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나림의 프리즘] 혁명가였던 멕시코의 국보 화가, 프리다 칼로
[선나림의 프리즘] 혁명가였던 멕시코의 국보 화가, 프리다 칼로
  • 선나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31 0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리다 칼로 사진전, 3월 26일까지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문화홀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고통, 기쁨,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

이 과정의 혁명적 투쟁이야말로 지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

-프리다 칼로-

[더프리뷰=서울] 선나림 칼럼니스트 = ’고통의 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굴곡 있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예술로 이겨낸 프리다 칼로(Freda Kahlo, 1907-1954)는 그녀가 떠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다.

불그스름한 뺨과 화려한 꽃, 가운데가 연결된 빈틈없이 빽빽한 눈썹, 그리고 그 밑에 자리한 붉은 입술. 마주한 고통과 슬픔만큼이나 강렬한 그녀가 그린 삶을 작품이 아닌, 그녀의 모습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전시가 지난 12월 23일부터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10층에서 열리고 있다. 이탈리아 5개 도시 순회를 마치고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프리다 칼로의 사진전>이다.

전시는 사진작가였던 그녀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사진을 시작으로 남편 디에고 등 20여 명의 사진작가들이 포착한 프리다의 삶과 마지막 순간까지 담은 147점의 사진 작품을 보여준다. 전시는 고통/자화상/사랑/꽃/죽음, 5개 주제의 작품들을 통해 그녀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미디어아트와 ’베일을 벗다‘라는 제목의 누드 외에 총 여덟 개 섹션을 이루고 있으며, 그녀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전시의 대표작으로는 프리다의 아버지인 기예르모 칼로가 찍은 《4살의 프리다 칼로》와 니콜라스 머레이가 찍은 붉은 레보조를 걸친 《프리다 칼로》, 레오 마티즈가 찍은 《태양 아래 프리다》 시리즈가 있다.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개인적으로는 건축 사진을 주로 찍던 기예르모 칼로의 또 다른 사진과 1900년대 초 멕시코의 정치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이 흥미로웠다. 삶에 대한 투지가 넘치는 프리다의 그림은 초현실주의 그림에 가깝지만 사실, 잔혹함이 뒤섞인 현실의 증언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그녀는 자유로운 팔로 그림을 그렸고, 화가로 성공하는 인생의 혁명을 이뤘다.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결국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감당할 수 있다” 

그녀의 아버지인 기예르모 칼로는 독일계 사진작가였다. 그런 아버지가 붙여준 '프리다'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 총명한 셋째 딸 프리다는 6살에 소아마비, 18살에는 전차 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철근이 골반을 관통해서 한 달 내내 병원에 입원하고, 석 달 동안 앉아있을 수조차 없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녀는 누워 있는 동안 부모님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프리다에게 그림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삶의 돌파구가 되었다.

1929년 그녀는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21살 연상,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결혼하지만 세 번의 유산과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남편과의 이별, 서른세 번의 수술과 오른쪽 다리 절단으로 비운을 거듭하게 된다. 그녀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시기 발표했던 작품들이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내 인생에는 두 번의 큰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 사고, 또 하나는 디에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디에고가 더 최악이다.”라고 프리다 칼로는 말했다. 그녀는 훗날 디에고와 재결합하기 전까지 그를 적나라하게 증오한다. 하지만 디에고에 대한  그녀의 지독한 애증(愛憎)은 그림과 함께 그녀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 된다.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와 같은 공산주의자였고 멕시코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당시 유명 화가이자 혁명가였던 디에고는 그녀의 작품을 보고 이러한 말을 남긴다.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으로

관능적이고 생생하게 빛난다.

나에게 이 소녀는 진정한 예술가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1939년, 프리다 칼로는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화가인 앙드레 브르통의 소개로 파리의 전시회에 초청받았다. 그녀는 <프레임(The Frame)>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 작품을 구입했다. 이로써 프리다 칼로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최초의 멕시코 예술가이자, 루브르에 입성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화가가 되었다.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고,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한 카사 아술(Casa azul)을 국립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지정했다. 그녀의 작품을 본 앙드레 브르통은 "그녀의 예술은 리본을 두른 폭탄이다"라고 호평했다.

