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사랑과 고난은 나의 힘 - 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
[공연리뷰] 사랑과 고난은 나의 힘 - 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11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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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의 이야기' 1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 독일 괴담소설과 환상소설의 대표 주자였고, 후대에 에드가 앨런 포나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보들레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작가다.

호프만의 판타지 공포문학이 오펜바흐에게 영감을 주어 탄생한 작품이 바로 옴니버스 형식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다. 작품의 1막은 ‘모래 사나이’, 2막은 ‘고문관 크레스펠’, 3막은 ‘잃어버린 영상’ 등 호프만의 단편 소설에서 각각 스토리를 가져왔다.

야콥 오펜바흐는 평생 동안 90여 편의 오페레타를 썼고, 자신의 전용 오페레타 극장 부프 파리지앵을 설립하는 등 프랑스 희가극의 아버지로 불린다. 수많은 오페레타를 작곡했음에도 그의 숙원은 위대한 오페라를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프만의 단편소설들을 대본화한 이 작품의 완성에 온힘을 쏟았으나 안타깝게도 1880년 10월, 초연을 앞두고 리허설 도중 세상을 떠났다. 오펜바흐가 채 마무리하지 못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레치타티보는 미국 작곡가 어니스트 기로가 완성했으며, 이후 많은 버전이 생겨났다.

'호프만의 이야기' 2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는 1881년 2월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되었고 뜨거운 호응 아래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파리뿐만 아니라 전 유럽과 남미까지 퍼져나갔고, 오늘날에도 각광받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 9월 29일부터 10월 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이 <호프만의 이야기>를 올렸다. 2019년 이후 3년 만이다. 2019년과 같은 세바스티안 랑 레싱 지휘, 뱅상 부사르 연출이다.

무대는 시인이 들려주는 기이한 연애담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이었다. 달은 아름다움과 공포심, 무한함을 동시에 상징했다. 뮤즈에게도, 악마에게도, 인형과 광기 어린 예술가와 요부의 배경에서 달은 최적의 역할을 했다. 안토니아가 등장하는 3막에서 무대 가득 등장한 바이올린, 그리고 4막의 계단도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장치였다.

'호프만의 이야기' 4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 4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을 노래한 테너 국윤종은 물 만난 고기 같았다. 국윤종의 미성은 요샛말로 ‘금사빠’ 스타일이다. 저렇게 낭만적으로 노래하는 시인이라면 세상 어디서든 여인과 사랑하기 정말 쉽겠구나 싶었다.

올림피아를 맡은 소프라노 이윤정의 새로운 캐릭터 해석이 참신했다. 일반적으로 올림피아는 무표정한 얼굴과 과장되게 경직된 몸짓으로 객석의 웃음을 유발하곤 하지만, 이윤정의 올림피아는 달랐다. 레가토와 비브라토가 살아있는 노래, 부드러운 인형의 몸짓, 그리고 호프만 앞에서의 사랑스러운 표정까지, 좀더 인간으로 착각할 만한 올림피아였다.

'호프만의 이야기' 3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 3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안토니아의 윤상아. 안토니아는 아주 입체적인 인물이다.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여성이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과 성공의 야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솜사탕처럼 달콤하다가도 우수가 드리운 윤상아의 음색은 귀족 여인 안토니아와 잘 맞아 떨어졌다. 작은 체구의 여인이 피아노 위에서 자신의 내면과 광기어린 투쟁을 벌이다 푹 꺾여 쓰러지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악마는 안토니아에게 결혼해서 안주하지 말라,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많은 부모들이 지금도 딸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다. 악마는 쾌재를 부르고 아버지 크레스펠은 절규했지만, 안토니아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노래를 부르며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

'호프만의 이야기' 4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 4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줄리에타의 오예은 역시 강렬한 매력을 뿜어냈다. 온몸이 꽉 찬 느낌의 소리는 줄리에타가 만만치 않은 여인임을 드러냈다. 다페르투토의 다이아몬드를 갖기 위해 남자들을 유혹해 영혼을 빼앗는 파티장의 고급 매춘부 줄리에타. 그녀가 한 순간이라도 호프만에게 진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호프만은 줄리에타 앞에 무력했다. 그림자를 빼앗겨 좀비처럼 숨만 쉬는 슐레밀을 보면서도, 시인의 지성이 아닌 미친 사랑에 빠져 자신의 영상을 주고 만다. 어리석은 사랑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했다. 슐레밀을 찌르고 줄리에타와 함께하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다페르투토와 함께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뮤즈의 김정미와 오예은이 부르는 ‘뱃노래’는 작품의 백미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악마의 유혹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까. 슐레밀이 죽는 장면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밤’이라는 합창이 울려 퍼질 때는 전율이 일었다.

악마는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린도르프 의원, 코펠리우스 박사, 닥터 미라클, 다페르투토로 모습을 바꿔가며 악마의 다른 모습을 연기한 양준모는 역시 대단했다. 시인을 경멸하는 린도르프, 자신의 작품이기도 한 올림피아를 파괴하는 코펠리우스, 안토니아를 유혹하는 닥터 미라클, 그리고 자신만만한 악마 다페르투토를 노래하는 양준모는 다양한 인물 속에 일관된 악마성을 유지하는 연기력을 펼쳤다. 호프만에게 마법의 안경을 팔 때에는 유머러스했고, 닥터 미라클이 크레스펠의 김철준과 대립하는 장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했으며, 줄리에타를 이용해 호프만의 영상을 차지했을 때는 자신의 계략을 과시했다.

'호프만의 이야기' 5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 3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전체적인 연출력, 영상미, 그리고 무대를 지배하는 음악의 조화가 대단한 작품이었다. 청중은 세바스티안 랑 레싱과 뱅상 부사르에 이끌려 호프만과 오펜바흐가 빚어낸 ‘기묘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호프만이 연애 실패담을 털어놓자 현재의 연인 스텔라가 등장한다. 호프만은 비로소 자신이 만났던 세 여인의 모습을 스텔라에게서 발견한다. 뮤즈는 호프만에게 “사랑의 시련을 통해 인간이 아닌 시인으로 거듭나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인 것 같다. 뮤즈는 호프만의 괴로운 경험들을 축복 받은 시련이라 칭하고, “인간은 사랑으로 성장하고, 시련 속에서 더욱 성장한다”는 친구들의 중창과 합창이 이어진다. 뮤즈도, 친구들도, 심지어 악마도 한 인간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인 것. 쇠도 담금질을 거쳐야 단단해진다. 호프만의 이야기는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다.

'호프만의 이야기' 5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호프만의 이야기' 5막 장면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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