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동시대를 위무하는 오래된 애가(哀歌) 두 편 - 시댄스와 ACC
[공연리뷰] 동시대를 위무하는 오래된 애가(哀歌) 두 편 - 시댄스와 ACC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2.11.2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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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부아르(Mouvoir)

[더프리뷰=서울/광주] 하영신 무용평론가 =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를 주최하는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는 서울에서 주무대를 기획하지만 지역축제와 아트마켓, 제작극장과도 연계하여 우리나라 곳곳에 세계의 춤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올 해 시댄스의 중개로 포르투갈 조나스&란더(Jonas & Lander) 무용단의 <파두를 두드려라 Bate Fado>가 전주세계소리축제(9월 23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를 찾았고, 시댄스의 폐막무대를 채웠던 이스라엘 솔 댄스 컴퍼니(SOL Dance Company)의 <TOML(Time of My Life)>는 대구(제8회 세계안무축제. 9월 27일, 아양아트센터)도 방문했다.

올 해 시댄스의 메인 테마였던 ‘춤에게 바치는 춤들’의 주요 다섯 작품 중 한 편이었던 무부아르의 <Hello to Emptiness>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sia Culture Center, ACC)과의 공동 창·제작에 힘입어 <공허와의 만남(Picture a Vacuum)>이라는 초연작으로 거듭나 광주에서 첫 무대를 펼쳤다. <Hello to Emptiness>에서 탐구되었던 ‘애도’는 우리네 한(恨)과 부대끼며 ‘비탄’으로 깊어졌으니, 그 심화를 각별히 따로 소개한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필자는 컨템퍼러리댄스를 좀 일찍 접한 편에 속한다. 20세기 말미(末尾)와 21세기 모두(冒頭) 사이 몇 차례의 서유럽 방문에서 ‘컨템퍼러리댄스’라는 용어의 사용이 확정되기 이전, 아직 각각의 나라들이 ‘뉴 댄스(New Dance)’나 ‘창작춤(Danse Création)’ 등의 표기로 낯선 춤들의 출현을 관망하고 있던 그 즈음에 조우했던 생경한 춤들은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다. 일단은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 등 우리나라 교육체계에 의해 고정되었던 그 삼분법적 인식에 의하면 도통 ‘무엇’으로 재인(再認)할 수 없는 춤사위에 충격을 받았고, 최전방의 미감과 형식들 자체로 춤과 섞이며 무대 위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등극한 타장르에 새로운 자극을 받았었다.

그 새로운 경향들이 양식상의 변혁일 뿐 아니라 무용예술의 질적 도약으로 감지되었기에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가늠해보고 싶은 의욕을 지니게 되었다. ‘당대’를 지시해온 ‘컨템퍼러리’라는 용어를 양식으로 한정하여 그 미학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저항이 꽤 오래 있었으나(지금도 한편에선 주장되고 있다) 어쨌든 특정 춤들이 유행하였고(그 춤들은 무용예술 양식사의 마지막 단계인 ‘포스트모던댄스’와는 변별적이었고) 그에 대하여 ‘컨템퍼러리댄스’라는 용어의 현장적 사용이 보편화되었으므로 그로부터 나는 ‘작가주의’와 ‘몸성(corporeality)’과 ‘실재(the Real)’라는 키워드로 춤의 변화를, ‘해체/탈구축(deconstruction)’ ‘탈(脫)서사·재현’ ‘융복합’ ‘생성’ 등의 키워드로 춤작품의 동시대적 변천을 추적할 수 있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 - 철학이라는 작업을 황혼 후에야 날개를 펴는 올빼미에 비유한 헤겔의 말처럼 현장의 상황들을 종합하는 일은 언제나 현상들의 사후(事後)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간신히 정립한 ‘컨템퍼러리댄스’에 관한 나름의 정의(하나의 견해임을 다시 한 번 피력하고 싶다. 분류가 곧 해석이다)가 오래지 않아 유효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예감한다. 근자의 춤들은 나를 당혹시킨다. 춤들은 다시 경계를 넘어서고 있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질적인 것들과 접면함으로써 도래할 역사의 서장(序章)을 기술해나가기 시작했다. 2000년에 창단한 자신의 단체 무부아르(Mouvoir)를 이끌며 통섭한 예술의 하위장르들로 인문학적 고찰을 수행하고 있는 슈테파니 티어쉬(Stephanie Thiersch)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Stephanie Thiersch ⓒ Mouvoir
슈테파니 티어쉬(Stephanie Thiersch) ⓒ Mouvoir

