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샌프란시스코 댄스필름 페스티벌 공식경쟁작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리뷰] 샌프란시스코 댄스필름 페스티벌 공식경쟁작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10.2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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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메인 이미지 ⓒ 황인모

[편집자 주] = 대구시립무용단(예술감독 김성용)의 댄스필름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Things That Make Us Move)>가 국내 작품으로는 최초로 샌프란시스코 댄스필름 페스티벌(SFDFF2022)의 공식 경쟁작(다큐멘터리 부문)으로 선정되었다. 대구시립무용단의 제78회 정기공연작(2020년 12월)으로, 극장이 폐관되었던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전 세계에 송출되었던 이 작품은 방영 당일에도 높은 실시간 시청률을 기록했었고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더프리뷰 2020년 12월 16일자 영국 무용평론가 산조이 로이(Sanjoy Roy)의 리뷰 참조), 2022년 골든 하베스트 필름 페스티벌(Golden Harvest Film Festival, 일본)에서 베스트 다큐멘터리 필름상을 수상한 바 있다.

빔 벤더스(Wim Wenders)의 <피나(Pina)>,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의 <미스터 가가(MR. GAGA)>, DV8 피지컬씨어터(DV8 Physical Theatre)의 <엔터 아킬레스(Enter Achilles)> 등 수작을 선보이며 세계 무용영화계의 유의미한 플랫폼 역할을 해온 샌프란시스코 댄스필름 페스티벌은 10월 28일부터 다음달 8일까지 극장과 온라인 동시 상영으로 진행된다. (샌프란시스코 축제 스트리밍 링크는 https://bit.ly/3esZrPc)

김성용 예술감독은 “팬데믹은 춤의 본질에 대해, 예술단체의 존립에 대해 무용수들과 더불어 함께 고민할 계기를 마련해주었었다. 댄스필름이라는 새로운 장르에의 도전을 결정했었는데 그 시도가 좋은 성과로 이어져 감사하다. 더 나아가 수상까지도 가능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며 소감을 밝혔다. 아래 기고문은 2020년 상영 직후 작성했던 글이다. 작품 관람에 길라잡이가 될 수 있기를, 더불어 춤과 신생하는 장르 댄스필름에 대한 사유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게재한다.

 

대구시립무용단 제78회 정기공연 리허설 현장 ⓒ 황인모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리허설 현장 ⓒ 황인모

팬데믹 위기에서 춤공연의 진위를 답하다

[더프리뷰=대구] 하영신 무용평론가 = 코로나가 창궐했고 세계의 극장들이 봉쇄되었고 그러나 영상을 경유하여 춤은 지속된다. 오히려 세계 각지로부터 여느 해보다도 많은 작품들이 송달되었지만, 위기와 고립의 국면에서 더욱이 절실해진 진정성과 가능성이라는 예술에의 의욕을 첨부한 이는 우리 작가 김성용이었다. 지난 12월 5일 우리 시간으로 밤 10시, 뉴욕과 런던과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세계의 도시로 발송되었던 작품 <무엇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가>, 그로부터 구해진 위안과 사유를 공유한다.

팬데믹 상황에선 춤작품을 영상에 위탁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세계의 춤작가들은 중계라는 이반적(離叛的) 형식을 감내해야 했다. 대부분은 작품의 규모를 축소하고 에너지의 운용을 단순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유려한 군무 편성이 강점이었던 네덜란드단스테아터(Nederlands Dans Theater)도, 극한의 몸성이 구동되는 작품세계를 구가하던 오하드 나하린도 앵글에 적합한 피사체가 되기를 자처했다.

뛰어난 기량과 조직력으로 유려한 군무 편성에 강점을 보이는 네덜란드단스테아터는 카메라의 운행을 고려하여 인원과 공간을 축소한 소품들로 가을 시즌을 치렀다. 규모가 크고 에너지의 운행이 박력 넘치는 스펙터클한 장면과 동작구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크리스털 파이트(Crystal Pite)와 알렉산더 에크만(Alexander Ekman)의 작품은 2인무 형식으로 재안무되어 올려졌고, 초연작들은 아예 중계를 형식적 조건으로 상정하여 미니멀한 구성을 취하거나(<Silent Tide>) 무대의 구획적 활용을 표현의 목표로 삼았다(<Fusions and Some Confusions>).

