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몸으로 춤을 말하기 그리고 당부 - 대구시립무용단 ‘Process In It’
[공연리뷰] 몸으로 춤을 말하기 그리고 당부 - 대구시립무용단 ‘Process In It’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1.1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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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용 예술감독(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김성용 예술감독 (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더프리뷰=대구] 하영신 무용평론가 = 지난해 12월 9일과 10일 양일간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는 대구시립무용단의 제82회 정기공연작 <Process In It>이 펼쳐졌다. 5년간의 동고동락을 마치고 단체를 떠나는 김성용 예술감독의 임기 마지막 작품. 단체와 작가적 역량을 총망라한 방점 같은 작품에 대한 욕망을 가질 법한데, 그는 렉처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의 형식을 빌려 관객에게 말을 걸고 단체의 ‘몸’으로서의 무용수들에게 시선을 묶고 떠났다.

비로소 춤의 현장들이 활짝 열렸던 가을 시즌의 막바지. 팬데믹 정황으로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영상기술과 친밀해진 작품들이 쇄도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다행히 기우로 관찰되었다(그러나 버젓한 한 축으로 세워졌다. 국립현대무용단 ‘무용x기술 융합 프로젝트’, 서울문화재단의 ‘순수 예술인 NFT·플랫폼’ 사업 등. 첨단기술과 춤을 중매하는 두 기관의 행보엔 찬반이 갈릴 것이다. 공연예술작품, 춤에 대한 정의적 판단이 전제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래형 예술에 대한 선제적 지원으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다만 창작의 향방에 영향력을 지닌 양대 기관이니, 개인적으론 그 동시적 행보에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몸의 현전(現前)에 제약을 받았던 만큼 더욱이 몸을 부리는 ‘센’ 춤들이 창궐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그다지 성취되진 못했다.

이 가을, 언어와 함께 귀환한 춤들이 제법 많았다. 무부아르(Mouvoir, 독일)의 <Hello to Emptiness>와 <공허와의 만남 Picture a Vacuum>, 조나스&란더(Jonas&Lander, 포르투갈)의 <파두를 두드려라 Bate Fado>, 부슈라 위즈겐(Bouchra Ouizguen, 모로코)의 <엘리펀트>, 압샬롬 폴락 댄스 컴퍼니(Avshalom Pollak Dance Company, 이스라엘)의 <공간 침략자들 Space Invader> 등 꽤 많은 작품들이 상당 부분의 가창 혹은 대사를 소지했다. 이 작품들처럼 전격적이진 않더라도 상당수의 크고 작은 작품들 역시 작품 내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파두를 두드려라(사진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조직위원회)
파두를 두드려라 (사진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조직위원회)

움직임 본질을 적출하던 사실상 모더니즘적 기획이었던 포스트모던댄스로부터 융복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를 따라 공연예술 본연의 총체성을 복원해온 컨템퍼러리댄스는 이젠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 고대적 향수를 환기한다. 어쩌면 문화예술사의 한 절기가 끝나고 있는 것일까. 사유, 예술, 심지어 일상적 소비문화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의 방향타는 이성·언어·재현으로부터 감각·몸(물질)·추상으로의 이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절을 관통해온 문제의식은 언어의 의미포착 능력과 재현의 사태포획 능력에 관한 의문 제기였다. 거시적으론 재현충동의 뒤를 이었던 추상충동, 이제 이 두 충동은 동시대에 공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각예술, 공연예술을 막론하고 동시대의 예술들은 직접적인 말하기로써 소통의 능력을 배가시킨다.

현대예술, 열린집합과 질문들

물질의 운동과 에너지의 파장으로써 대상과 사태의 본연을 제시하고자 했던 현대예술의 의욕은 사실 한 귀퉁이가 꺾일 만도 했다. 시각예술에서든 공연예술에서든 관객들은 여전히 질문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그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장치는 무엇을 의도하는가. 그 움직임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해석과 감응은 개별적 기억에 연관하는 열린 작용이랍니다.”가 현대예술작품 관람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단서겠지만, 거두어지지 않는 질문들을 우문(愚問)이라 여기기엔 기실 의미화의 가능성이 빈약한 작품들도 많은 것을 어쩌랴(그런 면에서 질문하기는 좋은 반응의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역으로 스스로 사유하기를 관둔 방만한 질문 역시 있다. 현장에는 이런저런 태도들이 교차하기 마련).

