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쓰다-2] 춤과 정치
[춤을 쓰다-2] 춤과 정치
  • 박성혜 무용평론가
  • 승인 2022.12.3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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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정치와 무관한 순수예술인가

[더프리뷰=서울] 박성혜 무용평론가 = 순수예술은 정치와 무관하고, 언제나 순수함을 고수해야 하는가? 이 명제는 언제나 예술가에게 직면하는 문제이다.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 않은 열망과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의식은 언제나 창작의 한복판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현실 반영은 어떻게 보면 대중적인 타협인 것 같아 예술적 지향점을 포기하는 것 같고, 순수함만 고집한다면 너무 세상과 멀어진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앞선 사례들을 통해 춤에서 현실은 어떻게 작동했고 반영되었을까를 살펴보면 조금은 참고가 될 것 같다. 그것도 원형이 선명하고 정확한 형식 구현을 중시하는 클래식 발레에서 본다면 말이다.

발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민속춤들이 다양하게 결합하여 하나의 볼거리이자 이벤트물로 성장한다. 여기에는 16세기 황금기를 이끈 피렌체 공국의 메디치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존재하면서 정략결혼과 함께 전파되는 하나의 유럽 궁중문화로 자리 잡는다. 이후 발레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예술적으로 독립된 장르로 성장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발레 강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어떻게 발레 강국이 되었을까?

우선 러시아는 발레를 예술이기 때문에 육성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입을 결정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러시아 개혁을 이끈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가 존재한다. 그는 서유럽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를 개조하기 위해 제도를 개편하고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다.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직역하면 ‘성스러운 페테르의 도시’라는 뜻인데,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도시는 늪지대를 개간해 오늘날 도시계획의 개념과 과정이 그대로 진행되어 건설된 일종의 기획도시다. 표트르 1세는 그곳에서 서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그중 하나가 세련된 프랑스 궁중문화였고 이는 서유럽 황실과의 외교와 교류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귀족들의 교양수업이기도 했던 승마와 펜싱과 비슷한 격인 발레를 에티켓 교육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에는 당연히 러시아 귀족들의 집단적인 반발이 있었고, 더욱이 러시아 정교와 토속신앙에 길들여진 지방 토후들과 귀족들의 거부감은 매우 심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이들의 반발을 칙령과 강한 규율로 엄벌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자들의 수염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남성미의 상징이자 전통이기도 했던 긴 수염을 고수했고 표트르1세는 이에 ‘수염세’를 매기는 것으로 대응했다. 뿐만 아니라 궁중에 드나드는 조신들은 수염을 깎아야만 했고 서구적 예법을 배워 궁중행사에 격식 있게 참석해야만 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건너온 발레 마스터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발레 스텝을 가르치고, 서유럽식 행동거지들을 몸에 익히게 하는 일종의 교양 교사로 활동했다.

수염세 (사진제공=박성혜)
수염세

그런 의미에서 귀족 자제들의 교육기관인 제국학군단의 교양 수업으로 시작한 발레 교육이 확대되어 발레 아카데미로 발전한다. 당시의 러시아는 대학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차르(황제)는 이러한 이유로 그나마 효율적 교육이 가능한 제국학군단의 사관 후보생들에게 발레를 가르치도록 했다. 이들은 군사 뿐만 아니라 추후 외교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인재로 판단되었기에 러시아 전통문화와 비교해 생소한 발레에 대한 반발이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필요에 의해 수용했다. 당시 프랑스 황실의 후원을 받아 주도적으로 발레를 가르치던 마스터들이 이 도전에 응했는데 장-바티스트 랑데(Jean-Baptiste Landé)가 1734년 정식 교과도 아닌 일종의 특별 수업으로 시작했다. 성과는 6개월 만에 나타나고 곧장 정식 교과로 승격한다. 이에 발 빠른 마스터는 당시 차르였던 안나대제(재위 1730-1740)에게 청원서를 작성한다. 학생들이 얼마나 변했고 발레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아카데미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안나대제는 발레 아카데미를 허락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 아카데미의 시작이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 발레의 중심이 된 발레단과 극장 설립의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 발레의 모든 것은 이러한 정치적, 군사적 목적으로 군인들의 교양 함양과 서구문물 수용의 일환으로 창설되고 시작된 것이었다.

