으며, 꼬리를 흔들어 소통한다. 그에게 몸은 곧 언어인 것이다. 또한 몸은 곧 춤이다. 춤을 춤추는 무용수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듯이, 춤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춤과 언어와 몸이 하나인 그의 몸은 유령이다.

유령은 누구에게는 보이고, 누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에 있다. 그래서 감각적인 동시에 비감각적이며, 물질적인 동시에 비물질적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타자로서 존재하며, 누군가의 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언제나 끊임없이 다른 것, 다른 의미, 다른 말로 대체된다. 그것은 유령이기도 하고, 환영이기도 하며, 천사, 악마, 존재, 본질, 욕망, 언어, 관습, 국가, 자본, 계급, 정치이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유령이다. 인간이 유령이고, 몸이 유령이다.

지난 3년에 가까운 시간, 유령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우리 모두를 유령으로 만들었던 코로나라는 바이러스 유령은 김보라 안무가에게 유령을 선물했다. 그는 실재하는 몸이 허구임을, 춤이 환영임을, 언어가 허상임을, 공간이 가상임을 발견했다. 실재하는 것이지만 춤을 춤으로써 허구가 되는 몸. 실재와 허구의 경계에서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되지도 않는 춤추는 몸의 감각과 도취와 환영을 보았다. 그것을 금지할 방법은 없을까? 그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들을 금지할 방법은 없을까? 갑작스럽게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돌발상황들, 소리들, 시간들. 그들은 유령인가 아닌가? 실재하는 것을 유령으로 만드는 춤과 극장은 유령인가 아닌가? 몸이 혹시 시간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 속에서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신작 <유령들>이 만들어졌다.

<유령들>에는 네 가지 유령이 등장한다. 그것은 춤, 언어, 몸, 극장의 유령들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과, 엉망으로 뒤죽박죽 섞여버리는 공간 속에서 여섯 무용수는 그들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벗고 유령마저 벗어내려 한다. 내 몸을 겹겹이 에워싼 옷과 사물들을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몸이 된다. 성기까지 노출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음’을 선언하면서, 내 몸의 ‘참됨’을 내보이고자 한다.

프랑스어로 유령학을 뜻하는 옹톨로지(Hauntologie)는 존재론을 뜻하는 옹톨로지(Ontologie)와 동음이의어다. 유령을 벗겨내는 것은 곧 실존으로 회귀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몸은 ‘벗은 몸’일까, ‘전라(全裸)’라는 코스튬을 입은 몸일까? 이들의 몸짓은 존재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일까? 귀신들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푸닥거리일까? 그것은 관객들이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서 유령을 발견하고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유령 따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늘 함께했지만 나는 함께하지 않았던 그 텅 비어있는 나의 유령, 나라는 유령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를 나를 만나는 생의 한가운데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령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데리다는 “변화의 순간이 너무나 즉각적이어서 전혀 포착되지 않는 상태에서 유령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므로 관객은 유령이 되어 유령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유령이 되어 극장 속으로, 시간 속으로, 춤 속으로, 무용수의 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검열관(in-spector)이 되어 아주 미세하게 섬광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모든 시간, 모든 순간, 모든 찰나를 놓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추적해야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관람하는 일은 고통을 감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유령은 현존(presence)하는 것이 아니라 현전(the present), 즉 ‘지금, 이 순간’에만 현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중하게 흐르는 말러의 <교향곡 5번>과 함께 내 생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유령들을 만나보길 바란다.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신작 <유령들>은 2022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의 개막작으로 오는 9월 14-15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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