특유의 메소드 ‘가가(GaGa)’로 극한의 몸성을 펼쳐 응축된 생의 다각적 에너지를 만끽하게 해주던 나하린조차도 무한으로 근접해나가던 자신의 세계를 영화적 프레임 안으로 축조(縮組)하였다. 11월 온라인을 경유하여 발표한 신작 <YAG>에서 여섯 명의 무용수는 시선 집중적인 동선으로 움직이며 역할을 행위했을 뿐, 전작들에서의 무용수들처럼 열렬히 생의 역능을 실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절 작품들은 위축되는 세계 그러나 혹은 그러므로 강렬해지는 관계맺기에의 열망을 그려냄으로써 현 상황의 비극과 공명하며 시대의 위무라는 예술의 역할을 십분 감당해주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결국 임시의 방편, 차선책일 수밖에. 중계라는 기제(機制)적 변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작가는 빔 반데케이부스(Wim Vandekeybus)와 김성용이다. 어쩌면 비대면이란 상황은 자주 강제될지도 모르고 춤 스스로 자체의 미학을 초극(超克)하는 방향으로 나선지도 오래, 자의로든 타의로든 춤과 영상의 결속은 어차피 빈번한 현상이 될 것이다. 이들은 차라리 카메라를 적극 유용함으로써 이 시절의 작품을 만들어내기를 작정했다. 김성용의 고뇌가 유효하고 의미심장했다.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리허설 현장 ⓒ 황인모

코로나, 춤공연의 본질을 묻다

극장의 폐쇄로 인해 공연예술이 현장성(現場性, liveness)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작품이 진행되는 그 자리를 잃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기실 타 장르에서도 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열리고 외부대상으로서의 작품으로부터 어떤 성질과 상태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인바 이것이 소통의 전모일진대, 주매체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공연예술의 경우 사태는 특별해진다. 작품의 형국이 생명과 그 지속에 근거하여 전개된다는 것. 한 사람이 사람(예술)으로서 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지고 오는 것이고, 보는 이 역시 자신의 전(全) 경험과 기억을 통하여 그(작품)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연예술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생명성(liveness)을 체험하는 일과 다름없다. ‘살다(live)’라는 동사로부터 파생하여 ‘살아있음’을 지시하는, 말 그대로 현장성은 물리적 시공간 뿐 아니라 몸성(corporeality)을 함축한다.

특히나 서사로 견인되지 않고 몸의 기제로 펼쳐지는 컨템퍼러리댄스의 경우 그 내용 대부분의 실체가 몸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력의 구동, 삶의 지속으로서의 작품이라면 그 공연의 내용은 현장을 이탈해서는 대부분이 소실되기 마련. 게다가 몸 대(對) 몸으로 이루어지던 소통의 기제가 몸-카메라-몸으로 바뀌는 변혁 앞에선 이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상이 춤을 온전히 운반할 수 있는가’ ‘영상이미지로써 몸과 몸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태들을 완역해낼 수 있는가.’ ‘카메라의 지각으로 나의 감응을 대리할 수 있는가.’

춤은 고스란히 영상에 탑재될 수 없는 법, 영상이미지는 결코 춤에 일치할 수 없고 중계라는 형식으로는 현장에서 펼쳐지는 관람의 지극한 층위를 충족할 수 없으니 새삼 춤과 영상 그 본성상의 차이를 깨달은 한 해였다. 그럼에도 간혹 열렬한 춤의 장면들은 있었고 어쨌든 그것은 나를 사로잡았다. 어떻게?(어째서?) 생각해보면 영상이미지 관람의 강렬한 층위도 그에 ‘사로잡히는’ 일, 즉 몸적 작용이 벌어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기실 영상이미지를 근간으로 하는 장르들에서는 일찍이 동영상의 역동성으로부터 생명성 감지에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연구와 작업이 있어왔다. 동시대 예술작품들에 근거하여 고유한 예술론과 존재론을 전개했던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유가 대표적인데 그는 서사로부터 탈각하여 접속과 배치를 이루며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전사(傳寫)하는 이미지들의 집체물(集體物)로서의 아방가르드 영화들을 섭렵, 작열하고 난무하는 이미지 그 자체의 생명력에 주목하기도 했다(그 집요한 사유의 결과물이 현대영화의 미학을 떠받치고 있는 저서 『시네마』다).