직관과 정동(情動, affect)으로써만 파악하기에는 세계는 너무 광활하고 복잡한가도 싶다. 그러니 그에 처한 인간들의 이해와 감응과 소통은 부분에 기초할 수밖에 없는 표상기호인 언어에 의존해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공감과 소통이 그 존재적 필연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해석을 기다리는 기호적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각의 언어들은 나름의 역사를 짊어진 약속이자 체계. 언어와 춤은 죽은 것과 산 것, 로고스와 파토스, 본래적으로 대칭의 가장 먼 곳들이다. 물론 양자는 서로에게로 당겨져 올 수 있다. 안무가 ‘말하기’와 ‘글쓰기’에 비유되어 온 지도 오래. 언어적 작업 역시 기억을 소환하고 현재를 가감(加減)하여 새로운 기억을 창출하는 수행성(遂行性, performativity)을 지녔다. 신체든 정신이든 존재의 모든 세부사항은 운동 중. 이런 관점에서라면 행위와 글쓰기는 모두 수행적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기는 하다.

양자를 교합하는 초기의 형식들은 그 둘 사이의 공통항들을 접목시켰다. 육두문자나 감탄문처럼 음가(音價)와 억양 등 그 물성의 뉘앙스만으로도 단박에 알아지는, 언어에도 분명 육질(肉質)이 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나 탄츠테아터를 시발로 컨템퍼러리댄스가 사용해온 언어는 이 육화된 말들이었다. 이제 동시대의 예술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본격적인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 ‘글쓰기’로서의 창작, ‘말하기’로써 표현을 강화하고 담론을 생산하는 렉처 퍼포먼스.

언어와 행위를 병치하기, 렉처 퍼포먼스

‘융복합’ ‘다학제간’ 혹은 ‘4차 산업시대로의 전회’ 등 동시대 예술에게 강제되는 호들갑에 비하면 정신/몸, 사유/행위, 글쓰기/춤추기 사이를 횡단해 보이겠다는 렉처 퍼포먼스의 의욕은 차라리 고전적이기도 하다. 렉처 퍼포먼스는 말 그대로 언어와 행위를 등가적 매체로 등장시켜 발화와 연행의 이중구조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강화하고 새로운 담론과 미학적 함의를 발생시키기를 의도하는 작업이다. 21세기 들어서야 예술형식으로서의 명칭을 부여받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면 예술이 말하기를 작정한지도 제법 오래 되었다.

독일의 미술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가 <죽은 산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이라는 작품을 통해 강연하는 예술작품들의 출입구를 연 것이 이미 1965년의 일이다. 그는 주술사로 분하고 품에 안은 죽은 산토끼에게 세 시간에 걸쳐 미술관 곳곳의 작품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재료의 선택과 그 전개방식과 담론형성 모두에서 전복의 의지로 일관했던 그의 행보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전 세계로 파급된 전위예술운동 ‘플럭서스(Fluxus)’와 더불어 시각예술계에 ‘퍼포먼스(행위예술)’를 안착시키는 데 일조하였다(이후 몸을 보충한 타 장르 예술의 영향권 안으로 ‘흡수’된 춤작가, 춤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판단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무용예술계의 첫 렉처 퍼포먼스작으로는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의 <상황의 산물 Product of Circumstances>(1999)을 꼽는다. 시청각 자료를 동원한 프리젠테이션에 병치한 행위와 춤의 대목들을 통해 생물학 전공자로부터 무용수와 안무자의 길을 걷게 된 자신의 인생경로와 그에 실린 춤 관련 경험과 작업내역을 공개한 작품은 초연 이후 꽤 오래 세계를 순회하였다(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페스티벌 봄’에 의해 <다른 상황의 산물 Product of Other Circumstances>로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 제롬 벨(Jérôme Bel)은 <베로니크 두아노 Veronique Doisneau>(2004), <루츠 푀르스터 Lutz Förster>(2009), <세드릭 앙드리외 Cédric Andrieux>(2009) 등의 연작을 통해 자전적 말하기와 연행으로써 무용수의 개인적 삶과 그가 처한 상황(무용계), 그리고 예술가의 몸과 예술의지를 진술하고 시연했다.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춤이 말하다' (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우리나라의 춤들은 국립현대무용단에 의해 말하기를 시작했다. <춤이 말하다>(2013, 2014, 2015, 2016년)와 <댄서 하우스>(2017년과 2018년)는 김설진·김용걸·김운태·김주원·김지영·디퍼·성창용·안남근·안지석·예효승·이나현·이선태·차진엽·최수진 등 각종 세부 장르의 무용가들로 하여금 어떻게 저마다 다른 몸과 춤을 경유하여 동시대 춤의 현장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말과 춤으로 전언케 한 렉처 퍼포먼스 레퍼토리다.