융복합에서 학제간으로, 티어쉬의 큰 보폭

반세기 이력을 넘어선 컨템퍼러리댄스의 융복합적 성향은 이제 예술 하위 장르간의 교직(交織)을 넘어서 예술 밖 다른 분야와의 통섭을 지향하는 ‘학제간(inter-disciplinary)’이라는 보다 확장적이고 개방적인 수식어를 장착한다. 무부아르를 이끌고 있는 안무가 슈테파니 티어쉬는 이력의 한 칸으로 인문학을 제시하곤 하는데 확실히 인문학으로 특화된 그녀의 관점은 작품마다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으로서 고유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제23회 시댄스(팬데믹 환경에서 영상매체로 전송 가능한 춤작품들을 소개하였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 <융합의 광경(Spectacles of Blending)>에서 확인한 진술에 의하면 그녀는 사회적 위계들의 해체를 그린 전작 <이미지들의 전투(Bilderschlachten/Batailles d'Images)>(2019)로부터 그렇다면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련하는 <군도(群島, Archipel)>(2020/21)나 <몸의 섬들(Insular Bodies)>(2020-2023)은 그녀가 탐구하는 유토피아, 즉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계, 그 세계 내 존재방식이 될 수 있는 관계성의 변형을 구현하는 작업으로 읽힌다.

티어쉬가 건축한 장래(將來)적 세계 <군도>와 <몸의 섬들>에서 인간은 세계와 분자적 단위에서 유기체적 연대를 형성하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모색한다. <융합의 광경>에서 티어쉬는 자신이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90년대에 사이보그에 관한 연구를 통해 종(種)적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을 펼쳐 학계와 문화계에 반향을 일으킨 인문학 연구자. 그녀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커뮤니케이션학, 정신의학, 정보처리에 관한 행동과학 및 정신약리학적 이론들과 연계되어 있는” 사이보그적 존재다)의 “아기가 아니라 친족을 낳아야 한다.”는 혁신적인 주장에 경도되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과연, 자체적으로 사운드를 발성(發聲)하는 조형물과 관계를 맺는 퍼포머들의 행위를 통해 음악과 안무의 동시적 창출을 구현하는 <군도>와 마른 고목·기암·모래·바닷물 등 섬들의 기관(器官)과 관계하는 인간의 나신들을 그린 <몸의 섬들>은 변이(變異)적 생성을 선언한다.

확실히 인류는 모든 공생관계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해온 과잉된 자의식, 그 이기적 문명을 물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성을 덜어낸 인간 존재, 춤을 덜어낸 춤작품에 익숙해지고 그로부터 어떤 충족감을 느끼는 날들이 오기는 할까? 공백은 아직 명백한 공백이다. 그간 티어쉬를 지배하는 공간감은 ‘섬’, 미지 사이 간신한 한 점(占)이었다. 채워지지 않은 것, 알 수 없는 것들은 불안하고 불안에 잠식된 영혼은 비애감에 젖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올 가을 우리나라 무대에 그녀는 공백들 ‘emptiness’와 ‘vacuum’ 사이에 들어차있는 비가(悲歌)를 몰고 왔다.

'Hello to Emptiness' (c) 옥상훈

비극의 원형으로 빚은 엘레지 <Hello to Emptiness>

9월 24일과 25일 양일에 걸쳐 시댄스의 무대(토월극장)에 펼쳐진 <Hello to Emptiness>에서 티어쉬는 고대 그리스의 애가(哀歌)인 ‘모이롤로이(μοιρολόγια)’를 근간으로 75분간의 제의적 시간들을 펼쳤다. 다국적의, 음악과 춤의 장르 교차적 능력을 소지한 다섯 퍼포머는 고대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적 예술을 수행한다. 인문학 외에도 미디어 아트를 공부(시댄스 프로그램과 단체 홈페이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적 단어 ‘study’는 학위 소지를 표지한다. 학제 안에서 학습되는 예술의 한계가 어떻게 본작의 공백으로 연루되는지는 차차 이야기하겠다)했고 그래서 본작의 무대 디자인 보직까지 도맡은 티어쉬의 시각예술적 능력은 탁월했다. 농밀한 어둠, 묵직한 비애감이 들어 찬 공간에 죽음과 재생과 탄생을 매개하는 흙 둔덕 물의 웅덩이를 파고 특유한 주름으로 고대 그리스를 환기해내는 의상을 걸친 퍼포머들로 하여금 애도의 시간을 시연케 하는, 예술감독 티어쉬의 역량에서 고유하거나 특유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오히려) 시각예술 부문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내역, 의미화에서의 부분 탈락과 그로 인한 공감 소실이다.

