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모니터] 낭만적 허구와 무대 위의 작은 진실, 서로 다른 사랑을 상상하다
[공연모니터] 낭만적 허구와 무대 위의 작은 진실, 서로 다른 사랑을 상상하다
  • 나수진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1.25 09: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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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차세대열전' 이이슬의 ‘상상(想相)이상’

[더프리뷰=서울] 나수진 무용이론가 = 사랑. 인간이 섹스만큼 많이 생각하고 논하는 대상이다. 에로스가 물질과 정신을 지배한 지 오래인 이 시대에 사랑은 진부하다는 수식어를 단 지 오래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사랑은 여전히 살아남아 모든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불멸을 암시한다. 춤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2월 10, 11일 이틀 동안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 젊은 춤꾼 이이슬 안무가의 공연 <상상(想相)이상>이 올랐다. 낭만발레나 고전발레 속 몸짓이 그 시대의 사랑을 논했듯 <상상이상>은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사랑에 관해 드러낸다.

이이슬 안무 '상상이상' (사진=김경동)
이이슬 안무 '상상이상' (사진=김경동)

생각 ‘상(想)’, 서로 ‘상(相)’.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의 상상(想相)을 상상한다. 무용수들은 무대 처음부터 이 사랑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온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입에 빨간 실을 물고 등장한 무용수 네 명이 무대를 가로지른다. 교차한 실들은 오늘날 흔히 느끼는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혼란함을 암시하는 듯 보였다. 코로나 19가 불러온 팬데믹은 소통의 부재를 심화시켰고, 빨간 실이 무대를 가로지르는 광경은 이런 부재의 위태로움을 상징하는 듯했다. 접점 없이 살아온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다름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일은 조화로움에 앞서 다툼과 갈등이 도드라진다. 무용수들은 이를 표현해내기 위해 회색이나 검정, 카키색 같은 어두운 톤의 의상을 입고 얼핏 보기에 금속 교정기같이 생긴 상모를 쓰고 등장했다.

상모에 달린 물채는 꼭 하얗고 작은 꽃처럼 보였다. 사랑이 고조됨에 따라 갈등이 생겨날지라도 갓 피어난 사랑의 감정은 설레기 마련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상모의 물채는 서로를 향하고, 둘씩 짝을 지은 남녀는 상대를 탐색한다. 서로 바라보는 눈빛은 달콤하고 심지어 둘은 머리 스타일조차 같아진다. 이는 사랑을 서로 다르게 생각하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랑’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드러내는 움직임으로 비친다.

그래서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에 결투가 시작된다. 머리를 똑같이 묶은 한 커플은 팔짱을 낀 채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상상(想相)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팔을 올리다가 서로 부딪치고, 손의 움직임도 왜인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그 웃음이 어딘가 억지스럽다고 느껴지도록 만든다. 상대를 나라는 중심을 향해 끌어당기는 모습은 일상생활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자신의 표상이다. 이러한 소통과 수용의 어려움은 음성을 주고받는 한 커플의 모습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마주 앉아 발가락을 까딱이며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한다. 의미가 불분명한 음성이 오가지만 거기에는 애증이라는 감정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점점 말소리가 커지고 가까워졌다고 느낀 순간, 다시 멀어지는 상황의 긴장감이 불목의 제스처와 무용수들의 역동성 있는 플로어 워킹으로 고조되고 가열된다. 무용수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호흡 하나만으로도 미묘한 감정선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너무나도 실제적이다. 인간의 감정은 신체를 통해 드러나고, 이 신체는 그런 의미에서 미묘한 기표이다.