국립현대무용단 '댄서 하우스'(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댄서 하우스' (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자비에 르 루아의 오랜 순회나 제롬 벨이나 국립현대무용단의 연작들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바, 이 새로운 시도가 또 하나의 형식으로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치 대중 소구력이 확보되었다는 뜻. 배양된 공감능력은 강화된 자필성(自筆性, the autographic)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작품의 핵심요소로서의 스스로에 대해 말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구하기. 이로써 무용가들은 무용수와 안무가의 경계를 넘어서, 비로소 춤으로 말하는 자, 무용가가 될 수 있었다.

그 말들과 춤들은 허구의 상연이기를 멈췄다. 실존적으로 감각·몸·추상의 언어인 춤들이 언어의 능력으로 보충한 재현성은 그러나 재현의 전통과는 다른 각도의 것이다. 개인적으로야 언어를 대부분의 진의가 누수되는 부박한 뜰채라 여기며 경계하지만, 어쨌거나 공감과 소통의 더한 성취를 위해 언어를 유용하겠다는 작품들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타 장르들과 교직하는 컨템퍼러리댄스 작품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한편으로는 춤의 역능이 위축되지 않았는지를 각별히 살피게는 되겠지만.

국립현대무용단 '댄서 하우스'(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 '댄서 하우스' (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강연이 된 춤, 그 실리와 함정

자필성이 보완하는 소통과 공감치 외에도 렉처 퍼포먼스에는 또 다른 강점이 있다. 아카이빙의 새로운 방식. 문서와 사진으로 박제되어왔던 역사기록물들은 이젠 구술과 영상은 물론 춤으로 활성(活性)을 띠고 재생산되는 기억으로서 동시대성을 획득한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우회공간>(2014)은 남정호·안신희·이정희의 진술과 춤으로 1980년대 소극장운동의 거점이었던 공간사랑에서의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컨템퍼러리댄스로 향해 온 우리 무용사의 한 대목을 체현했다. 전미숙의 <거의 새로운 춤>(2022)은 춤의 원형과 미래에 대한 통시적 고찰이며 동시에 작가의 춤관을 기록했다. 제25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를 통해 무용역사기록학회가 발표한 도큐먼트 공연 <Reconnect History, Here I am>(2022)은 컨퍼런스와 렉처와 공연의 혼합물로 20세기 세계무용사에 한 획을 그었던 무용가들을 현재의 연행자와 연구자들의 해석을 통해 현행화된 몸으로 불러냈다. 춤으로 진연(眞演)되는 춤의 역사는 확실히 종이에 놓인 글자와 스냅샷으로서의 기록물보다 입체적이다.

