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댄스포럼] 춤, ∣경계∣, 확−장
[시댄스포럼] 춤, ∣경계∣, 확−장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09.28 17: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확장 중인 춤, 기술과 관계하기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c)류진욱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지금’ ‘여기’ ‘나의 몸’으로 현장에 동참 가능해진 진짜 가을이 왔다. 올해로 25회, 무려 사반세기 동안 각종 춤들에게 그 마당을 열어준 서울세계무용축제(Seoul International Dance Festival, 예술감독 이종호, 이하 시댄스)는 3년 만의 대면 잔치를 벌이며 여느 때보다도 각별히 춤들을 염려한다. 컨셉추얼 미학관과 융복합 작업방식이 주요 경향을 이루어가던 차에 영상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팬데믹 상황마저 맞았었으니 어쩌면 흐려졌을지도 모를 몸, 춤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 올해의 특집 테마는 ‘춤에게 바치는 춤들’이다. 상황 진단을 도모하며 개막 전일인 9월 13일, <춤, ∣경계∣, 확−장>이라는 표제의 포럼(대학로 예술청 아고라)으로부터 춤들의 퍼레이드를 출발시켰다.

포럼 참석자들 기념촬영

이를 위해 세대를 대표하는 춤작가들 전미숙(전미숙 무용단 대표), 박호빈(제로포인트모션 대표 겸 예술감독), 윤푸름(윤푸름프로젝트그룹 대표), 정재우(댄스컴퍼니 브레이브맨 대표)와 민간과 공기관 소속의 기획자들 박신애(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대표), 양은혜(공연기획 스튜디오그레이스 대표·월간 무용웹진 <춤in> 편집장), 오선명(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극장운영부 차장/무용PD), 김여항(국립현대무용단 홍보마케팅 팀장) 등이 4시간여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평론가 김명현과 정옥희가 대화의 물꼬가 될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진행을 도왔다.

박호빈, '오르페우스 신드롬'
박호빈, '오르페우스 신드롬' (사진제공=제로포인트모션)

예술은 다양체들의 서식지여야 마땅하지만 예술에 관한 담론은 어쩔 수 없이 새로움에의 경향성을 갖는다. 필자의 경우를 빌려 말하자면, 기존하던 것들이 새삼 충족적일 때는 질적 차이가 빚어졌거나 질성이 충만한 사태일진대 나의 언어구사력은 그 질적 사태 앞에서 언제나 무력하다(지금 충만하는 저 사태를 도대체 어떤 묘사로 포착하고 전송할 수 있는가. 추상적인, 더구나 운동하는 춤이라니).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의미화의 구간들인 것이다. 나의 경험의 맥락상에서 전복되는 의미들, 새로이 발견되는 의미들 혹은 좌초하는 의미들.

아마도 예술이 새로움에 쉽게 경도되거나 스스로 새로움에 대한 강박을 짊어지는 것은 이런 연유의 연쇄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예술의) 세계로부터 미처 호명되지 못한 것들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 올해 시댄스의 개막작은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유령들>이다. 우연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있으며 동시에 없는 것들, 말해지지 못한 춤들 그리고 영상기술에 실려 존재론적 토대에 변화를 겪는 춤들. 지금 현재, 새로움의 카테고리에서 소위 가장 핫한 키워드는 ‘기술’이다. 논의의 향방은 자연스레 ‘확장 중인 춤’ 쪽으로 흘러갔고 그중에서도 ‘기술’에 그 초점이 모아졌다.