이이슬 안무 '상상이상' (사진=김경동)
이이슬 안무 '상상이상' (사진=김경동)

한바탕 무대를 휘저은 역동적인 움직임을 끝낸 남자 무용수가 곧이어 솔로 무대를 펼친다. 그의 움직임은 잘 단련된 날것의 격정적인 움직임이다. 이윽고 암전된 무대 위에서 안무가 이이슬이 야광 상모를 돌리면서 그 격정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상모의 움직임은 고요하면서도 몹시 강렬하고 화려하다. 붉은색과 초록색의 초리가 맞닿아 만든 형상이 흡사 사랑을 상징하는 하트 같다. 초리가 반복적으로 돌아가며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원들은 소극장 안 관객을 아울러 그의 춤판, 곧 그의 세계로 잡아 이끄는 마력적인 웜홀 같다. 이러한 안무와 움직임은 어쩌면 너무 익숙하고 뻔하다. 이전까지 이이슬 안무가가 보여줬던 특유의 한국적이고 분절된 움직임의 특질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이번 공연에서는 이이슬만의 새로움과 독특함이 보이지 않았다고들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뻔하고 단순한 안무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만나면서 역설적으로 묘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어떤 예술이든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움직임, 곧 평범함의 힘은 이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반복은 힘을 지닌다. 평범함조차 반복에 따라 역동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평범함의 반복은 특별하다. 무용수 4인은 뛰어난 기량으로 이러한 반복에 의미를 더해 ‘사랑’이란 주제를 신박한 표현법으로 풀어냈다. 또한 무용수가 상호작용하는 움직임은 무형의 감정을 묘사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깊은 내면을 잘 표현해냈다. 마치 의상에 프린팅된 무늬가 살아 움직이며 내면의 갈등과 고뇌를 시각화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 허구인가? 환상적인 허구는 낭만적인 허구가 되는 일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이슬 안무 '상상이상' (사진=김경동)
이이슬 안무 '상상이상' (사진=김경동)

전반적인 기획 또한 단순함의 힘이 오히려 작품의 주제에 무게를 실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초반부에 빨간 실과 실의 얽힘이라는 장치로 주제 의식을 드러내고 마지막 부분에 상모돌리기 반복을 통해 ‘상상’을 향한 의지를 보여준 구성은 매우 명징했다. 야광 상모가 반복적으로 돌아갈 때는 안무가가 관객에게 주문을 걸어 주제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함의 힘은 의외로 관객을 매료시키곤 한다.

이처럼 안무가는 영리했고 구성은 치밀했다. 공연 시간 50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를 30대 초반의 젊은 안무가가 지루함 없이 이끌어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이슬은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무대를 전환하거나 분위기를 환기함으로써 관객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음악의 전환이 주는 효과가 돋보였다. 한국적 소재를 암시하는 타악과 구음, 전자 음악의 활용을 통해 적당한 타이밍에 공연 환경을 환기했다. 오늘날 무용공연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기법인 음성 어감과 포스처를 도입한 점 또한 주제 전달을 도왔다. ‘상모’와 ‘빨간색 실’이라는 한국적인 소도구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장치는 공연을 한층 더 트렌디하게 만들었고, 기계적이고 사이버적인 상모와 형광을 활용한 점에서는 젊은 관객들에게 감각적인 공연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다만 흔한 MZ세대의 사랑 표현법, 사랑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 것에 반해 ‘이 세대는 관계 맺음과 소통, 사랑을 과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생략한 점은 아쉬웠다. 사랑은 ‘인간 존재와 관계의 근원’인 태고의 욕망이다. 이번 공연은 이러한 본질이 사회상과 시대상, 곧 사랑의 고고학을 묘사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낭만적 다툼을 끝내지 않으려는 의지 또한 잘 전달했다고 본다. 하지만 춤은 신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연적인 감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 보다 사랑의 원초적인 감각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동어반복과 발음상의 유희성을 활용한 ‘상상이상’은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돌아보고 꿈꾸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방향을 향한 확실한 한 발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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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광동 2023-02-01 11:08:34
서로를 생각하고(상상) 서로에게 자신의 롤모델을 꿈꾸고(상상) 그러다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이상) 사랑! 갈등과 봉합의 반복이네요. 공연을 보고 무용평론을 읽었다면 사랑이라는 소름끼치는 진부함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잘 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