그러나 다시. 재현에서 추상, 작품에서 텍스트로 점진해온 사유와 예술의 역사를 돌이켜보자. 예술과 사유가 닫힌집합에서 열린집합으로 그 방향성을 개진해 온 이유는 그 어떤 정치(精 緻)한 표상과 재현으로도 대상과 사태를 온전히 포착하고 고정할 수 없다는, 부정에의 긍정에 있었다. 일찌감치 니체에 의해 선포된 ‘신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 진리는 허구이고 생성만이 이 세계의 진실이다. 표상이 불발할 때, 인식이 실패할 때, 대상과 사태의 진국면(眞局面)에 대한 의혹이 발생할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사유는 비로소 촉발되고 그로부터 진정한 차원의 감지가 시작되는 것이다. 생성, 운동, 춤. 춤(추상된 현대예술의 운동성)의 표상불가능성은 실체 혹은 실재를 접촉케 하는 유일한 통로다.

그러나 ‘감지’는 역시 표상불가능성인 것이다. 춤이 지극할 때, 그것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다(못한다). 춤은 그저 생명, 운동, 자극과 반응, 작용과 반작용, 그 생성의 과정을 공개할 뿐이다. 현대예술의 소통과 이해는 불가능하거나 전적이거나, 도 아니면 모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의 지극해진 춤들은 이해의 모호한 지대에 있어왔고, 이제 역전적으로 언어적 말하기라는 방법론을 택한다.

지금은 렉처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로도 분류 가능해졌지만 자비에 르 루아와 제롬 벨의 춤들이 출현 당시로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농당스(non-danse)’라 불려왔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새로운 춤’을 지시한 호명, no-dance, 어떤 각도에서는 비(非)춤, 적어도 (언어나 춤 밖의 행위가 개입한) 불순한 춤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렉처 퍼포먼스는 언어의 수행성이라는 이점을 갖는다. 하지만 언어, 시각예술, 공연예술이 담지하고 있는 수행성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본디 퍼포먼스가 아니었던 것들이 수행성을 첨부하는 것과 본래적으로 수행성이었던 세계가 언어로 첨삭되는 것은 다른 결과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동시대 예술이 융복합, 학제간을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모든 장르가 평균율로 통합될 리는 만무하다. 렉처 퍼포먼스는 결국 ‘강연 같은 공연’ ‘공연 같은 강연’ 중 무엇이다. 거기에는 분명 일방향성, 감응의 축소와 사유의 중단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춤의 입장을 세워 말하자면, 춤이 덜어진 공연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져야 하는, 움직임에 대하여

그런 연유로, 김성용 예술감독이 재임 마지막 작품의 형식으로 렉처 퍼포먼스를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움직임과 그 움직임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응집되는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이해난망이라는 악명을 떨치고 있는 동시대 춤에 대한 이해를 돕겠다는 기획의도가 발표되었을 때 여러 각도로 우려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론으로써 자필성 혹은 아카이빙적 능력, 춤의 손실을 감안하면서까지 확보해내야 하는 저 렉처 퍼포먼스의 강점을 내포할 수 있을까. 전자의 요건을 충족하자면 작가 특유의 메소드와 과정이 설명 가능해야 할 것이고 후자의 요건이 달성되자면 대구시립무용단의 연혁, 혹은 예술감독이 기입한 5년의 역사가 반추되어야 할 터.

우선 전자의 불가능성은 국공립단체장으로서의 책무에 스스로 엄격했던 김성용의 공적 마인드로부터 이미 유추가 가능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대구시립무용단의 작품들을 보며 춤작가의 꿈을 키워 온 그는 한 도시의 춤 지형에서 시립무용단이란 얼마나 영향력을 지닌 실체인가, 자신의 춤 역사 앞에 선재해온 단체에 대한 경외감을 잊은 바 없다. 단체의 유산을 물려받은 단체의 몸, 잘 훈련되고 헌신적인 서른 여 명의 상임단원들은 어느 예술가가 유용해도 좋은 그저의 도구가 아니다. 그는 예술감독이라는 직함을 ‘연혁을 지닌 단체의 유기체적 역량을 최대치를 끌어내야 할 소임을 지닌 자’로 무겁게 받아들였다.