1부, 기획자들

기획자들은 예술의 외부(국경, 영역)에서 어떤 개념들이 이식될 때 흔히 발생하곤 하는 왜곡들로부터 이야기를 전개했다(그 왜곡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창작의 공간을 열어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 시절 단체명으로 각광 받았던 ‘컴퍼니’. 도제식 또는 학교동인단체 ‘무용단’들로부터 소위 ‘독립’ 예술가들이 ‘독립’해나오기 시작하던 무렵 그것의 개념을 성사시키는 실질적 내역(부서들의 직무 분담과 연계 그리고 그에 합당한 급여와 복지제도)의 실천과는 무관하게 차명(借名)되었던 그 문제적 단어. (필자는 직업무용단의 논의로부터 무용계 전반으로 다시 선명하게 의식화되어야 할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체 기반형 예술에서 해체되고 있는 단체 자체에 관하여. 그리하여 자생적이고 선순환적인 생태계로서의 무용계에 대하여.)

예술의 개념들은 일상의 개념들과 딱 들어맞진 않는다. 예술은 일상에 대하여 가감(加減)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작동시키거나 예술이 탄생시키는 개념들은 일상 내 기능적이고 실천적인 개념들보다 초과적이다. 그렇지만 예술과 일상 사이, 예술적 개념들과 일상적 개념들 사이 경계가 단호히 그어진 실선들인 것도 아니다. 김연아의 스케이팅이 스포츠로서의 스케이팅의 개념과 룰의 한계를 밀어내며 수행될 때 절로 “예술이네!” 감탄되듯,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컨템퍼러리 서커스가 춤과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되듯, 경계들은 점선들이고 창작은 그 부분실선들의 사이 간극에서 출현한다.

정재우, '무인도' (사진제공=브레이브맨 댄스컴퍼니)
정재우, '무인도' (사진제공=브레이브맨 댄스컴퍼니)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잠언의 동시대적 해석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창세기적 창조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창작이란 실로 있는 것으로부터 지우고 덧대어 나아가는 일이라는 것이리라. 선재하는 사유들로부터 자신의 고유한 개념들을 주조한 들뢰즈는 “철학은 개념을 창출하는 일”(<철학이란 무엇인가?>)이라 하였다. 춤의 창작은 몸으로 사유하는 일. 사유가 개념을 창출하는 일이라니 안무(특히나 요즘처럼 컨셉추얼하다면)와 개념의 제시는 다른 일이 아니고, 안무적 개념이나 철학적 개념이나 어떤 내적논리에 입각한 하나의 입장. 창조적 삶과 예술적 삶의 태도가 다르지 아니함이다.

기획자들은 오늘날 만연하는 융복합 작업방식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다원예술 분야’ 지원을 신설한 2005년을 기점으로 개시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추측컨대, 의도치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빚어지는 제도와 지원의 마름질을 우려한 것이리라. 아니었다면 적어도 필자는 그러하다. ‘플랫폼(platform)’이며 ‘인큐베이팅(incubating)’이며 요즘 예술을 둘러싼 담론에 등장한 단어들은 유난히 명(明)도 암(暗)도 짙다. 플랫폼은 ‘도제식 병폐의 와해’와 ‘단체와 현장의 기화(氣化)’ 사이 어느 지점이고, 인큐베이팅은 ‘낯설고 이질적이고 아직은 희소한 것들의 배양’과 ‘지침’ 사이 어느 지점이다. 오늘의 화두 기술에 대한 판단도 ‘인간의 확장’(마셜 매클루언 Marshall Mcluhan)과 ‘사람과 비대칭의 관계’(프리드리히 키틀러 Friedrich Kittler) 사이 어떤 입장이다.

2부, 춤작가들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로부터도 작가와 작품은 독자적으로 자연발생하지 않았다. 그가 속한 사회·문화적 환경으로부터 출산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요즘처럼 사회 주도적인 생산 시스템에 귀속되어 있지만은 않았다(궁정 소속 예술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민속도 많았다). 비단 기회와 재원을 제공하는 제도와 지원들의 선택을, 그 선택보다 많은 배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이든 상품으로 삼아버리는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소화력이고, 이미 인간의 자발적 사유능력을 포획해버린 상징계의 주도면밀한 작동이다.