루이 14세의 초상으로 당시 귀족들의 의복은 반바지에 스타킹을 착용했다.
루이 14세의 초상. 당시 귀족들의 의복은 반바지에 스타킹을 착용했다.

발레리노는 흰색 스타킹을 왜 입을까

발레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아니, 사진이나 영상만으로라도 봤다면 제일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남성 무용수가 입은 흰색 타이즈일 것이다. 허리 아래부터 발끝까지 몸에 꽉 끼는 흰색 타이즈는 둔부뿐만 아니라 앞부분까지 그대로 노출되어 보기에 상당히 민망하다. 이것을 풍자한 국내 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 <발레리노>가 등장, 중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감추는 장면을 통해 웃음을 선사하는 연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발레에서 남자 출연자들은 언제부터 왜 이런 옷을 착용했을까?

여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존재하는데, 처음 발레가 등장했을 때는 남자들이 주도적으로 추었고 무대 또한 여성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귀족들이 주로 입던 스타킹을 신고 무대에 올랐다. 물론 상의가 길었고 무릎 위까지 가려졌다. 하지만 이 복장이 변한 극적인 이유에는 발레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은 급기야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발레의 최대 후원자의 종말이기도 했다. 발레 마스터들은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아직은 혁명의 위험에서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덴마크와 러시아 등 타국으로 떠난다. 그래도 발레의 중심은 파리라는 믿음으로 몇몇 발레 마스터들은 극장을 지키고자 했고, 이를 위한 정치적 판단과 결정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겨야만 했다. 실제로 격변의 혁명기 시절 왕당파로 몰린 발레 무용수들 중 몇몇은 처형을 당했고 공화정 옹호자들과 왕당파 모두 언제든지 처형의 명분을 가진 무용수들의 명단을 가기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자 극장은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반겼다. 나폴레옹 스스로 권위와 전통을 중시하면서 발레에 대한 후원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발레 마스터들도 빠른 변모를 시도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복장의 변화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군대를 혁신적으로 개편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최고의 군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군복이었고, 1882년 시행된 바르댕 규정(the Bardin Regulations)에 의한 정규군 군복은 효율성과 아름다움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에 극장의 발레 마스터들도 호응을 하는데 짧게 변형된 연미복 형태의 상의와 흰 반바지에 흰색 스타킹의 군복을 착용하고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 복장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군복 중 여름에 입는 일종의 하복(夏服)이었는데, 새로운 공화정과 황제의 탄생을 기리면서 프랑스 군복에 대한 발레 마스터들 나름의 경의의 표시였다. 여기에 군복이 지닌 활동성 덕분에 춤추기 편한 주요 복장이 되었고 흰색 반바지와 흰색 스타킹은 이후 춤추기 편한 기능성으로 인해 하나로 연결된다.

18세기 프랑스 발레에 출연한 남성 무용수의 복장은 귀족 복장을 그대로 재현했다.
18세기 프랑스 발레에 출연한 남성 무용수의 복장은
귀족 복장을 그대로 재현했다.

여기에는 당시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극단적인 옷차림도 한 몫한다. 풍속사에서 언급된 유럽 남성 복장은 화려했고 특히 염색한 옷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임을 뜻한다. 예를 들어 천연염료로만 옷을 염색할 수밖에 없던 당시로는 구하기 힘든 염료, 가령 파란색은 왕이나 극소수의 귀족만 착용 가능한 색이다. 그래서 자신을 적극 표현하려는 방편으로 화려한 의복을 착용했고 심지어 남성의 주요 부위만 강조하기 위해 해당 부위만 눈에 띄는 색으로 덧입혀진 하의를 착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발레리노가 입는 복장은 전혀 이상한 옷이 아니었고 우리가 일상복으로 착용하기 시작한 옷은 근대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 혹은 노동계급이 즐겨 입는 옷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발레리노가 착용하는 복장은 봉건제 시절 귀족의 옷에서 왕당파가 주도한 제국의 군복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군사예법을 좋아하는 나폴레옹의 취향이 적극 반영되었고, 이렇게 착복의 근거가 매우 정치적 선택이었다. 그리고 발레 작품의 대부분이 나폴레옹 황제 시기 이후 제작 혹은 복원된 작품임을 상기하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발레리노의 복장이 더욱 이해가 간다.