대구시립무용단 '군중'(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군중' (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초인> <Moving Violence Episode 1, 2> <Lynch> 등 세계와 그에 내속하는 인간, 개인에 작용하는 세계의 작동방식에 대해 탐구해온 집요한 작가적 시선은 단체 모두의 시야로 확대되었다. 부임작 <군중>으로부터 <The Car> <무엇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가> <i tube 1, 2> 등으로 일련하는 대형 정기공연작들은 공통적으로 현대사회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 관한 초상이었고 그 춤의 장면들은 단원 모두의 삶으로부터 발현되었다. 언젠가 그는 “꼬박 2년 여의 세월을 보내니 이제 좀 단원들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눈에 사람을 간파하고 필요한 동작을 추출해내는, 공개할만한 논리적 노하우 따위란 누구에게도 있을 리 만무하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항상 단원들이 몸을 풀고 있는 이런 광경으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작품 도입부가 말해주는 바처럼 예술경험과 일상이 공유된 시간의 축적, 성실한 관찰, 애정 어린 물음, 신뢰로 비로소 가능해지는 답변 등 그 과정 밖에 특별할 도리가 있을까. 그 과정의 진의는 실천하기는 실로 어렵건만 딱히 각별한 메소드라 내놓을만한 것도 못 된다. 교과서적 당위랄까, 사실은 모르는 이도 많고 알아도 별 가치를 두지 않는. 심지어 대구시립무용단은 우리나라 현대무용의 카테고리에서 상임단원 체제로 존속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다. 단체를 우선순위로 두는 태도는 플랫폼과 프로젝트로 산화된 우리 춤지형에선 이제는 유효하지 않거나 실천 불가능한 방법론, 그는 재임 내내 이를 명심하고 실천에 옮겼다.

대구시립무용단 'The car'(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The car' (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아카이빙이라면 40주년을 맞은 단체를 기리며 <DCDC>를 선물했던 바. 공적 작업으로서의 마침표를 어떻게 찍을 것인가, 고심 끝에 그는 대구시립무용단의 역사를 창출하는 또 다른 주체인 관객들에게 말 걸기를 작심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응원하던 어린 시절의 동무들로부터 지금 여기 대구시립무용단의 관객들까지, 그들은 항시 ‘난해한 무용작품을 이해할 방법’을 물어왔다. ‘움직임 안내자’를 자청하여 때로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답변을 보충하며 작품의 설계와 진행을 도운, 평론가지만 동시에 오랜 무용치료사로서 관객 접촉면이 넓은 김미영의 문제의식도 김성용의 그것과 같았다. 그들은 언어적 의미망으로는 미처 다 포획할 수 없는 움직임, 그 춤언어의 특수성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대구시립무용단 '아이튜브'(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아이튜브' (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DC DC'(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DC DC' (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움직임, 과정, 춤의 조직을 말하고 보여주기 <Process In It>

움직임의 내용은 항상 언어가 지시해낼 수 있는 것, 시각이 확인시켜주는 것보다 넓고 깊고 크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으로부터 발생하고 다시 사지 말단으로까지 영향을 줄 뿐 아니라 항상 배후를 간직하는 온통의, 전적(全的)인 것이다. 예를 들면 등을 구부리는 동작은 복부와 가슴 등의 전면적 수축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움직임은 움직이는 사람의 기억, 과거 시간 전체, 즉 그 혹은 그녀 자체 질성의 강도(剛度)적 현행화다. 움직임을 무엇의 재현으로만 여기는, 언어적 의미로 치환해 보려는 오래된 습관을 버리고 움직임 그 자체를 감각할 수 있을 때 훨씬 더 많은 무언가들을 전달해주는 지극한 춤들이 있어왔음을 김성용은 말하고 싶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그 지극한 순간들을 끄집어내고 펼치기 위한 고군분투의 결과물이었고, 이제 그는 그 지극한 순간들을 지극한 상태로 향유할 수 있는 어떤 인식적 토대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대구시립무용단 'Process in it'(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Process in it' (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무용수들의 행위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에 부합하는 부분들을 채취하거나 혹은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한 위의 내용들을 무용수의 몸으로 구현해 보이는, <Process In It>의 단계들을 통해 막연했거나 (일상에 포함되어 있기에 오히려) 춤적 의미로 정산되지 않았던 춤의 질료 움직임은 그것이야말로 춤작품의 세부사항임이 입증되었다. 이어지는 설명은 움직임들이 무엇으로부터 촉발되어 어떻게 서로 조응하고 연쇄하며 춤의 프레이징(phrasing)으로 축조되어 가는지, 그 물리적이며 동시에 심리적인 구성에 관한 것이었다.