현학과 감각의 세계에서 길을 잃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공연실황 중계의 그것처럼 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불충분한 영상도 아니고 영화나 비디오아트 등에서처럼 주체적인 영상이미지에 종속된 춤도 아닌, 다른 관계성으로 빚어져 춤의 또 다른 층위로 펼쳐지는, 영상이미지와 비등한 관계를 맺는 그러나 여전히 춤으로 성립 가능한 춤작품의 추구. 진작의 실험의지로부터 제기되었고 코로나로 인하여 재촉당한 그 대답은 이로부터 구해질 것이 아닌가.

 

대구시립무용단 제78회 정기공연 리허설 현장 ⓒ황인모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리허설 현장 ⓒ 황인모

춤추는 카메라와 춤의 지평을 열기

위와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첫 출품작을 내놓은 작가는 반데케이부스다. 영국 컨템퍼러리댄스계를 대표하는 단체 램버트(Rambert)로부터 아예 코로나 상황을 전제로 하는 적극적인 신작을 의뢰받아 창작한 작품 <내면으로부터(Draw from Within)>를 스튜디오 건물 곳곳에 포진한 다섯 대의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송출하였다(LG아트센터에 의해 우리 관객에게도 공개되었다). 장르 혼성적인 작업을 해오면서도 언제나 고강도 몸성의 춤으로 작품을 지배해왔었고 게다가 언젠가부턴 영화감독으로도 유의미한 작업을 증명해오고 있었기에 미래적 춤의 정체성을 그려낼 적임자로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는 게 낙점의 이유였으리라.

그러나 작품은 영화적 인상을 남겼고 그것은 춤적 오류로 발견된다(이미 전작에서도 그 미학적 변심이 발견된 바 있었다. 2018년에 초연되었고 2019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의 개막작으로 내한한 바 있었던 <덫의 도시(Trap Town)>에서는 연극과 영화와 가창장면이 행위와 영상이미지와 음악의 차원을 넘어서 구체적 장르의 실천으로 제시되어 춤의 입지는 좁아지고 그 밀도도 희석되었다). 그 자신의 단체 울티마 베스(Ultima Vez) 특유의 강밀도로 인용된 군무씬만이 춤적이었을 뿐 대개의 시간은 구성적 영화의 장면들로 채워졌고, 카메라는 영화적으로 능수능란했다. 영화감독으로서 영상이미지를 다루어봤던 반데케이부스의 경험이 작품에 영화적 뉘앙스를 강화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술영화와 실험영화들이 진작에 선취해놓은 춤의 지경을 능가할 수 있었나? 이런 질문을 생략할 수는 없다. 특유했던 강밀도적 춤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구시립무용단 제78회 정기공연 리허설 현장 ⓒ황인모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리허설 현장 ⓒ 황인모

반면 김성용은 방송용 카메라를 선택했다. 그 선택이 자의적이었는지 여건상의 성립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어차피 그는 미장센을 다룰 줄을 알고(김성용은 대구시립무용단의 제76회 정기공연작 <The Car>(2019)에서 아트디렉터 다비 고샤르(David Gauchard)와 비디오아티스트 다비 모로(David Moreau)와의 협업을 통해 춤과 오브제와 영상과 빛과 색의 엄밀한 조율을 연출해낸 바 있다. <군중>(2018), <DCDC>(2019) 등 전작들에서도 확인되듯 시각예술적 감각의 완성도는 그의 작품세계의 특징을 이룬다) 춤과 영상이 어느 감도에서 만나야 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는 작가다(코로나 사태 초기에 발표된 대구시립무용단 제77회 정기공연작 <존재-더 무비>는 댄스필름의 형식을 취했다. 이 작품에서 춤은 영상과 동격을 이루기 위해 차가운 추상, 즉 수평과 수직을 축으로 질서와 균형을 추구하는 몬드리안(Piet Mondrian)풍 순수추상의 감도로 연출되었다).

상대적으로 작가적 자의식이 희박했을 카메라를, 반데케이부스처럼 편집적으로 유려하게 운영하지 않음으로써, 김성용의 시선으로서의 카메라는 ‘키노아이(Kino-Eye: 직역하면 ‘영화의 눈’이 되는 이 단어는 러시아 출신의 실험주의 영화작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장편영화 제목이자 미학적 선언문의 제목이다. 그 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키노-아이(영화의 눈)다. 나는 기계의 눈이다. 기계인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나 자신을 인간의 부동성에서 해방시킨다.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물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멀어진다. 나는 그 사물들 밑을 기어 다니고 그 위로 기어 올라간다. (중략) 나의 길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적 미학을 성취할 수 있었다.

