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베트남 에피소드-4] 순수한 우정의 여정
[춤과 베트남 에피소드-4] 순수한 우정의 여정
  • 임선영 무용가
  • 승인 2023.02.08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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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린 러토우(Linh Rateau) (사진제공=임선영)

[더프리뷰=서울] 임선영 현대무용가 = 호치민에는 갑자기 멈춰버리는 시간이 있다. 스콜(Squall, 열대지방에서 대류에 의해 쏟아지는 세찬 소나기) 때문이다. 스콜이 내리퍼붓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던 일과 가던 길을 멈추고 비를 피하려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모두 사라진다. 도시는 텅 빈 영화 세트장 같다.

갑작스러운 비의 움직임을 미리 감지한 듯 베트남 사람들은 달리던 오토바이를 세우고 비옷을 꺼내 입는다. 분주한 모습은 이내 정적인 침묵으로 변한다. 그리고 15-20분이 지나면 다시 도시를 가득 채우며 오토바이의 행렬이 시작된다. 오후 2시 전에 늘 흠뻑 도시의 열기를 식혀주는 그 스콜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비 내리는 시간, 도시의 풍경, 사람들의 모습도 내게는 모두 추억의 장면으로 기억될 수 있는 소재들이다.

베트남에 사는 동안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야 했다. 오전은 온전한 나의 시간으로 채워졌고 오후는 어김없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함께 있었던 외국 엄마들과 함께 각 나라의 교육환경, 문화를 이야기하며 학교에서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친하게 지내던 인도, 방글라데시, 중국, 영국, 프랑스 엄마들 모두 친절하고 유머러스해서 우리는 종종 팟럭(potluck, 각자 나라의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 나눠먹는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꼭 빠지지 않고 받은 질문은 한국 엄마들은 왜 본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누구의 엄마로 호칭하는지 묻곤 했다. 자신의 이름을 결혼 전 인생의 장으로 마감하고, 결혼 후 인생의 장은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베트남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 엄마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조지프 헨릭의 책 <Weird>는 농업 집단생활을 주로 한 동양인들은 관계주의적 사회(개인의 생각, 생활보다 집단소속감과 집단의 의견)의 영향을 서양사회보다 많이 받았다고 언급한다. 물론 베트남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가족 공동체의식이 강하고 한 집에 두 세대가 함께 사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나도 동양인이니 그러한 정서가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춤’을 수단으로 나를 사유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춤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결혼을 선택했고, 그 이후로 주어진 ‘아이와 나’라는 두 개의 타임 테이블은 나를 더욱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베트남에서 아이가 다니던 국제학교는 오후 2시 30분이 되면 모든 학부모가 픽업을 가야 했다. 베트남 로컬 학교도 같은 상황이다. 베트남은 사회 치안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지원되지 않고 있어 어린이 유괴(kidnap)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학교나 학원은 절대 혼자 다닐 수가 없으며, 반드시 가족의 도움을 받아 등하교를 해야 한다.

결혼과 춤을 말하자니 나의 친구, 베트남계 프랑스인 린 러토우(Linh Rateau)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 역시 두 아이의 엄마이며 호치민에서 단센터(Dancenter)를 운영하는 디렉터이다. 이 센터는 주로 엑스팟(Expat, 베트남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지칭하는 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운영하는 센터이다.

아라베스크 무용단 예술감독 탄록을 처음 만난 이후 연락이 없던 몇 달 동안 나는 스스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고 싶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춤에 집중하고 싶었고 내적인 충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춤을 지속하는 것과, 춤과 함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이것이 내가 베트남에서 갖고 싶었던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린 러토우를 만난 것은 우연의 필연이었다. 내가 살던 지역(Disrict 2)에서 무용 연습을 할 수 있는 단센터(Dancenter)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그곳을 쉽게 찾아갈 수 있었고, 단센터 로비에서 재즈를 가르치는 사브라 존슨(Sabra Elise Johnson)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린을 만나보라는 팁을 얻게 되었다. 나는 무작정 나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그녀를 찾아갔다. 처음 보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현지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춤과 관련이 있다면 누구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발레를 처음 배우고 춤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리고 국제재즈무용센터(Le centre international de la danse jazz)에서 3년간 춤을 배웠으며, 프랑스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무용센터에서 수업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아버지의 고향인 베트남으로 2001년 이주, 베트남 프랑스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치며 생활을 했다.