프리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때로 작품명을 바꾸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래서 이때 전시된 작품 중 일부는 다른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 프리다가 남긴 많은 자화상들에는 그녀의 아픈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기 자신'은 프리다 칼로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침잠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

내가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자화상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출생부터 죽음에 대한 예측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의 자기 자신을 묘사했다. 자화상 속에서 그녀는 주로 홀로 선 채로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때로는 그녀가 키우는 긴 팔 거미원숭이나 조그만 초록빛 앵무새와 함께한 모습을 그리기도 했으며, 충격적인 장면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모습도 종종 그렸다.

유산 직후 병원 침상에 누워 있거나 출산하는 순간, 프리-콜럼비언 스타일(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15세기 이전의 시대로, 원시가 느껴지는 예술성의 문화)의 석상 같은, 텅 빈 얼굴을 한 유모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 등이 그러하다. 지독한 고독이 물씬 풍기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응시하려 했던 그녀의 자화상에선 특유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녀는 자화상에서 남장을 통해 내재된 남성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총 55점의 자화상 중에 자신을 동물로 묘사한 자화상은 <상처받은 사슴> 단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즈텍 달력에 따라 자신의 생일이 사슴의 날과 겹치는 것에 착안해 완성됐다. 여러 개의 화살을 맞은 사슴은 그녀의 눈망울로 처절한 고통을 고스란히 전한다.

평소 자신이 1907년생이 아니라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1910년생이라면서 스스로가 ‘멕시코 혁명이 낳은 유산’임을 주장한 그녀는 1954년 7월 2일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미국의 과테말라 정치 개입에 반대하며 과테말라 공산당을 후원하기 위한 집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며칠 뒤 7월 13일 고열에 시달리던 그녀는 아침에 홀로 숨을 거둔다. 그녀의 사망원인은 폐색전증이었지만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한동안 떠돌기도 했다.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프리다 칼로 사진전 / FRIDA KAHLO EXHIBITION ©선나림

프리다는 색채에 매우 민감했으며, 작품에서 색을 사용할 때도 결코 우연이나 무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양하고 선명한 색채를 주로 사용했지만 그중에서도 늘 사용하는 색들이 있었다. 그녀처럼 피 흘리는 장면을 자주 묘사하는 화가는 드문데, 일기에서 프리다는 각각의 색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탐구했으며 그 색깔에 해당하는 색연필로 각각의 색이 가진 의미를 적었다.

여기에서 참고한 색명 중 일부는 지역색을 담고 있으며 특정 지역의 고유한 이름이다. 예를 들면 '틀라팔리(Tlapali)'는 '색'이라는 의미의 아즈텍 (Aztec, 멕시코 원주민) 말이고, 초콜릿을 가미한 진한 갈색의 멕시코 전통 소스 '몰레(mole)'가 있다. 그녀는 백년초 선인장의 열매를 말려 그 진하고 붉은 즙으로 피를 표현하기도 했다.

“웃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웃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 프리다는 흡연과 단것을 즐겼다. 고르지 못하고 썩은 치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사진을 찍을 때 미소 짓지 않았다. 그녀는 여인이었고,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Viva La Vida”

‘Viva La Vida'는 스페인어로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이며 그녀의 유작 제목이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으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설익은 수박부터 잘 익은 수박까지 화폭에 가득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덩이엔 'Viva La Vida'라고 크게 적은 작품이다. 수박들의 단면을 통해 자신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면을 승화시킨다는 해석을 받고 있다. 프리다 칼로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8일 후 사망했다.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는 멕시코에서는 정물화를 ‘Naturaleza muerta’ 즉 ‘죽은 자연’이라고 칭한다. 정물화는 전통적으로 ‘삶의 무상함’이라는 주제를 전하는 용도로 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녀는 이 ‘죽은 자연’을 통해 생명과 삶을 찬양했다. 평생 200점의 그림을 그렸던 프리다 칼로는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Viva La Vida'를 남기기 위해 그토록 혁명가로, 예술가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후에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리더 크리스 마틴은 이 작품의 제목에 영감을 받아 같은 제목의 곡을 발매해 히트를 친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한 세계적인 팝스타 마돈나는 그녀의 <나의 탄생>이라는 작품을 보고 “이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프리다 칼로는 그녀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낸 그 자체가 어쩌면 혁명일지도 모르겠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심리적, 육체적인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마지막 작품에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라 새긴 삶을 만나 볼 수 있는 이 전시는 3월 26일까지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10층 문화홀에서 계속된다. “비바 라 비다”를 흥얼거리며 담대함을 채우는 뜻깊은 외출을 강력 추천해 본다. 그녀의 숭고한 외출에 따스한 마음을 보내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