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고독한 나그네의 여정을 뒤따르다
[공연리뷰] 고독한 나그네의 여정을 뒤따르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2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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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보스트리지와 줄리어스 드레이크의 ‘겨울나그네’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겨울이 내려앉은 아침, 키가 크고 깡마르고 조금 지쳐 보이는 남자와 길을 떠났다. 연인과 헤어져 원치 않는 방랑을 시작한 남자는 눈 덮인 길을 홀로 걷는다. 청중은 남자의 외로운 여정을 따라간다.

'겨울나그네' 공연사진 (c)Sihoon Kim
'겨울나그네' 공연 (c)Sihoon Kim

지난 12월 3일 오전 11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이안 보스트리지는 데뷔 시절부터 함께해온 줄리어스 드레이크와 <겨울나그네 Winterreise>를 선보였다.

슈베르트 스페셜리스트들이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안 보스트리지는 독보적인 역사를 쌓아왔다. 성악을 전공하지 않았으나 데뷔하자마자 슈퍼스타가 되었고, 역사와 철학을 공부한 내공으로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음악을 파고든다. 가사와 선율, 작곡자와 시인의 일생을 탐구해 도출한 해석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겨울나그네' 공연사진 (c)Sihoon Kim
'겨울나그네' 공연 (c)Sihoon Kim

그중에서도 <겨울나그네>는 보스트리지에게 특별하다. 1993년 위그모어홀 데뷔 무대도 <겨울나그네>였고, 전세계를 돌며 100회 이상 이 연가곡을 연주했다. 2014년에는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담은 책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집념의 해부>를 펴내 이듬해 최고의 논픽션에 수여되는 영국의 폴 로저 더프 쿠퍼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겨울나그네>는 빌헬름 뮐러의 24개 시로 이루어진 연가곡이다. 결혼을 약속했던 여인에게 실연당한 청년의 슬픔 가득한 여정을 그렸다. 보스트리지는 ‘귀족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맹세했으나, 신분 차이 때문에 연인과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정교사’를 그려보았다고 한다.

'겨울나그네' 공연사진 (c)Sihoon Kim
'겨울나그네' 공연 (c)Sihoon Kim

이안 보스트리지의 무대는 한 편의 흑백영화 필름을 보는 듯했다.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는’ 남자 앞에는 어둑한 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눈길이 펼쳐져 있다. 그는 자신의 가련한 처지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히 이야기하다가도 감정에 북받쳐 울분을 토했다. 변심한 연인을 원망하다가도 연인의 마을에서 오는 우편마차를 보고 헛된 희망도 품었다가 죽음을 생각하는 남자의 독백은 청중을 슬픔과 고통과 방황, 그리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빠뜨렸다.

‘얼어붙은 눈물(Gefor’ne Tränen)'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단단히 먹는 여린 남자는, ‘얼어붙음(Erstarrung)'에서 사랑의 추억을 영원한 얼음 속에 가두며 비통함의 절정에 이르렀다. 피아노가 감정선을 따라 몰아쳤다. 꽃은 시들고 풀은 푸르름을 잃어버린 그의 세계는 무채색으로 전환된다.

‘휴식(Rast)'과 ‘봄꿈(Frühilingstraum)'은 역설적인 가사로 이어져 있다. 휴식을 취하려 누웠지만 쉴 수 없는 아름답던 사랑의 꿈에서 깨어나자 지붕 위에서 울부짖는 까마귀 소리를 들으며 현실의 처지를 깨닫는다. 줄리어스 드레이크의 피아노는 보스트리지가 남긴 여백을 고스란히 두면서 이야기를 확장시켜나갔다.

보스트리지가 ‘까마귀(Die Krähe)'를 부를 때 고흐의 명작 <까마귀 나는 밀밭>이 떠올랐다. 성악가는 텅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노래했다.

까마귀야, 묘한 짐승아. 나를 떠나다오. 여기서 바로 내 시체를 먹이로 삼으려는 게냐.

지팡이를 짚고 멀리 갈 수 없구나. 까마귀야, 마지막으로 보여주렴. 무덤까지 따라오너라.

이안 보스트리지의 목소리는 새들의 뼈처럼 비어있었고, 황량했다. 머리 위를 빙빙 도는 까마귀를 보며 죽음이 방황의 끝이라고 예감하는 남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겨울나그네' 공연사진 (c)Sihoon Kim
'겨울나그네' 공연 (c)Sihoon Kim

보스트리지는 청중을 절망에 가득찬 나그네에 몰입시켰다. ‘여인숙’에서 이 남자는 무덤에서 쉬겠노라 노래한다. ‘쓰러질 것 같고 상처가 깊은’ 나그네는 느린 탄식처럼 무덤에서의 안식을 꿈꾸지만 무덤마저도 나그네가 누울 곳은 없다.

무덤가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남자는 용기를 낸다. 비관적인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얼굴에 떨어진 눈송이를 떨어내며 거친 바람을 헤치고 ‘세상에 신이 없다면 우리가 신이다!’라고 외친다. 바위를 뚫고 터져나오는 샘물 같은 소리는 보스트리지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에서 보스트리지는 낡은 허디거디 연주자의 모습을 통해 고독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대여정을 마무리했다. 그가 자신의 책에서 ‘마술적이고 토템같다’고 표현한 이 곡은, 무대와 청중에게서 전해지는 영감으로 부른다고 했다. 가슴에 담은 복잡한 감정들을 조용히 토해내는 기막힌 순간이었다. 예민하고 섬세한, 그래서 상처가 아물지 않은 남자의 노래는 겨울이 이어지는 한 계속될 것만 같았다.

이안 보스트리지의 노래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듣는 이를 찬 바람 부는 쓸쓸한 겨울길로 이끌었다. 나그네가 뒷모습을 보이며 저만치 떠난 그 겨울길을 오롯이 걸어보았다. 이소라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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