단센터 연습실 (사진제공=임선영)
단센터 연습실 (사진제공=임선영)

그녀는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춤을 추고 싶어하는 베트남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춤을 가르쳐 주고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보살핀 베트남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무용수가 되었고, 그녀의 센터에서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성장하였다. 2007년에 설립된 단센터는 2011년 District 2로 장소를 옮겨 본격적인 무용교육 활동을 진행하였다. 현재 미국, 프랑스 국적의 무용 강사들이 그곳에서 어린이와 일반 성인을 위한 발레, 재즈, 힙합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며칠 후 린에게서 연락이 와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나의 개인 연습을 위한 공간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녀의 그 한 마디는 낯선 나라에서 생각의 모험에 뛰어들어 타성에 젖어들지 않도록 몸부림치는 나에게 비춰진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었다.

매일 아침 난 9시면 연습실로 갈 수 있었고 2시간, 완전한 고독의 공간을 유영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매일 홀로 연습을 통해 나는 솔로 작품 <여래의 몸>, 베트남 무용수 눙보(Nhung Vo)와 황황민민(Hoang Hoang MinhMinh)의 듀엣 <생존 기계>를 한국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린은 종종 이들 두 무용수의 <생존 기계>의 연습과정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 둘의 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듣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작업 과정과 한국 공연에 대한 정보 등 모든 것을 그녀와 공유했다. 우리의 우정이 춤으로 인해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말보다 진한 표현의 춤이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나를 표현하기 위한 거추장스러운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래의 몸' (사진제공=임선영)

나는 린의 개인적인 행사에 초대를 받으면서 그녀가 이방인에 관한 의심을 거두고 그녀의 공간에 나를 위한 자리를 조금씩 만들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린의 따뜻한 환대에 의해 나는 베트남 무용사회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며 비로소 나의 삶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서히 나는 이방인의 이름표를 떼고 베트남의 공동체 안에서 삶을 공유하는 사회인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사람은 단독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과 공동의 관계에 있을 때 서로 긴밀함을 느끼고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활하는 세상 속에 섞여서 세상을 바라고 그 세상 속에서 나를 실현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인 것이다.

나와 린은 춤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이 사회에서 성장할 수 있을지, 무엇을 설계하고 공유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런 부분이 우리의 만남과 대화를 매우 가치 있고 클래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그 하나로 ‘컨템퍼러리 여성 무용수(베트남, 미국, 한국)의 밤’을 함께 구상하던 중이었는데 코로나19로 공연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생존 기계' (사진제공=임선영)
'생존 기계' (사진제공=임선영)

어린 시절 프랑스에서 경제적으로 여유 없는 상황에서도 춤을 통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녀, 단센터를 만든 이유는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지원의 일환으로 무용을 하고 싶은 베트남 친구들이 편안하게 집처럼 생각하고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과 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춤과 삶의 관한 그녀와의 대화는 나에게 마음의 재산이 되었고, 그녀에게 받았던 인상, 건강함, 아름다움, 인품, 지성 등은 어떤 특별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린이라는 한 타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나의 마음을 명랑하고 경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의 친구 린 러토우는 나눔의 춤을 생성하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방법을 보여준 아름다운 사람이다. 2023년 봄에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임선영 무용가
임선영 무용가
sunyounglim@hotmail.com
이대 무용과 졸업. 2018년 아르코 국제레지던시 선정.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현재는 베트남 아라베스크무용단 초빙안무가로 활동 중이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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