춤추는 무용수들을 쫓으며 카메라는 스스로 춤추는 존재가 되었고 심지어는 발견되지 말아야 할 어느 구석에서 선연히 목도됨으로써 명멸하는 춤적 편린들과 병렬하며 작품이라는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반데케이부스의 카메라처럼 영화적으로 능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트레킹 워킹이 방대한 세계를 미시적이고 근시안적으로 오독하는 우리의 시야와 닮았기 때문에, 급기야는 스스로 미장센의 구멍을 뚫어 작품 안에 작품의 바깥을 남김으로써, 그렇게 그 카메라를 키노아이로 기능시킴으로써 김성용의 작품은 더욱 풍성한 내재면의 카오이드(chaoïde: 카오스적 단면을 일컫는 들뢰즈의 용어. 들뢰즈는 예술, 과학, 철학을 카오스(세계)를 절단함으로써 산출되는 현실로 보았다. 생성철학자로서 그는 인간은 예술과 과학과 철학을 통하여 그 자신의 생을 생성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로 베어질 수 있었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중간쯤에서 새롭게 출현한 모큐멘터리(mockumentary)처럼 영상이미지와 춤 사이 어디쯤에서 발견된 이질적인 춤이미지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그렇게 무용수들의 세계, 스태프들의 세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세계가 될 수 있었고, 그래서 삶 그 자체로서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그저의 유희와 잉여가 아닌, 복구하고픈 삶의 조각으로서의 예술작품 말이다.

 

대구시립무용단 제78회 정기공연 리허설 현장 ⓒ황인모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리허설 현장 ⓒ 황인모

김성용의 카오이드, 춤으로 베어낸 세계의 단면

설정에서의 유사성을 지녔지만 반데케이부스의 작품은 영화라는 기존하던 장르로 흡수되었고 김성용의 작품은 컨템퍼러리댄스라는 지형에 또 하나의 지층을 얹었다. 두 작품의 향방은 서사의 담지 여부로부터 갈린 듯하다. 반데케이부스의 작품도 극영화의 본격적이고 유기적인 서사구조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과 탄생을 둘러싼 단편적 에피소드들이 어쨌든 선형(線型)적 서사의 얼개로 엮임으로써 무용수들은 어떤 역할이 되고, 공간은 서사에 기여하는 구체적 장소가 되고, 카메라는 관찰자로서의 관객의 눈을 대리하는 영화적 도구로 다루어진다.

반면 김성용은 자신의 서사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무대를 잃은 자신의 무용수들에게 무용단 상주공간으로 익히 친숙한 대구문화예술회관을 펼쳐주고 그 삶의 부분공간을 지평으로 출 수 있는 춤, 추어지는 춤을 찾기를 요청했다. 무용수들은 현재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에의 의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일상의 단면을, 짐짓의 유머마저를 꺼내왔다. 무용수 개개인의 삶으로부터 출현한 단면들은 김성용의 구성에 의해 하나의 통합적 세계로 구축되었다.

작품은 로비에서 시작해 관객석이 비워진 현재의 문제적 무대에서 끝난다. 작품의 시간은 무용수들과 관객들이 웅성거리고 매표원과 안내원과 물품보관소 담당직원이 제 할 일을 하던 과거의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공연이 금지된 무대 위 지금의 박리된 시간으로 흐른다. 그 사이 계단과 통로와 조명탑과 화장실과 유리통창과 조명이 매립된 벽면 등 극장의 구석구석에서 삶의 반영이자 염원으로서, 조형된 예술로서의 각양각색 춤들이 연쇄한다. 수선스러운 일상의 직유적 장면들로부터 잘 훈련된 무용수들의 몸으로써만 조형 가능한 은유적 장면들까지, 작품에는 실제적 삶과 예술의 순간들이 출몰한다. 삶의 장면들은 관객을 추억하게도 만들고 안타깝게도 만들고 웃게도 만들고 일상적 삶으로의 복구를 다짐하게도 만들었고, 그 삶에 교직(交織)하는 예술적 장면들은 구체적 일상을 메타포와 판타지로 환치함으로써 일상을 초과하며 사유와 치유의 시공간을 열어주었다.