‘애도’라면 상실로 인하여 쇄도하는 힘겨운 감정들을 소진하여 내면에 남은 생을 견디어낼 수 있는 의욕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과정적 절차다. 누구라도 어느 마디 얼마간 무엇에 대해서든 애도의 시간들을 치르지 않고도 생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의 위무와 치유 능력 중 중요한 항목은 애도 그 과정의 완수를 거드는 일이었다. 예술론의 원전(原典) 격인 『시학(Poetics)』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이라는 형식으로부터 카타르시스의 해방적 기능을 각별히 주목한 연유다. 티어쉬도 고대 그리스의 원형들에 기대 애도에 도전한다.

'Hello to Emptiness' (c) 옥상훈

그런데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더할 수 없이 상처투성이인 사람들, 굽이굽이마다 전쟁과 사회적 참사, 죽음의 옹이가 박혀있는 역사 그 대개의 장면들에서 좌절된 납득으로 작별해내지 못한 죽음을 껴안고 사는, 물려 안은 한(恨)에다 집단적 트라우마마저 짊어지고 곤궁히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애도와 카타르시스의 기제는 얼마나 절실하겠나. 적어도 나는 실컷 울고 싶어 부러 뺨을 내어주는 심정으로 티어쉬의 작품을 맞았다. 그러나 나는 울지 못했고 심지어 수시로 울컥해지는 일상의 단면들만큼의 감응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작품 내 슬픔을 ‘구경’하는 이상한 처지에 당황해야 했다. 왜? 퍼포머들의 연행 수위가 확연히 충천한데도 어째서 그들의 비애는 나에게로 감화되지 못하는 것일까?

모두의 속살인 슬픔을 덮은 시간과 문명의 두터운 각질을 본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온 슬픔의 질감은 (나에겐) 이질적이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문명의 기원이었고 일찍이 그 변종들과 섞이어 살아온 유럽의 환경에서 작업을 해온 작가로서는 예상치 못한 오차일 것이다. 더불어 형식적 오류가 발견되니, 번역되지 않은 가사(歌詞)는 그들이 노래하는 슬픔의 반편을 괄호 친다. 피상적으로 음악은 만국의 언어라고 이해되지만 악가무일체의 연행에서 가사는 의미 전달 기능은 물론 문학적 역량을 수행한다(가사는 종종 그 자체로 시(詩)이기도 한 것이다). 어둡고 무거운 보랏빛 튜닉을 입은 우리나라 노인 합창단원 여덟 명으로 구성된 코러스(이제는 음악적 표현 방식의 일종으로 여겨지지만 코러스는 본디 상황의 이해 즉 서사의 전개와 더불어 감정의 증폭 유도를 위해 고안된 극적(劇的) 장치였다)가 <아리랑>을 불러 완역되지 못한 의미들을 보충해주었지만, 티어쉬의 손을 거친 아리랑은 외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아리랑들의 감도와는 다르다.

멜랑콜리(melancholy), 애도의 시간이 충분치 않았거나 회피한 탓에 이별을 완성치 못한 자가 껴입게 되는 만성적인 우울감과 무기력증, 서구의 애상(哀傷)은 처연하고 개인적이다. 그러나 우리네 한(恨)은 소위 ‘글루미(gloomy)’한 ‘무드(mood)’인 서구의 비애감과는 사뭇 다르다. 상실감과 분노와 후회와 미움과 원망 등 슬픔으로부터 변주되는 각종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에 응어리지고 뼈에 사무치는. 대상적인 그리하여 심지어는 용서에 다다르고 싶어지는, 극복하여 마침내 승화(昇化)를 이루어내지 않으면 스스로의 덜미도 낚아채버리고야 마는 통각(痛覺)적 실체.

차이나는 슬픔들. 티어쉬가 제시한 생경한 슬픔과 감압(減壓)된 슬픔, 표집되어 아직 체화(내면화)되지 못한 슬픔들은 나의 몸으로 옮겨오지 못하고 탐구의 대상적 거리를 갖는다. 끝내 비감은 항진되지 못하고 나의 애도는 실패로 끝났다.