김성용은 몸의 한 점(點)이나 한 선(線)으로 그어진 중심축(pivotal point)으로부터 또는 무용수들의 몸과 몸 그리고 몸과 대기(빛과 소리 등)의 마찰(friction)로부터 발생하고 연동하여 증폭되어가는, 움직임 프레이징의 조직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형성의 원리에서 중요한 지점은 움직임들은 항시 지속(extension) 중이라는 것이다. 춤의 장면들에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움직임 외에 더 멀리 뻗어나가고 더 깊숙이 돌아오는 잔여 에너지의 구동이 포함되어 있다. 그 섭리를 체득하여 이를 감각해낼 수 있다면 춤의 관람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강렬한 몸적 경험, 즉 체현(體現, embodiment)의 경지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움직임 그 자체적 특성에 관한 이해는 춤관람의 지경을 가르는 관건이기는 하다. 일상을 초과하는 의미와 감각을 부여하는 예술작품의 경지로 들어선 춤을 우리가 여전히 일상적 의미로 번역하고 평상적인, 특히 시각이 우선하는 습관적 감각으로써 ‘보기’만 한다면 그것은 춤작품 안으로 걸어들어가지 못한 그리하여 춤들과 온전히 만나지지 못하는 불충분한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김성용과 김미영은 춤을 충족히 감응할 수 있는 어떤 비결을 알려주고 싶었고 그것은 정녕 필요했다.

그러나 엄밀하자면, 이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반편의 답변밖엔 되지 못한다. 오늘날 예술세계에 작품은 여러 종류의 형태로 있다. ‘work’ ‘piece’ ‘session’ 등. 가장 고전적 형태라 할 수 있는 work는 작가가 조성을 마친 하나의 완결된 독자적 세계다. 그 완결성이기를 관두고 개념, 기제 등의 제시에 방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 piece, 아예 과정 중으로 개방한 것이 session 쯤으로 분류 가능하다. 예를 들면 동시대 춤의 기제와 발생의 과정과 내역 그 자체를 보여주는 즉흥 페스티벌의 춤들은 work가 아니라 session으로 불리는 편이 적합하다. 관객이 어떤 춤작품에 대하여 “잘 모르겠다.” “어렵다.”고 불평케 될 때 그것은 대체로 관객이 합당한 관람 포인트를 찾아내지 못한 이유로 초래되기도 하지만 행여는 작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형식에 부합하는 선별적 내용을 채우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파격은 격들의 재구성, 뭔가가 새롭다 말해질 수 있으려면 그 생경한 조합의 구성을 지탱하는 고유하지만 동의 가능한 내적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정형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공감이 불가능하였다면 그것은 애석하게도 작가의 의미화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춤의 작가를 특정하는 ‘안무가’라는 단어는 ‘말하기 혹은 글쓰기’를 의탁하고 ‘춤짓기’로만 관여하는 특수한 경우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런 대필적 경우라 해도 필히 움직임들은 의미에 연관하거나 의미화를 발생시키는 긴밀한 표현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춤의 질료인 움직임들은 다른 예술의 매체들과는 유독 판이하게 다른 것. 그 ‘살아있음’ 자체의, 여타의 구성과는 다른 ‘발생의 차원들’에 대해 비로소 답할 수 있는, 답해야 하는 순간이 김성용에게 온 것이다.