일상과 예술과 사유의 순간들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생(生)을 이루는 법, 김성용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삶과 예술이 서로를 지탱하는 여전히 지속가능한 세상을 꾸렸다. 생의 일면(一面)들을 품은 전(全)시간, 극장 지형 안으로 세계가 응축되었고 거기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의 삶과의 접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데케이부스의 작품이 비록 그것이 알레고리적이었다고는 하나 한 사람의 시선으로 닫힌 반면 김성용은 작품 안에 누구라도 주름을 펼치면 자신의 시선과의 연결이 가능한, 범용 가능한 가능적 서사를 접어놓았던 것이다. 춤으로 베어낸 세계의 단면. 김성용의 작품은 일상과 예술 사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 비극과 희극 사이, 모든 삶 혹은 삶의 모든 순간이 공속(共屬)하고 실상과 판타지가 내속(內屬)하고 있는 카오스적 세계의 단면이 되었다.

 

대구시립무용단 제78회 정기공연 리허설 현장 ⓒ황인모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리허설 현장 ⓒ 황인모

그리하여 우리에게 당도한 것, 김성용의 전망

팬데믹은 모두에게 현대적 삶과 공동의 운명에 관해 질문을 던졌고 춤공연에게는 특히 송곳 같은 물음이 되었다. 예술은 소통과 전위 사이의 무수한 입장들이지만, 가장 즉물적인 소통 가능성을 지닌 예술,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로서의 춤예술에 있어 소통은 더욱이 그 내용이자 형식이요, 기능이자 의무가 아니겠는가. 소통의 결과로서도 두 작품은 다른 길 위에 서 있다.

반데케이부스는 언제나처럼 삶의 실상을 폭로했다. 작품 속 기자처럼 탄생과 죽음을 수선스럽게 리포트함으로써 망가진 문명 그리하여 탄생이 곧 위험에 처함과 등치를 이루는, 죽음 직전의 일각(一刻)까지도 평화로이 통과할 수 없는 그런 삶을 그림으로써 현실의 곤고함을 들추어낸다. 데뷔작 <What the Body Does Not Remember>(1982)나 <Speak Low, If You Speak Love>(2015) 등 대표작들에서도 그는 부박한 한 겹 문명 아래의 실재계(實在界, the Real)로 우리를 초대했었다. 그 특유의 항진된 춤들은 삶의 쟁투적 국면을, 동시에 원천적 생명력을 감각하게 했었다. 그러나 극영화의 외피를 걸침으로써 <내면으로부터>는 그 중의(重義)의 가능성을 상실했다. 지금의 현실과 딱 들어붙은 작품으로부터 나는 일말의 위안도 구하지 못했다.

반면 김성용은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삶은 지속하고 있는 중인 거야. 작가의 페르소나로서 각각의 장면 사이를 뛰어다니며 연결하는 마르코(마르코는 무용수의 실제 이름이다). “어디 가 마르코?” 각자의 장면을 완결하며 무용수들은(그리고 보는 우리는) 재차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대답은 없지만 온화하고 착한 그의 종종걸음을 쫓으며 관객은 강제된 단절을 겪는 이 시절에도 누구의 생과, 누구의 예술과 만날 수 있었다. 엉거주춤 친근했던 종종걸음으로 작품을 안내하던 마르코가 스르르 눈빛을 바꾸고 진지하고 열렬한 춤을 춘다. 그로써 마침내 극장 문이 열리면 관객석에 드문드문 앉아있던(이는 현실을 직유함과 동시에 심리적 공동(空洞)을 은유했고) 무용수들은 “0000년도에 입단한 000입니다.” 자신을 호명하며 무대로 올라선다.

<DCDC>(2019)로부터 인용된 이 장면은 전작에서보다 그 공명이 한결 깊어졌다. 무용단의 춤으로써 무용단의 역사를 축하하던 그 작품에서 그 장면은 각자의 생, 그 생의 결집체로서의 단체에 대한 자긍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 장면은 “0000년도에 태어난 000입니다.”로 감응되며 모두의 생으로 수렴되었다. 굳건히 무대를 딛고 선 무용수들의 결기, 작품은 그 단호한 직립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보여주지 않았어도 그 다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극장이 열리면 그들은 보다 더 힘차게 춤을 출 것이고, 다시 세상이 열리면 우리는 보다 더 열렬한 생을 살리라.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게 될 거야. 김성용은 송곳 같은 질문에 지금을 덮고 있는 이 두터운 비감(悲感)을 뚫을 송곳 같은 전망을 답했다. 스스로 전망을 품었을 때 예술작품은 세상의 치유제가 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독한 시절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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