자본주의와 상징계의 첨병으로서 기술은 소비시장의 쉼 없는 회전을 추동하는 갖가지 아이템들로 실체화되어 그 가속적 변모를 일삼고 있고, 인간의 사유능력과 소통의 토대를 점령하고 그 방식을 특정하고 있다. 그리고 공연예술이 대면하고 상호간 공감을 이루어내야 할 대상, 불특정다수 관객들은 기술이 점유한 세상에 익히 적응하고 있다. 1부에서 기획자들은 확장적인 춤들을 관통하고 있는 쟁점이 기술임에 중의를 모았고, 그를 이어받아 2부의 진행을 맡은 정옥희는 현장 예술가들에게 ‘사회적 압력’으로 행사되고 있는 기술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우선 지난 4월 대전 스프링페스티벌과 국제현대무용제(모다페)의 공동기획 렉처 퍼포먼스 <거의 새로운 춤>으로 급변하는 세계 속 춤의 진위를 다각도로 질문했던 전미숙은 자신에게 기술이란 (고착된 미감의 더께를 떼어내고 실존으로 직진해 들어가는) ‘몸의 기술’이었고 이제와 그것이 테크놀로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관심 밖의,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간명하게 말해주었다. 애초에 의뢰되었던 기술적 협업은 거절하였다지만 테크놀로지 환경에 놓인 춤을 고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몇몇 전작들로부터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기술) 환경에 놓인 삶,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와 춤의 관계 가능성을 탐색해온 신창호의 <비욘드 블랙>을 인용하여 (아직은) 인간의 심신일원적 몸으로부터 ‘생동(生動)’하는 춤에 필적하기에는 연산(演算)한다지만 분절적 수식(數式)인 디지털로의 전환에는 필연적인 누수가 있음을 암시하였다(인류는 이미 같은 구조의 실패를 확인한 바 있다. 기표(記表, signifiant, 기호의 표현 재료) 사이로 미끄러지는 기의(記意, signifié, 기호의 내용), 구조 사이로 흘러내리는 차이. 사유가 구조주의로부터 후기구조주의로 나아간 그 이유).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c)류진욱

댄스컴퍼니 조박, 댄스씨어터 까두 시절을 지나와 융합 플랫폼 퍼포먼스 그룹 제로포인트모션이라는 명칭으로 현재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박호빈은 그의 단체 개명(改名)의 역사가 공동체 존속의 어려움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학적 변천의 여정과 맞물리기도 한다고 말해주었다. 영성(靈性)에서 양자역학에까지 그 춤적 사유의 근거와 미학적 판단은 일견 광폭의 행보처럼 느껴지지만 ‘파동’과 ‘소매틱(somatic)’은 그 근원이 다르지 않기는 하다.

그러나 그간의 누적된 관찰(비단 박호빈의 경우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에 의지하여 첨언하자면 몸적 미묘함(애매모호하고 심지어 불확정성인)은 그 전달이 쉽지 않고 그렇다고 그 번역과 증폭을 위해 기술을 개입시켰을 때 오히려 사라지거나 변질되기 십상이었다. 심신이 유동하는 몸성과 0과 1의 조합체계인 디지털은 본성상 ‘다름’이기 때문이다. 양자를 동원한다고 해도 몸의 줏대를 챙길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춤의 작품을 건립시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몸들의 세계에 기술을 동참시키는 것과 기술의 세계에 몸을 헌납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다원이든 융복합이든 학제간이든 예술의 현재적 상황을 기술하는 언사는 무엇의 무엇으로의 전도(顚倒)를 지시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표제어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가치 ‘탈중심적 사고’는 헤게모니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의 중심성들을 자각하고 관성을 벗어난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다>(2017), <사이의 형태>(2019), <시간의 형태의 시간>(2020) 등으로 심화하는, 몸/춤의 중심으로부터 이탈하여 확장적 안무를 시도하는 윤푸름의 작업 반경은 흥미로웠다. <시간의 형태의 시간>에서 그녀는 QR코드를 이용(어떤 공간에 배정된 QR코드를 찍으면 그 공간에 있었던 춤을 불러들일 수 있다)하여 현존(現存, existence)과 현전(現前, presence)과 부재 등 시간의 형태들을 중첩시켜 공간화된 입체적 시간을 설계했다. 이 포럼에서 말하길 그 작품에서 불러들인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아주 호방한, 전복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사고라고 생각했다. 춤, 몸의 존재는 시공간과 분리불가능하니까.