'Picture a Vacuum' 공연 장면 (c)옥상훈

한(恨)을 더불어 비탄으로 승화하기, <Picture a Vacuum>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의 공동제작 기회를 통해 티어쉬는 슬픔의 탐구를 진척시킬 수 있었다. 10월 14일과 15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연행된 <Picture a Vacuum>에서는 만신(萬神) 민혜경(황해도 무형문화재 1호 만구대탁굿 전승 교육사)과 한국 창작춤 작가 장혜림(99아트컴퍼니 대표)이 가세, 전작에 한의 질감과 강도를 더해 강화된 슬픔이 비탄과 승화의 경지로 이행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신작의 골격은 민혜경이 주도하는 굿이다. <Hello to Emptiness>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탄생을 순환시키는 물웅덩이를 둔(오히려 무대 복판으로 옮겨진) 무대. 이번에는 시간의 축(고대로부터 동시대)과 공간의 축(서양과 동양)을 교차시켜 용적을 넓힌 슬픔의 공간에서 퍼포머들은 어떤 대리자들로서 슬픔의 원형질들을 풀어놓는다(모이롤로이의 장면들은 <Hello to Emptiness>로부터 원용된다).

'Hello to Emptiness' (c) 옥상훈

이 작품에선 퍼포머들의 발화는 언어적 제기능을 한다. 자기연민을 포함한 측은지심의 언사(言詞)와 무가(巫歌)로 퍼포머들의 해원(解冤)을 이끄는 민혜경의 말들은 어차피 우리 몸에 기입되어 있는 유전자적 언어. 무대 위를 폭주하며 현대문명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 젊은 여성 퍼포머의 통렬한 프랑스어 속사포도 자막 처리되었으니, 이제 슬픔의 정황들은 제법 구체성을 띤다. 그리하여 애도의 재현과 고증으로서의 <Hello to Emptiness>의 한계는 과정적 감정들의 현행화와 초월의지로 증폭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장혜림이 추어낸 살풀이는 본작의 의미맥락상의 방점이 되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서구의 퍼포머들은 놋다리밟기와 강강술래로 연대하는, 치유와 극복의 다른 방식을 몸으로 익힌다(본래의 연원으로부터 탈구되는 이 민속놀음의 재해석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논쟁의 여지는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작품은 굿의 구조를 취한다. 망자를 불러 달래어 귀천(歸天)시킬 때, 산 자의 감정들도 표출되고 기승(氣勝)하여 해소되는 절차를 밟는다. 그 작별의 절차를 완성시키기 위해 우리의 만신이 나선다. 장혜림과 김경무가 양 끝을 잡아 당기고 흔드는 길베의 사이에 서서 민혜경은 이승과 저승의 엉킴을 풀고 가른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머지 퍼포머들이 바닥에 앉아 가랑이를 벌려 슬픔을 분만함으로써 애도의 절차는 완결되었다.

민혜경 만신 (사진=민혜경)
민혜경 만신 (사진제공=민혜경)

티어쉬는 한으로 빚은 비탄을 유럽의 무대로 이송하기로 했다. 프랑스 남부 님 극장에서 공연(Théâtre de Nîmes, 11월 8일과 9일)하는 <Hello to Emptiness>에 민혜경과 장혜림을 동반한다. 나는 월경(越境)하는 작품을 따라 몇 가지 우려를 연장한다. 민혜경의 굿은 연행(演行)을 넘어서 수행(修行)의 실천적 강도를 획득할 수 있을까? 티어쉬가 표집한 슬픔의 세그먼트들은 총화(總和)될 수 있을 것인가? <Picture a Vacuum>의 대단원은 시선의 이중구조를 지녔었다(막판의 천도(薦度) 굿거리 장면에서 나머지 퍼포머들은 무대 안쪽에서 관객과 마찬가지로 민혜경의 연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럽 관객들에게도 첨부된 우리네 한은 나에게 모이롤로이의 장면들이 그러하였듯 아마도 이국적 취향이거나 즉결되지 못하고 해석의 과정을 요하는 탐구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Picture a Vacuum' 공연 장면 (c)옥상훈

‘고독이 몸부림 칠 때’라는 익숙한 수사(修辭, rhetoric)가 말하듯 원천적인 감정의 발현은 몸적 차원에서 벌어진다. 춤은 바벨의 언어가 지시하지 못하는 초과분들을 담지하는 원형적 언어이고, 그래서 나는 강화된 몸의 언어, 충혈된 춤으로써 존재함(being)을 증빙해내는 직감적인 컨템퍼러리댄스가 좋았다. 들뢰즈도 현대적 예술을 ‘감각의 블록(un bloc de sensations)’이라 특징지었다. 예술작품의 체험에서 기대될 수 있는 감화와 변용의 작용(affection)이 일원론적 몸의 지평에서 펼쳐짐을, 감각과 사유의 그 동시다발적인 분리불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올 가을 춤들은 컨템퍼러리댄스의 경계를 월담해 먼 길을 나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다시 10.29 참사, 또 하나의 상흔이 새겨진다. 공감 능력을 상실한 자들로 비극은 더욱 깊어진다. 슬픔 앞에서 슬픔에 겨워지기가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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