대구시립무용단 'Process in it'(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대구시립무용단 'Process in it' (사진제공=대구시립무용단)

‘정글’, 김성용이 남기는 염려와 당부

움직임 자체에 관하여, 그 조성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마친 김성용은 마침내 서른 명 단원들로 하여금 춤 그 자체를, 자신의 발현으로서, 서로에 대한 몸적 조응으로서, 또한 조명과 사운드 등으로 구획된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춤추기를 실행케 하였다. 김성용은 30여 분으로 조형한 춤추기에 ‘정글‘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온 몸의 감각이 발휘된 최대치의 움직임으로써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정글의 생, 무용수들의 기량이 한껏 펼쳐지고 동시에 모두의 삶으로 대유(代喩)되니, 정교한 몸들의 집합으로서 정평이 나 있는 무용단을 자신의 이전으로 되돌려놓으면서도 그들과 더불어 일련해온 작업에도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이중적 함의의 제목이다.

‘정글’을 펼치기 직전 그는 마지막 소회와 당부를 첨언했다. 마흔 한 살의 춤단체, 녹록치 않았던 행보와 정치적 부침, 부디 애정과 관심으로 살펴주십사는 부탁. 렉처 퍼포먼스가 겨냥하는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의 중핵은 비평적 사유 창출과 담론화다. 예술작품들에게 허용된 말하기가 고작 작품에 내재하는, 발견되고 해석되어야 할 의미들을 일상적이고 평이한 태도로 설명하기일 리는 없지 않은가. 감각과 지각 자료들이 나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대부분의 소실되는 자료들 중 나의 역사, 즉 기억과 합목이든 반목이든 조응을 이룰 수 있는 일부가 기억을 첨삭하여 달라진 기억 전체(나, 그리고 나의 집합으로서의 세계)를 갱신하기. 강연과 예술경험의 메커니즘은 사실 유사하다.

‘다시 쓰기’. 컨템퍼러리댄스와 시각예술 퍼포먼스의 교차로에서 전위적인 춤들의 가능성을 연구해온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는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란 저서에서 자비에 르 루아, 제롬 벨,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 등 1990년 이후 새로운 작업방식과 무대연출 전략을 구사해온 작가들로부터 ‘춤에 대한 질문’ 곧 ‘춤의 정치적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그는 그 작업들을 재현과 주체성이라는 오래된 지배적 가치에 대한 폭로라 읽어내지만, 그 거창함을 덜고 조금 쉽게 접근해보자. 자비에 르 루아나 제롬 벨이 스스로 혹은 무용가들의 직접적 말하기로써 전하는 내역들은 기존의 작품 개념으로써는 드러낼 수 없었던 작업의 배면들이다. 무엇에 관한 재현 혹은 누구에 대한 대리가 아니라, 예술가 주체 자신들이 예술계와 사회일반에서 어떻게 작업과 생을 영위하고 있는가에 관한 실체적 진실을 말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증빙으로써 역사와 제도에 공고히 뿌리내린 관행적 가치를 심문하기. 그리하여 성찰의 계기와 변화의 동력을 마련하기. 달라지는 나, 우리, 유동(流動)하는 세계. 예술과 배움과 삶의 목적은 다르지 않음이다.

정글, 온몸의 감각을 항진시켜 살아남기를 당부하는 김성용의 진언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각성할 수 있을까. 나는 정글로 떠나는 이 그리고 정글에 남겨지는 이들, 중첩되는 그림자를 본다. 이 40여 년간 유일했던 현대무용의 단체는 제7대 예술감독의 종업과 지역 문화예술계의 재편을 동시에 맞았다. 단체기반형 예술지형에서 단체는 주체 그 자체다. 대구시립무용단은 정기공연과 기획공연을 통해 대구시민을 위무하고 자극하는 크고 작은 무수한 작품들을 선보여 왔고, 자체적으로 안무가들을 육성해왔고, 워크숍을 통해 지역 무용예술 교육에 이바지해왔고, 지역과 중앙과 세계의 춤들을 교류시키는, 대구 춤계의 엄연한 기관적 역할을 해왔다. 제도의 변혁을 겪을 단체, 그 운신의 폭은 너르게 펼쳐질까 아니면 도리어 좁혀질까. 이 귀한 단체의 운명을 지지할 이들은 여러분들이라고, 떠나는 자가 당부를 남긴다. 이 당부를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 모두가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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