며칠 후 시댄스를 통해 윤푸름의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9월 20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를 보았다. 이번에는 극장을 (채워져야 할) 공간이 아닌 (이미 많은 것을 지닌) 장소, 공연의 배후가 아닌 공연의 주체(agent. subject와 구별하겠다)로 등장시켰다. 여기서 기술(AI, VR, 메타버스, NFG 같은 첨단은 아니지만 움직이는 플로어, 무빙라이트, 포그머신과 팬 등)은 행위를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를 행한다. 인간의 움직임을 기계들의 기술적 작동으로 대치(代置)시켜 극장을 진공 이상의 생명성(“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으로 등극시키는 전복적 사유의 이유와 단초들은 이해는 가능하다(동의와 감동은 별개로). 그러나 한편으론 그 구현이 원천적 생명성의 희석을 결과하니 말이다.

윤푸름,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c)김주빈
윤푸름,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c)김주빈

몸과 춤이 너무 많이 물러난 작품을 춤작품이라, 몸과 춤을 탈락시킨 작가를 춤작가라 불러도 좋은가, 혹은 예술작품의 제작에서 개념의 성립과 물리적 구현을 완전히 분리시켜도 좋은가 등등 안 그래도 누차 갖던 의구심, 아니 솔직히 불안에 사로잡혔다. ‘확-장’을 ‘확장 중인 춤’으로 읽는 것은 그저 나의 자의적 해석과 바람일까, 어쩌면 미래적 춤과는 결별하게 될까, 진작부터 두려웠다. ‘해체’(데리다)의 지향은 끝없는 ‘다시 쓰기’고 ‘탈영토화’(들뢰즈)가 요청하는 것은 ‘영토화’와 ‘재영토화’로 거듭하는 횡단에의 태도. 내가 정주하는가, 아니면 시절이 해체와 탈영토화의 단면에만 집착하는가.

정재우도 윤푸름처럼 QR코드를 사용했고 디지털 플랫폼으로의 진입을 시도했고, 당장의 성과가 탐탁치는 않았었지만 그 시도는 변화하는 상황에의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기술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니 탐색과 숙고의 대상 목록에 올릴 수밖에 없다. 기술과 관계 맺는 인간의 미래에 관하여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 새로운 관계맺기의 성공도 실패도 열렬하게 증언하기를, 우리 시대의 새로운 국면을 말하기로 작정한 작가들을 응원한다.

정재우, '아뇌쿠메네'
정재우, '아뇌쿠메네' (사진제공=브레이브맨 댄스컴퍼니)

만일 인간과 기술과의 관계가 조화롭지 못한 지경에 이른다면(언제가 적정 시점인가) 우리가 믿을 것은 예술가들이다. 예술가들은 해당 시절의 척후병(前衛, avant-garde)들이기도 했지만 또한 전복자들이기도 했다. 과거의 전위들은 ‘인간다운 삶’, 사회적 기제가 탈락시킨 인간성의 회복을 시도하는 일이었다. 오늘의 전위는 기술로의 전입을 말하지만 내일의 전위는 아날로그로의 복귀를 선언할지도 모른다. 미래와 미래의 예술이 그 모든 입장들의 공존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라면, 그렇게 선택의 여지가 많은 공간이라면 더없이 멋진 세계겠지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