단순히 복장 뿐 아니라 군사문화는 이후 발레단 조직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가령 무용단 조직을 직급별로 나눈다든지, 직급과 심사단을 이용해 통제를 하는 것 등은 군사조직문화를 적극 수용한 결과이다. 반면 긍정적인 면도 있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나폴레옹이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황제가 되었듯이 말이다.

흰색 발레복의 등장

우리는 흰색 발레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백색 발레(Ballet Blanc)'라는 상징성 자체가 낭만주의와 여성 발레리나들이 발레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의 발레 무대에는 흰색 의상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희미한 불빛 아래 속이 비치는 아스라한 흰 옷을 입은 여인의 등장은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고 관객들은 이내 환호했다. 흰옷을 입은 발레리나들은 등장 자체만으로도 강렬했다. 그녀들의 획기적인 의상 변화가 발레의 대표적 이미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실 과거에는 흰색과 검은색은 색깔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색에 대한 고정인식은 오늘날과 매우 다른데, 예를 들면 중세 유럽의 화가들은 파란색을 따뜻한 난색(暖色)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따라서 흰색의 전면적인 부상은 그리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발레에서 흰색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 것에도 역시 정치적 이유가 다분하다. 18세기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이에 내일을 예측할 수 없던 파리의 발레 마스터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발레 작품에 투영한다. 예를 들어 1792년 파리발레단의 예술감독이었던 피에르 가르델(Pierre Gardel)은 혁명을 기리기 위해 <자유에 부치는 공물>이란 작품 속에서 오늘날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와 군인, 여자, 이이들로 이루어진 군중 장면을 연출하고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시민 혁명을 옹호하는 많은 작품을 무대에 선보이고 심지어 야외 행사에도 참석해 정치적 인물인  로베스피에르를 미화하고 그가 최고의 존재임을 강조한다. 발레단과 마스터들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이해관계에 의해 왕권과 혁명군에 대한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작품에 적극 투영했던 것이다. 가령 프랑스 혁명 직후의 발레단 행사들은 혁명을 신화적으로 승화하는데 한 몫한다. 마스터들은 더 이상 귀족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맹세를 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 역시 발레 제작에 있어 주요한 색감으로 작동한다. 가령 평등을 상징하는 흰색은 원래 권력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 이유로는 흰색은 엄청난 가공과 절차를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색으로 일종의 집약된 노동의 결과였기에 황실, 혹은 고귀한 순수 혈통을 상징했다. 이러한 이유로 삼색기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프랑스 황실을 뜻하는 국기로 흰색의 깃발이 사용되었다. 당시 부유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흰색은 비싼 레이스나 모슬린의 착복을 의미했고, 더러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상징하기도 했다. 발레에서도 비현실적 존재, 평범하지 않는 존재는 흰색 의상을 입었다. 특히 발레리나가 입은 흰색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고귀한 존재라는 의미와 동시에 비현실적 존재라는 점이다.

마리 탈리오니
마리 탈리오니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작품인 <악마 로베르 Robert le Diable>(1831년 초연) 3막에서 수녀원장이 유령으로 등장해 검은 수녀복을 벗고 하얀 속옷 차림으로 주인공 로베르를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이 역할은 당시 <라 실피드 La sylphide>로 데뷔하기 전인 마리 탈리오니가 맡았는데, 이때 착용한 흰색 의상은 추후 <라 실피드>의 로맨틱 튀튀(Tutu)가 된다. 악마가 유혹하는 일종의 뇌쇄적인 에로틱과 순수하고 고결한 이미지라는 흰색 의상의 중의적 이미지는 마리 탈리오니의 아버지 필리포 탈리오니(Filippo Taglioni)의 작품 <라 실피드>를 통해 고착화된다. 요정이라는 순수함과 비현실적인 존재로 흰 옷을 입은 여성상이 부각되었고 이내 이 전략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이렇게 흰색 튀튀는 정치적인 이유로 무대에서 활용되다가 여성무용수에게 입혀지면서 순수, 환영, 고귀함 등의 이미지로 투영된다. 그리고 발레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바로 이 순수성 때문에 간혹 헷갈리는데, 사실 예술은 언제나 정치와 지척으로 존재했다. 경우에 따라 노골적이거나 드라마틱하게 변모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예술가의 선택과 고뇌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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